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거일 소설가 |
자유화의 전략
요즈음 자유화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자유주의 원리를 현실에 적용해서 억압적 요소들을 걷어내는 일(liberalization)이라는 개념이야 익숙하지만, 그것을 명시적 구호로 삼아서 적극적 개혁에 나서자는 움직임은 근래엔 처음이다. 얼마 전 현진권 자유경제원장이 조선일보의 칼럼에서 “산업화, 민주화 다음엔 자유화”라는 화두를 던져서 큰 호응을 얻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크든 작든 자유주의의 영역을 확산시키는 계기이므로, 반가운 일이다. 이제 우리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이념적 경쟁에서 나온 뜻있는 돌파(breakthrough)로 삼아 성과를 확대해야 할 것이다. 이런 노력은 자유주의의 성격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어야 보다 효율적이 될 터이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산업화나 민주화나 본질적으로 우리 사회가 치른 자유화의 한 부분이었다는 점이다. 산업화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원리를 우리 경제에 적용해서 보다 발전된 시장경제를 이룬 과정이었다. 민주화는 그런 경제적 자유화에 바탕을 두고 정치적 자유화를 이룬 과정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서로 연관이 없는 현상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자유주의의 이상에 보다 가깝게 진화하는 모습의 다른 측면들이었다.
자유화라는 구호엔 이제 우리 사회의 모든 면들에서 자유주의를 명시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 담겼다. 자유주의는 정치와 경제는 물론 풍속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 이념이다. 실은 그것은 생태계에도 언젠가는 적용되어야 할 이념이다. 인류가 생태계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바로 자유주의는 생태계가 건강하게 진화하도록 인도하는 원리가 된다.
이념들 사이의 경쟁은 사람들의 뇌를 차지하려는 다툼이다. 갖가지 생각들(memes)은 사람들의 뇌들이라는 환경에 서식하는 추상적 존재들이다. 그런 생각들은 서로 어울리는 것들이 한데 모여 거대한 복합체(memeplex)를 이룬다. 그런 생각의 복합체들 가운데 사회의 성격과 조직에 관한 것들은 이념(ideology)이라 불린다. 즉 이념들은 본질적으로 사회철학(social philosophy)들이다.
생각들의 환경이 뇌들이므로, 뇌에 잘 맞는 생각들이 번창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직관에 맞고 일상 경험에서 도움이 되는 것들이 우세하다. 즉 생각의 진화에선 민중주의(populism)가 자연선택에서 살아남아 널리 퍼진다.
▲ 산업화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원리를 우리 경제에 적용해서 보다 발전된 시장경제를 이룬 과정이었다./사진=미디어펜 |
자유주의는 사람들의 직관에 잘 맞지 않는다. 인류는 오랫동안 작은 무리를 지어 살았으므로,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춘 조직에 맞는 생각들과 행태들을 천성으로 지녔다. 작고 일시적인 조직에서도 사람들은 이내 지도자를 찾고, 어린 아이들이 함께 몰려다니면, '골목대장’이 나온다. 개인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자유롭게 활동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인도된 것처럼 사회의 조화에 이바지하리라는 생각은 우리 천성엔 낯설다. 실은 개인들은 무리를 위해 존재하며 늘 무리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우리 천성에 가깝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조건이 더욱 불리하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그것을 반대하는 전체주의자들까지 겉으로는 찬동한다. 공산주의 국가들마다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넣는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들에선 법의 지배, 언론의 자유, 자유로운 선거 및 권력의 분점과 같은 자유주의적 관행들이 자리 잡았고 반자유주의적 세력들도 그런 관행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경제 분야에선 사정이 다르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상당한 경제학 지식이 있어야 이해가 되는 이념이다. 불행하게도, 경제학은 복잡하고 불투명하고 아름답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반직관적인 학문이다. 게다가, 폴 새뮤얼슨이 탄식했듯이,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경제 지식들을 갖췄고 그래서 자신들이 경제에 대해서 알만큼 안다고 여긴다. 당연히, 그들은 경제학을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고도 정부나 정당의 경제 정책들에 대해서 평가하고 투표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런 문제는 지식인들에게서 더욱 심각하다. 일찍이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지적했고 하이에크가 잘 설명한 '한 분야에서의 박식이 다른 분야에서의 옳은 판단을 보증한다’는 오류가 우리 사회에서도 널리 퍼졌다. 그래서 경제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지식인들이 태연하게 경제 체제와 정책들에 대해서 '전문가’로 자처하면서 명쾌하게 평가한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경제적 자유주의는 사람의 뇌라는 환경에서 번창할 길이 없는 이념이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이 근본적 조건을 인식하고 거기 맞춰 전략과 프로그램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늘 쉽게 풀어 쓴 경제학 입문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사정을 인식한 데서 나온다.
