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명 미디어그룹 '내일' 대표·미디어워치 온라인편집장
2일 이종걸 원내대표를 끝으로 막을 내린 필리버스터로 더불어민주당은 재미를 좀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야권분열로 인해 흩어졌던 집토끼를 모았다. 필리버스터 전, 혹은 초기 여론조사에서는 변동이 없거나 더 떨어졌던 지지율이 가장 최근에 나온 일부 조사결과에선 상승했다. 여론조사기관 '디오피니언'에선 전달보다 3.9p%, '알앤써치'에선 전주대비 4.5%p 올랐다.
반대로 국민의당은 같은 여론조사에서 전달보다 각각 2.5%p, 1.4%p가 하락, 지지율이 더 떨어졌다. 특히 호남에서 하락폭이 컸다. 이 결과만 보면 더민주는 필리버스터 정국의 최대 수혜자가 분명한 것 같다. 그게 야권 재편을 위한 주도권 싸움이든, 아니면 총선이든 필리버스터 정국을 거치면서 국민의당을 바짝 누른 것은 더민주로선 큰 정치적 소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회기 끝까지 필리버스터로 밀어붙여야한다고 장내외의 소위 친노들이 그렇게 반대를 했을 것이다.
오직 눈앞 선거 득실 계산만 따른 더민주
지지층은 모았는지 몰라도 그러나 더민주는 큰 것을 잃었다. "국가정보원의 숙원 사업인 무차별 감청을 확대하는 방안은 죽어도 수용할 수 없다" "이건 저희 목숨을 건 결의"라던 이종걸 원내대표와 더민주는 스스로 필리버스터 종료를 선언했다.
그 이유는 죽어도 수용할 수 없다는 테러방지법이 아니라 선거구획정안 처리가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더민주에게는 테러방지법이 아니라 자신들 선거가 우선이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필리버스터 중단이 선거에 도움이 된다는 김종인 비대위 대표 뜻에 따라 테러방지법 저지를 포기한 면도 그렇다.
더민주의 필리버스터는 과정과 결과 모든 면에서 '총선의, 총선을 위한, 총선에 의한 것'은 아닌지 불신의 증거가 됐다. 명분도 실리도 신뢰도 다 잃었다. 사진은 김종인 대표(오른쪽)와 이종걸 원내대표. /사진=연합뉴스
국정원이 국민 카톡을 마음대로 들여다볼 것이며, 국정원은 국민 잡는 괴물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겁을 주더니 자신들 선거를 이유로 중단했다. 더민주 말만 믿고 천하의 악법, 국민사찰법으로 믿고 막아줄 것으로 철썩 같이 믿었을 국민은 뒤통수를 맞은 꼴 아닌가. 이건 집토끼들을 울타리 안으로 모은 당장의 성과보다 분명 더 크고 심각한 손실이다.
필리버스터 중에 보였던 더민주 의원들의 갖가지 행태들도 당의 수권능력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우리 국회법 102조에는 '모든 발언은 의제(議題) 외에 미치거나(의제와 관련 없거나) 허가받은 발언의 성질에 반하여서는 안 된다'고 돼 있는데도 더민주 의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의원들은 의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모녀 사건, 정수장학회 전신 부일장학회 헌납 문제를 끄집어냈고, 사드 얘기며, 자기 지역구 이야기를 꺼낸 이들도 있었다. 최민희 의원은 조지오웰의 1984를 읽었고 이학영 의원은 김남주 시인의 진혼곡을 낭독했다.
틈만 나면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을 강조하던 의원들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법을 무시하는 것을 국민이 고스란히 지켜봤다. 또 대한민국 안보를 담당하는 국가기관을 매도하고 헐뜯고 어떻게든 힘을 빼려는 모습도 국민에게 불안감과 불신만 잔뜩 안겼다. 그래서 야당에게 돌아가는 건 뭔가.
야당 불신의 또 하나 증거가 된 필리버스터
야당은, 특히 강경파 의원들은 과거 그늘진 몇 몇 경험이 마치 국가정보원의 전부이고 실체라도 되는 것처럼 망상에 가까운 찌든 피해의식을 보였다. 국정원을 없애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끊임없이 비방하고 음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남는 건 국가정보기관의 무력화일 뿐이다. 그래서 국민에게 돌아갈 것은 뭔가.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켜야할 국가기관이 제 역할을 못하고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것뿐이다. 금융정보, 통신정보 모두 법적으로 엄격히 제한을 받고, 무엇보다 테러위험인물과 단체에 국한된 법안을 가지고 온갖 상상의 가지들을 덕지덕지 붙여 침소봉대하는 게 옳은 일인가.
새누리당이 29일 의원총회와 규탄대회를 열고 필리버스터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사진=미디어펜
허위에 가까운 국민사찰법으로 둔갑시켜 법안제정을 막아 국민을 테러위협에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게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다는 야당이 할 짓인가. 스스로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극소수가 마음 편하자고 국정원을 있으나 마나한 기관으로 만드는 일을 좋아할 집단이 북한 말고 또 있나. 더민주가 아무리 우클릭을 하고, 정책승부를 떠들어도 국정원에 대한 비정상적 집착과 증오를 가지고는 수권정당으로서 국민에게 믿음을 줄 수 없다.
더민주 박영선 의원이 필리버스터 중 눈물을 흘리면서 한 발언은 의미심장했다. "저에게 분노의 화살을 쏘십시오. 그리고 제가 다 받겠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뭡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데도! 그런데도! 저희가 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총선에서 이기려고 그러는 겁니다."
더민주는 정말 그랬다. 선거 때문에 목숨 걸고 한다는 필리버스터를 스스로 중지했고, 국정원을 괴물로 만드는 국민사찰법이라던 테러방지법의 단 한 글자도 고치지 못하고 그렇게 통과시켜주면서 무능만 증명했다. 국민이 보는 앞에서 눈물콧물 짜며 얄팍한 감성을 팔았던 필리버스터는 거룩한 명분과 달리 선거운동장으로 실컷 이용됐을 뿐이라는 비판만 떠안고 허망하게 끝났다.
과정과 결과 모든 면에서 '총선의, 총선을 위한, 총선에 의한 것'은 아닌지 불신의 증거가 된 필리버스터가 남긴 건 세계기록 경신뿐이다. 명분도 실리도 신뢰도 다 잃은 더민주가 이렇게 해서 돌아온 집토끼에 환호하고 안도하는 수준으로는 총선도 다음 대선도 어림없다. /박한명 미디어그룹 '내일' 대표·미디어워치 온라인편집장
[박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