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파괴야말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말했지만, 그는 정반대되는 예언도 했다. 시장경제가 고도화될수록 그걸 옹호해줄 사람이 없어져 자칫 몰락할 수도 있다는 역설 말이다. 시장경제 고도화와 함께 찾아오는 경제력 집중, 불평등을 사람들이 점차 못 견뎌하고, 언론-학자마저 여기에 쉬 동조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손가락질에 모두가 편승할 경우 시장경제는 제풀에 주저앉는다는 게 슘페터의 경고인데, 자유민주주의(자민주의)의 앞날 역시 그런 역설에 노출돼 있다. 자민주의의 질적 수준이 높아질수록 이 체제를 몰락으로 몰고 가는 힘도 함께 커진다.
교과서 수준의 민주주의만을 아는 위선적 지식인 그룹은 그런 위험성을 미처 모르거나 말하지 않겠지만, 책임있는 우리라면 좀 달라야 한다. 상황이 그만큼 위중하기 때문이다. 4월 총선 정치의 계절이 한창인 지금 좀상스러운 협잡과 편 가르기 따위만 무성할 뿐 진정한 담론은 거의 찾아볼 수도 없다. 충격적 몰락의 개연성과 진정한 역사 대박의 그 사이에 서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이래도 될까?
시장경제의 몰락, 민주주의의 타락
그 차원에서 지난 보름 나는 자민주의를 보위할 방어체제를 갖추자는 제안을 연속 칼럼으로 써왔다. 오늘이 포괄적인 성찰을 곁들이는 대미(大尾)인데, 분명한 건 민주주의란 생각보다 취약점이 많다. 합당한 방어장치 없이는‘자민주의 체제를 흔드는 안팎의 손’에 의해 어느 날 붕괴할 수도 있다.
그런 방어적 민주주의론 나의 경우 특히 정치학자 양동안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학자의 머리수만큼 많은 게 민주주의 정의인데, 그중 양 교수의 것이 설득력 있다. 무책임한 '민주주의 만능론'을 경계하는 훌륭한 지침이기 때문이다.
사실 적지 않은 이들이 민주주의란 게 보편적이며, 최고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여기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기회에 점검해봐야 할 요소가 더 있다.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통치방법, 즉 그릇이다. 민주주의란 그릇 안에 무얼 담아낼 것인가는 각 나라와 체제가 선택하기 나름이다. 즉 민주주의란 그 자체가 별도의 이념이나 사상체계는 아니다.
자민주의는 자유-평등-관용-다수결 등을 핵심원리로 하고, 국민주권과 대의제도를 제도화하는데, 그게 더욱 더 잘 구현될수록 그걸 빌미로 내부의 적들이 활개를 친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경제 두 부문이 모두 꼭 그러한 형편에 처해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그건 데모크라시를 '민주정'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민주주의'라고 하는 바람에 생긴 착시현상이다. 살펴보시라. 옛 소련 공산주의자나, 지금 한국의 종북좌파 무리처럼 민주주의 그릇 안에 사회주의-평등주의란 내용물을 담고 싶어 환장하는 헛똑똑이도 수두룩하지 않은가.
그런 진보적 민주주의 혹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의 한 형태이겠지만, 우린 그것에 반대했다. 민주주의라는 그릇 안에 자유주의란 위대한 비전을 담기로 합의했고, 그래서 우남 이승만 등 건국의 아버지들이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68년 전에 세웠다.
이참에 물어보자. 자유주의의 비전이란 무엇인가? 근대의 문을 열었던 존 로크와 아담 스미스의 주장처럼 정부란 국민의 동의 아래 통치를 해야 하며, 국민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건 물론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자민주의는 '자유주의+민주주의'인데, 많은 이들이 또 한 번 착각한다.
둘 사이의 결합이 논리적 필연이라는 생각인데, 그 역시 역사를 모르는 소리다. 초기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란 파트너를 끌어들일까 말까를 망설였다.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저 어리석은 대중을 끌어들일 경우 자유주의의 핵심가치가 잘 유지될까를 걱정했던 것이다.
진짜배기 지식인은 없고, 가짜만 득시글
때문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아주 늦게 이뤄졌고, 영국의 경우 20세기 초에야 겨우 문턱을 넘었으니 100년 전후밖에 안 된다. 그때 비로소 21세 이상의 남자 국민들에 선거권이 처음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렇게 시행하다보니 지금 자민주의는 역사의 대세가 된 느낌이지만, 취약점은 여전하다. 이유는 이글의 서두에서 잠시 언급했던 역설 때문이다.
