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 |
다시 한번 국제문제에 있어 ‘지도자 변수’가 결정적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실용’이나 외치고 있던 과거 정부라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고, 김일성과 김정일이라면 핵과 미사일 개발에 나름 신중의 신중을 거듭하며 진행했을 터다.
한반도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예상을 뛰어넘는 현 정부의 일관되고 신속한 결단이 지향하고 있는 종착점은 어디인가. ‘사드’에 대해 중국은 왜 이리도 과도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사드’가 기술적으로 완벽하지 않다는 약점은 이제 별반 중요한 이슈가 못 된다. 중국이 극도로 싫어하는 걸 왜 굳이 도입하냐며 그 후과가 두렵다는 반대론에는 중국측의 지나친 오만한 자세는 용인해 주는 일방적 중국 중시론이 반영됐다.
시진핑 주석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통화(2월 5일)에서 중국의 대한반도 인식을 분명히 했다. 한반도에서는 핵도, 전쟁도 안 된다는 ‘2불능론’인데 한국뿐 아니라 미국을 향한 메시지라는 것은 자명하다.
관영 신화통신은 북한 핵 문제 해결의 직접 당사자로 북한과 미국을 지목하기까지 했다. “핵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이 이성적으로 정치적 해결을 도출해 내길 바란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핵 개발 명분론을 묵인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으로서야 어처구니 없겠지만 말이다.
일부에서 해법으로 주장하는 북·미간 평화협정론의 충정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차라리 한반도의 안보구조를 바꿔 영속적인 평화를 꾀하자는 대승적 결단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리 간단치 않다. 60년을 이어온 한미동맹의 질적 변화를 수반한다.
▲ 박근혜 정부의 전격적인 개성공단 중단조치는 남북관계의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의미가 있다. 양 당사자는 사라지고 남북관계를 오롯이 국제문제의 차원으로 이관했음을 공식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핵심의제는 핵 안보 문제의 최우선화다./사진=연합뉴스 |
작금의 상황은 문제는 북한이 일으켰는데 비난은 남한이 받는 형국이다. 중국과 미국의 잠재적 충돌이 ‘사드’문제로 남한에 노정되고 있으니, 북한으로서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꼴이 돼 버렸다.
일반적 가설(‘북한은 절대 미국을 향해 미사일을 쏘지 못할 것’이라는)을 깨고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이 캘리포니아 해안가에 떨어질 경우를 상상해 보자. 동맹국에 대한 공격은 자국에 대한 공격과 동일시하는 것이 동맹의 원칙이다. 한국은 즉각적인 대북 보복 작전에 돌입할 수 있을까?
아니,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보자.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주변 4강 중 가장 이득을 볼 나라가 어디일까? 첫 번째 일본이고 러시아, 중국과 미국은 ‘밑져야 본전’인 조건을 만들지 않을까?
그런 상황이면 북한정권은 멸망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남한에 의한 완전한 무력 통일이 과연 가능할까? 전쟁까지 치르게 된 마당에 중국과 러시아가 용납할까? 국제관계에서 한 국가의 운명은 그 나라 국민의 ‘의지치’만으로는 결정되지 않는다. 온갖 국제정치 이론은 그것을 정교하게 설명하는 장치일 뿐이다.
북한의 젊은 ‘경애하는 지도자’는 국제정치 이면에서 작동하는 힘과 위신의 조율이라는 외교의 뇌관을 건드렸다. 안보 우선 제일주의가 가시적으로 국정 전면에 등장하게 되면 외교는 설 자리가 없어지는 법이다. 박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은 ‘외교’이지만 ‘사드’도입 결정은 외교가 아닌 것이다.
동맹이란 일방이 아쉬울 때만 꺼내 쓸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아니다. 60년 간 한국을 뒷받침했던 한미동맹이 이제 한국에게 ‘일도 양단’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그 원치 않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시기가 임박하고 있다.
