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병일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
한때 봄에만 찾아오던 황사가 이제는 미세먼지라는 이름으로 가을, 겨울 가리지 않고 융단공습을 해오듯이 우리 사회 곳곳은 이념과잉과 극단적인 대립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정치는 실종되었다. 진지한 토론과 모색은 구호와 외침에 밀려났고, ‘길거리 정치’라는 말은 ‘최류탄 국회’에 이어 정치용어사전에 이름을 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입법부가 ‘입법과잉’ 시비에 휘말리는 희극이 연출되었다.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며 새로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모든 공약은 반드시 실천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섣달 마지막 날 여야는 고소득층에 세금폭탄을 떨어뜨려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창조경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기 위해 꼭 필요한, 모든 것을 뒤엎는 수준의 규제혁파는 여전히 책상 위에 머물러 있다. 세계경제가 미약한 회복세를 보이지만 그동안 뿌려낸 천문학적 자금의 회수가 예고되고 한국호(號)에는 경계경보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다.
나라 안팎의 상황과 사태전개는 우리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념과잉, 괴담만연 사회 속에 있다. 2013년의 한국 사회는 민영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내려진 해로 기억될 것이다. 민영화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악행’, ‘한번 공공서비스는 영원히 공공서비스’여야 한다는 억지(KT, SK 텔레콤, 포스코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억지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속에 제대로 된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소비자는 외면되고, 노사 합작품인 방만한 경영 속에 천문학적 적자는 폭주하는 기차처럼 광폭질주해도 공공성은 지켜내어야 한다는 그들의 억지는, 그들만의 기득권을 ‘약자’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51:49의 결과를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국민통합을 위해서 승자는 패자를 포용해서 대연정을 해야 한다는, 독일이 그래서 정치안정을 이룩하고 경제성장을 성취했다는 식의 이상한 논법이 여기저기서 들려온 한 해였다.
어찌보면 이런 갈등과 대립은 성장통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성장이 끝나가는 그리고 저성장의 길고 긴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시점에서 이런 갈등이 더 커지고 극단적인 대립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환산하기조차 힘들다는 것이다.
성장이 멈춘 사회에서의 갈등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양상을 띠게 마련이다. 2014년에도 이런 암울한 상황은 계속 될 것이다. 집권 2년차를 맞아 국민 앞에 본격적인 실적을 보여주어야 하는 박근혜 정부로선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불통(不通)의 정부라는 비난, 대선을 치르며 약속했던 공약과 실제 국정 방향과의 차이를 비판하는 목소리 앞에서는 더욱이 그렇다. 국내외 상황이 빚어내는 역풍과 난기류는 한창 추진력을 발휘해야 하는 정부를 표류하게 한다.
새로운 정책의 추진과 거센 저항, 뒤이은 적당한 타협이라는 고정 수순들이 이어지면서 이런 저런 정책들이 갈지자 행보를 하다가 혼란만 초래하고 끝내는 좌초하게 되었던 것이 지난 정부들이 보여준 적잖은 선례들이다.
박근혜 정부가 이런 불행한 전철에서 벗어나는 일은 시계를 미래에 두는 것이다. 당장 5년의 성과에 골몰하여 ‘공약대로 이행’이라는 기조로 일관하기에는 이 정부가 마주한 시대적 소명이 크고도 무겁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목표는 향후 50년, 100년 후의 대한민국을 위한 초석을 놓는데 있어야 한다. 당장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에 대비한 청사진과 실행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중은 지난 2000년 7%로 고령화 사회에 들어선 이래 지속적으로 급증하여 2018년이면 14%로 고령사회, 2026년이면 노인인구 20%의 초고령 사회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저성장에 빠진 사회의 고령화가 얼마나 큰 사회적 재앙인지는 일본을 보면 안다. 그나마 일본은 이미 고령화를 예견하고 오랜 기간 준비를 했음에도 복지지출의 하방경직성의 심각성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준비도 없이 정년연장을 법으로 통과시키고 이제야 임금구조조정을 하려고 하니 일의 선후도 바뀌었고, 결국 노사대립, 강자와 약자, 선과 악의 프레임으로 스스로를 끌고 들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2018년은 박근혜 정부가 다음 정부에게 바턴을 넘기는 시점이다. 현 정부가 방파제를 견고히 쌓아두지 않으면 실버쓰나미는 한국을 덮치게 될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원칙과 신뢰의 문제다. 그동안 우리는 앞만 보고 달리는 시대를 지나왔다. 세계 최빈국에서 벗어나 경제강국(무역규모 세계 8위, 경제규모 15위), 직선제 민주주의와 정권교체 실현이라는 서구 선진국들이 200년에 걸쳐 성취한 것을 60년 만에 이룩해내는 압축성장을 이룩했지만, 정작 국민들은 심정적으로는 그리 행복해 하지 않고 되려 사회에 불신과 갈등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공정한 원칙의 적용이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는 집권 초부터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과거 권력과 부가 있는 곳에 원칙이 빗겨가는 성역이었다면, 어느 틈엔가 우리사회에 ‘사회적 약자’라는 이름이 새로운 성역이 되고 있다. 철도파업에서 볼 수 있듯 노동조합은 스스로를 약자, 법이라는 원칙의 적용을 탄압으로 규정하고 공권력에 맞서고 있다.
그러나 연봉과 직업안정성이 대한민국 최고수준에 달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결국 원칙이 배제되는 기득권 사수다. 공공성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공공부문 개혁에 대한 저항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역대 정부에서 표면적인 갈등의 심화가 주는 정치적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 왔다.
이런 곪은 부분을 고치지 않고는 원칙이 바로 설 수 없고 신뢰 형성은 요원한 일이 된다. 다음을 위해 사회적 자산을 쌓는 것도 박근혜 정부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2014년은 박근혜 정부의 집권 2년차로써 본격적인 정책행보의 출발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불과 십여년 후면 불어닥칠 고령화의 재앙, 저성장의 일상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지 못하면 고사하게 될 대한민국의 운명에 대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최병일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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