자민주의는 자유-평등-관용-다수결 등을 핵심원리로 하고, 국민주권과 대의제도를 제도화하는데, 그게 더욱 더 잘 구현될수록 그걸 빌미로 내부의 적들이 활개를 친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경제 두 부문이 모두 꼭 그러한 형편에 처해있다.
일테면 지난해 대한항공 사태와 롯데 분규를 보라. 흙수저-금수저론을 증폭시키는 언론도 그렇고, 재벌 2세를 흉악한 인간으로만 묘사하는 3류 TV드라마의 홍수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온통 자본주의 욕설로 넘쳐난다. 이 와중에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소설가 복거일 같은 분은 드물고, 전 총리 정운찬 같은 동반성장론자나 경제민주화꾼들만이 득시글거린다. 마찬가지 이유로 자유민주체제도 휘청댄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은 복합위기 국면인데, 얼마 전 화교간첩 유우성 사건의 뒤처리를 보라.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증언(밀입북 등)도 있지만, 그가 간첩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민변-좌파매체 등이 훨씬 많아진 세상이다. 그들은 궤변에 적반하장도 서슴지 않는다.
국정원-검찰의 증거조작 위반 행위 등 절차상의 하자를 문제 삼아 국정원 개혁과 특검 실시를 주장하는 자해(自害)도 마다 않는다. 그런 무리에게 대한민국 체제수호란 완전히 남의 일이다. 행각해보라. 전 야당 대표 문재인, 서울시장 박원순이 대중적 인기가 많은가, '수상쩍은 민주주의자'인 그들의 실체를 밝히려 하는 고영주 변호사 같은 분이 더 인기가 높은가?
이 모두 민주주의 이름 아래 일어나는 괴이쩍은 현상이다. 자유민주체제가 보장해준 기본권과 자유를 이용해 체제를 흔들려는 세력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그건 민주주의 타락 혹은 민주주의 자살인데, 그 현상이 대한민국만큼 아찔한 곳도 없다는 게 평소의 내 판단이다.
건강한 사회 비판세력을 넘어 어느덧 내부의 적으로 변질된 종북 좌익세력이 득시글대고,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범죄집단 평양의 위협에 노출된 대한민국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위험천만한 미생(未生)국가가 분명하다. /사진=연합뉴스
왜 20세기는 민주주의 죽음의 역사인가
20세기는 '민주주의 죽음의 역사'라는 점을 떠올릴 경우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몰락'은 남의 얘기일 수만은 없다. 지난 한 세기 지구촌은 방어력 없는 자민주의가 얼마나 내부의 적과 외침에 취약한가를 보여줬던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즉 1차 대전 종료 뒤 유럽 대부분이 자민주의를 채택했지만, 2차 대전이 끝날 때 살아남은 건 스웨덴 딱 한 곳이었음을 기억해두라.
2차 대전 뒤와, 1980년대 세계민주화 선풍 때 제3세계 다수와 아시아 중남미에서도 자민주의를 채택했지만, 나중에 붕괴 내지 변질된 나라가 즐비했다. 그럼 구조상 취약성을 안고 있는 자민주의가 지속가능하려면 무얼 해야 할까?
반복하지만, 지난 번 나의 글처럼 독일의 체제수호 노하우, 즉 방어적 민주주의를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 건강한 사회 비판세력을 넘어 어느덧 내부의 적으로 변질된 종북 좌익세력이 득시글대고,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범죄집단 평양의 위협에 노출된 대한민국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위험천만한 미생(未生)국가가 분명하다. 게다가 막 내리는 19대 국회도 민주주주의의 타락과 비효율의 극치를 보여줬다.
입법독재 국회의 법안 가결률만 해도 16대 62.9%, 17대 50.4%, 18대 44.4%로 낮아지더니 이번 19대 국회에서는 31.6%로 추락했다.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박탈당하거나 수사를 받게 돼 자진 사퇴한 의원만도 22명이다.
틈만 나면 각종 수당과 세비를 올리려 하고, 보좌관 월급을 상납 받고, 자식들의 취직을 위해 갑질을 하는 저들 파렴치한들이 그동안 보여준 건 민주주의의 타락이 맞다. 수호하려는 이들이 없어 휘청대는 자유민주체제의 한 켠에 민주주의를 망치려는 좀도둑들마저 수두룩하다는 얘기다.
너와 나를 가릴 것 없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자유민주주의를 공짜로 여기는 몹쓸 무임승차자인지 모른다.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해보지만, 이렇게 덜떨어진 민주주의교(敎)를 섬기다가는 언젠가는 역사의 대박 대신 몰락의 길을 접어들 수도 있다. 4월 총선과 함께 정치의 계절이 한창인 지금 그걸 엄중히 묻는다. /조우석 주필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