‘북한이 미국에게 핵이든 미사일을 쏘랴’라는 가정이 틀렸을 때, 한국이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한미동맹은 이미 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즉각적으로 동맹국을 위해 피 흘릴 각오가 돼 있는지 ‘사드’ 문제는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원하건 원치 않건 북한은 중국을 끌어당기고 있다. 태평양에서 벌어질 미·중 간 대리전(proxy war)의 공간이 한반도가 되는 쓰디 쓴 역사가 재현될 수도 있는 위험상황을 북한은 회피하려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남한과의 가장 큰 차이점인 것이다.
일찍이 레이몽 아론(Raymond Aron)은 ‘전쟁은 권력을 쟁취하는 수단’이라고 간파했다. 냉전시기에도 미〮소가 비확산 레짐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핵 기득권의 보호 차원이 아니었다.
핵 확산이 파국으로 향하는 새로운 위험이 커지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 사이에 형성되는 공포의 균형은 매우 불안정하고 취약하다는 것을 핵을 가진 자신들이 먼저 알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핵 보유의 유혹은 독재국가 지도자들에게는 실로 강력한 것일 수 밖에 없다. “핵 폭탄을 보유한 국가는 국제적인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목소리를 낼 수”(1992년 카자흐스탄 대통령 대변인 발언) 있기 때문이다.
▲ 지난 7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이라는 초강수를 뒀다. 북한의 젊은 ‘경애하는 지도자’는 국제정치 이면에서 작동하는 힘과 위신의 조율이라는 외교의 뇌관을 건드렸다. 안보 우선 제일주의가 가시적으로 국정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 /사진=연합뉴스 |
일본은 이제 아시아에서 자신의 군사·외교적 입지를 강화시킬 호기를 맞았고 미국은 그런 일본을 전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외투를 벗은 중국의 ‘굴기(崛起)’를 미국이 한반도에서 대응해 주는 상황이 러시아로서도 그리 나쁘진 않다. 중국도 남북한 모두를 미국에 대한 안보와 정치, 경제적 완충지로 쓰게 됐으니 크게 손해볼 것 없는 해볼만한 게임이라고 여길 법하다.
한반도가 자칫 제2의 ‘파쇼다(Fashoda) 사건’(1898년 7월 아프리카 수단의 파쇼다에서 일어난 영국과 프랑스의 무력충돌로 제국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계기가 됐다)의 진원지가 될 수 있는 위기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구도라면 과감한 편이 낫겠지만 말이다.
동북아에서 유럽 같은 다자안보 균형이 정착하려면 한국이 독일만큼 강력한 국가가 됐을 때에나 가능하다. 냉전시기 미·소 간 전세계에 걸친 끊임없던 지역 분쟁 속에서도 평화가 보장된 것은 상호공멸(Mutual Assured Destruction)이라는 공통의 위협을 이성적으로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북아에서는 그 대상이 적어도 미국과 중국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 남북이 처한 슬픈 현실이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남한 핵 무장론이 실은 현실성이 없는 주장임에도 정치적으로는 대중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안보체제의 불안정이 불확실한 세계에 살고 있는 개인의 정체성 욕구를 자극하여 높은 안보 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마치 북한이 중국의 바램과 다르게 가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 한국도 미국과 세계질서가 깔아 놓은 길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걸어가야 현명하게 보이는 착시효과를 주입하는 것과 같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변화에 저항하려는 의지와 필요하다면 힘을 통해 변화를 가져오려는 의지 간의 대결은 종종 전쟁의 원인이 된다. 한국은 과거에는 비일비재했던 암중모색과 진퇴양난에 갇히던 고민을 털고 일련의 과감한 행동으로 일관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오래 전 와이트(Martin Wight)가 지적했듯, 국가 간 차이란 자신의 여건에 만족하여 보수적이고 현상유지적 권력유지를 선호하는가, 권력구조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가지지 못한 자’로 규정, 구조 내에서 과격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가에서 비롯된다(Power Politics, 1946).
굳이 분류하자면 핵을 추구하는 북한은 후자에 속한다. 오랫동안 중국의 눈치만 보던 한국이 신속한 ‘사드’ 도입결정과 개성공단 중단조치로 ‘힘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가져오려는 의지’를 가시화했다.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모골이 송연해진다. 한반도에서 어느 한쪽이 죽느냐, 사느냐는 ‘엔드게임’(endgame)이 정말 다가오는 것인가.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