아울러, 경제적 자유주의들은 늘 외롭게 별다른 보답도 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실존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세상의 몰이해와 무관심에 지쳐서 자유주의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개인적 불행을 피할 수 있다. 좌파 정권 아래서 자유주의자들을 이끈 손병두 총장은 말했다, “한국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는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깊이 새길 얘기다. 우파 정권 아래선 오히려 사정이 더 나쁘다. 반자유주의적 정권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시민들의 무관심이다.
▲ 산업화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원리를 우리 경제에 적용해서 보다 발전된 시장경제를 이룬 과정이었다. 민주화는 그런 경제적 자유화에 바탕을 두고 정치적 자유화를 이룬 과정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서로 연관이 없는 현상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자유주의의 이상에 보다 가깝게 진화하는 모습의 다른 측면들이었다./사진=미디어펜 |
경제적 자유주의의 생존과 전파에서 결정적 제약 조건은, 위에서 살핀 것처럼, 경제학 지식이 널리 퍼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자유화의 전략에서 핵심적 목표는 올바른 경제학 지식의 보급이다. 여러 해 전 경제학 학술대회에서 경제적 자유주의와 경제학 지식 사이의 관계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원로 경제학자 김우택 교수가 말했다, “기회비용이라는 개념 하나만 알아도, 사람의 판단이 달라진다.” 자유화가 세상을 바꾸는 구호가 되려면, 올바른 경제학 지식의 보급이라는 눈에 잘 뜨이지 않는 노력이 함께 나와야 한다.
올바른 경제학 지식의 보급에서 자유경제원은 이미 큰 업적을 이루었다. 우리 사회의 앞날을 예견하고 자유경제원을 설립한 최종현회장의선구자적안목에우리는늘깊은존경과감사의마음을품게된다. 그러나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자유주의자들도 거기에 적응해야 한다. '정규재 TV’가 이룬 경이적 성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맞은 궁극적 과제는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젊은이들에게도 최소한의 경제학 지식을 보급하는 것’일 터이다.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이 과업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것이다. 진화의 기본 전략이 수많은 실패들을 통해서 성공을 찾아내는 것 아닌가? 우리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부족했던 점이 바로 이 대목이다. 새로운 환경에 맞는 전략과 프로그램을 만들면, 처음엔 당연히 실패한다. 우리는 그런 실패들을 진화 과정에서 나오는 일련의 실험들로 여겨서 교훈을 얻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늘 입에 올리는 것이 기업가 정신이고 혁신인데, 정작 우리가 그렇게 대범하게 실패들을 대했는가 성찰해야 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부족한 것들은 선의나 사랑이 아니다. 정작 부족한 것은 상상력과 대담성이다. 프랑스 혁명을 이끈 당통의 구호 “대담하게, 더욱 대담하게, 늘 대담하게 (De l’audace, encore de l’audace, et toujours de l’audace)”는 언제나 소수로 남을 수밖에 없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잘 어울린다. /복거일 소설가
(이 글은 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