▲ 이원우 기자 |
[미디어펜 이원우 기자] 2013년 ‘정글만리’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이 큰 인기를 끌었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가 새로 내놓은 이 장편소설은 출간 5개월 만에 도합 100만 부를 돌파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 차트 상위권에 아주 오래 머물렀다.
세 권으로 나뉘어 출간된 긴 작품이지만 ‘정글만리’는 딱 여섯 글자로 요약이 가능했다. ‘반미 반일 친중(反美 反日 親中)’이다. 한국 문학계에서 반미·반일이야 드문 일도 아니지만 조정래 작가의 친중적 서술은 ‘정글만리’의 주된 정서 그 자체였기에 눈길을 끌었다. 길바닥에 자유롭게(?) 용변을 보는 중국인들의 모습까지도 ‘인간적’이라고 표현하는 수준의 파격이 작품에는 여러 차례 등장했다. ‘정글만리’를 읽고도 중국에 대한 호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렇게 소설의 형태를 한 ‘중국 홍보 카탈로그’가 한국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한지 3년. 촘촘해 보이던 친중의 아성에 균열이 생길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진원은 국제면도 사회면도 아닌, 놀랍게도 ‘연예면’이었다.
열여섯 소녀 쯔위, 동아시아를 ‘흔들다’
JYP엔터테인먼트가 작년 10월 야심차게 출격시킨 9인조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16)가 MBC 예능 ‘마이 리틀 텔레비전’ 생중계에 출연했을 때, 이 방송이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만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데뷔한 쯔위가 태극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를 함께 쥐고 흔들었을 때 그걸 이상하게 생각한 한국인도 없었다. 그나마 본방송에서는 국기를 든 쯔위의 모습은 편집됐다.
문제는 청천백일만지홍기의 존재 그 자체가 불편한 사람들, 그러니까 중국인들의 눈이었다. 대만에서 태어났지만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대만을 비판하는 게 직업인 것처럼 보이는 연예인 황안은 쯔위를 ‘대만 독립분자’로 매도하며 여론에 불을 질렀다. 때마침 대만이 선거를 앞두고 있었던 터라 이 문제는 순식간에 정치 이슈로 비화됐고, 결국 쯔위라는 이름의 열여섯 소녀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대만의 여론까지 뒤흔든 존재가 됐다. 데뷔한지 3개월 만에 외교 문제를 일으킨 가수는 쯔위가 처음이다.
▲ 조정래 '정글만리' (2013) |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상황이 변화하고 있지만 한 가지 사실은 이미 명확해졌다. 중국과 대만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많은 한국인들이 비로소 처음 인식하게 됐다는 점이다. 덧붙여 이 문제에 임하는 중국의 태도 역시 많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다.
사태 초반, 중국인들이 쯔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얘기가 들려올 때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의 여론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오다가다 한 번씩 본 적이 있어서 웬만큼 눈에 익숙한 ‘대만 국기’ 한 번 흔든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 싶었던 것이지만, 쯔위가 출연한 CF가 취소되고 JYP 소속가수들의 중국 행사가 취소되는 등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중국과 대만의 골은 그 정도로 깊었던 것이다. 대만인들은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무대에서 ‘대만 국기’를 쓸 수 없다는 점, 중국과 수교를 맺으려는 국가는 대만과의 수교를 끊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한국도 그 중 하나였다는 점 또한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사실이었다.
결국 JYP는 박진영 대표 명의의 사과문과 쯔위의 사과 동영상을 발표했다. 이 중에서 쯔위의 사과 동영상은 한국인들에게도 상당히 큰 충격을 줬다. “중국은 오로지 한 국가” “양안(중국과 대만)은 단일한 국가” “늘 저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해 왔다” 등 쯔위의 본심이라 보기에는 누가 봐도 무리인 내용들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쯔위의 사과 동영상에 대한 반응 중에는 “IS가 인질을 살해하기 전에 유언을 읽게 하는 모습과 똑같다”는 지적마저 있었다. 다소 섬뜩한 비유지만 그 정도로 화면 속 쯔위의 모습에는 위화감이 있었던 것이다.
까다로운 손님처럼 ‘갑질’ 하는 중국인들
상황이 여기까지 왔지만 충격의 파도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 영상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응은 한국인들을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국 배우 임경신은 쯔위의 사과 동영상을 자신의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 링크하면서 “사과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대본을 외울 시간도 없었다”며 쯔위를 조롱했다. 이 게시물에는 10만 개 가까운 댓글이 달렸고 그 중 상당수는 임경신에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중국인들의 반응은 ‘정글만리’를 통해 ‘대국 중국’의 면모를 전해들은 한국인들에게는 상당히 생소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쯔위 사태는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한다는 의미의 G2라는 단어가 무색하게도 중국의 민도, 중국의 소프트파워는 실로 실망스러운 수준임을 다시 한 번 목도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런 중국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이유가 ‘비즈니스’ 때문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들을 서글프게 만든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아름다운 말 속에 숨겨진 야만은 열여섯 소녀 가수의 비(非) 정치적 행위를 빌미로 극도의 정치성을 띠며 표면화된 것이다.
▲ 명동에 나가보면 이곳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한중 양국의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그들의 심리 어느 한 자락은 깃발 하나로도 표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쯔위 사태’는 상기시켜 줬다. /사진=중국인들에게 사과하는 쯔위의 모습(上, JYP 엔터테인먼트), MBC 예능 '마이 리틀 텔레비전' 녹화장에서 대만 국기를 흔든 쯔위(下, MBC) |
조금 거친 비유를 하자면 중국의 행태는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갑질’을 하는 진상 손님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중국에 극단적으로 자세를 낮춘 JYP 엔터테인먼트의 결정도 조금은 이해가 간다.)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하나의 중국’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행동을 ‘실수로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중국인들의 속마음이라는 걸 이번 사태는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쯔위 때문에 투표를 하러 나섰다는 대만인이 134만 명이나 됐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대만의 여론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분노의 주된 타깃은 물론 중국이지만, 안 그래도 만만찮은 반한(反韓) 감정을 가지고 있던 대만인들에게 한국 기업이 내보낸 쯔위의 사과 동영상은 일종의 인권 침해이자 학대로 인식된 것 같다. 가엾은 열여섯 소녀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사과문을 읽는 모습을 바라본 한국인들의 마음 역시 좋을 리는 없다. 3년 전 ‘정글만리’의 흥행이 무색하게도 2016년의 인터넷에는 중국에 대한 반감이 넘실대고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
생각해 보면 중국 대륙의 자기중심적 태도는 하나의 고정변수라 할 만큼 오랜 시간동안 계승돼 왔다. 나라 이름에 중(中) 자가 들어간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그런 중국에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정서적으로 복속되길 자처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의미의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대외정책의 기조로 내걸었다. 흑심(黑心)을 가지고 있다는 걸 대놓고 표현하는 국가는 중국 이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시대는 21세기가 됐지만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에 놓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중국의 오랜 기질, 그리고 열등감과 우월감이 묘한 비율로 배합된 것 같은 중국인들의 국민성은 한 번씩 이렇게 주변을 놀라게 만든다.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로 표현하지만 이제 그 수식어는 중국에게도 적용돼야 하는 게 아닐까.
명동에 나가보면 이곳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한중 양국의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그들의 심리 어느 한 자락은 깃발 하나로도 표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쯔위 사태’는 상기시켜 줬다. 소설책 바깥에서 바라본 ‘만리 밖 정글’ 중국과의 공존은 기대만큼 순탄치만은 않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