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은 6일 개원 19주년을 맞아 서울 마포에 위치한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기념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열린 ‘끝나지 않는 선전선동, 침식당하는 민주주의–누가 괴벨스의 부활을 꿈꾸나’ 개원기념 토론회에 참석한 패널들은 "지난 2008년 온 국민을 혼란에 빠뜨렸던 광우병 사태, 천안함 폭침 및 세월호 사고를 중심으로, 정치적 선전선동을 경계하고 끝내야 한다"고 발언했다.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한국 정치에서 광우병 촛불시위는 ‘괴벨스 식’ 선동에 의한 것으로 천안함 폭침, 세월호 사건 등에서도 나타난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는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또는 광장민주주의라는 명목 하에 국민들을 집단적으로 세뇌시키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도록 하여 정부와 정권에 타격을 입히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이어 김 교수는 “세월호 시위를 통해 나타난 직접민주주의의 집행, 즉 광장에서의 결정으로 정부의 정책을 바꾸거나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것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또는 입헌민주주의) 공화국에서는 위헌이고 위법”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그런데 이러한 위헌과 위법을 많은 정치인들이 ‘새로운 방식의 민주주의’라고 칭송했고, 일부 정치사회학자들은 ‘민주주의 2.0’이라고 찬양했다”며 “이는 ‘탈선한 민주주의’(derailed democracy)였다”고 지적했다. 아래 글은 김인영 교수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광우병 촛불시위는 ‘탈선한 민주주의’이자 중우정치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두 가지 형태를 띤다. 직접민주주의(direct democracy) 방식과 대의제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 방식이 그것이다. 직접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에 연원을 두고 있고 시민이 직접 참여하여 한 자리에 모여 정책결정을 함으로써 인민주원(popular sovereignty, 국민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정치사상가 루소(J.J. Rousseau)와 밀(J.S. Mill)이 적극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는 현실적 제약을 가지고 있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시민이 경제활동과 개인의 사적 생활(private life)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느라 정치와 통치에 신경을 쓸 여유가 부족해졌다. 따라서 직접민주주의는 첫째, 현실적으로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할 공간과 시간의 부족, 둘째, 사적 활동의 증가, 셋째, 행정의 복잡성의 증대 때문에 근대에 와서는 ‘인민에 의한 통치’(rule by the people)가 ‘인민에 의한 정부’(government by the people)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것이 영국과 미국에서 대의제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 방식에 의한 자유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 이유이다.
슘페터(Joseph Schumpeter), 사르토리(G. Sartori), 헬드(David Held)와 같은 사상가가 옹호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시민의 정치참여는 제한적인 역할(limited role)을 수행할 수밖에 없으며, 민주주의는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 경쟁’(political competition)을 벌이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슘페터의 설명이다. 국민의 지지로 뽑힌 대표(또는 대리인)를 통해 정치 참여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지지를 얻도록 정치인들 간에 자유로이 경쟁시키고 주기적으로 대리인을 교체하여 국민의 선택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경쟁과 주기적 선거는 대의제 민주주의 유지에 필수적이다. 선거는 또한 시민 정치참여의 거의 유일한 방식이 된다.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인민이 한 자리에 모여 정부 정책을 직접 지시하거나 바꾸는 등 인민주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없다. 선출된 대표자에 대한 다음 선거 이전의 견제장치로 주민소환제도가 존재하지만 ‘공화제’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에서는 일정한 조건으로 지방자치단체장 정도에만 적용되지 대통령과 국회의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 정치에서 광우병 촛불시위는 ‘괴벨스 식’ 선동에 의한 것으로 천안함 폭침, 세월호 사건 등에서도 나타나며,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또는 광장민주주의라는 명목 하에 국민들을 집단적으로 세뇌시키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도록 하여 정부와 정권에 타격을 입히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세월호 시위를 통해 나타난 직접민주주의의 집행, 즉 광장에서의 결정으로 정부의 정책을 바꾸거나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것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또는 입헌민주주의) 공화국에서는 위헌이고 위법이다. 이러한 위헌과 위법을 많은 정치인들이 ‘새로운 방식의 민주주의’라고 칭송하였고, 일부 정치·사회학자들은 ‘민주주의 2.0’이라고 찬양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탈선한 민주주의’(derailed democracy)였다.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대중의 정제되지 않은 요구를 모두 따르라는 8년 전 광우병 촛불시위는 소위 ‘6월 항쟁’이라는 시위가 만들어 낸 ‘87 민주화 체제’가 가진 병리현상의 일부이다./자료사진=자유경제원
고(故)김대중 대통령은1) 2008년 6월 12일 “촛불집회는 2천년 전 그리스 이후 첫 직접 민주주의”이며 “촛불집회가 성공하면 세계 민주주의에 큰 감동을 줄 것”이라고 칭찬했다. 무법의 광우병 촛불집회를 아테네의 민회(民會, 에클레시아)로 환치시켰는데 잘못된 해석이다. 아테네 시민들이 모여 직접 토론하고 심의하여 행정, 사법, 군사에 관한 제반 사항을 결정하였던 민회는 아테네 최고 의사결정 기관이며 동시에 입법기구였다.
결국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를 기획된 촛불시위 정도로 격하시킨 것이며, 대의민주주의 하에서는 시민들이 결정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민주적 결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헌법적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직 대통령이 외면한 발언이라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평생을 민주화 투사이며 의회민주주의자임을 자처한 전직 대통령이 무법 시위대의 구호와 주장을 직접민주주의에 근거한 시민들의 토의와 결정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것이다. 광우병 촛불시위는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군중(mob, mass)이 분노와 증오로 직접 지배를 도모했던 (직접)민주주의의 탈선의 모습을 외면했던 것이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2008년 6월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초선의원 워크숍 특강에서 "촛불집회가 세계 정치 문화에 일점 획을 긋는 계기도 됐을 것"이라며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형성이자 직접민주주의의 구체적인 표상"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괴벨스 식’으로 기획된 반미·반이명박 촛불시위를 광장민주주의로 이해한 국회의원이 국회의장이 된 것은 아이러니이고, 천민적(賤民的) 한국정치의 모습을 보여준 현상이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은 고등학생·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국가란 무엇인가』(2011)라는 자신의 책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양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작은 거리집회는 ‘촛불소녀’라 불렸던 청소년들, 유모차 부대, 20대 여성들이 합류하면서 점점 더 커졌다.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던 촛불시민들은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를 경청하고 국정운영에 반영해주기를 원했다.”라고 광우병 촛불시위가 ‘국민의 목소리’였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촛불소녀’라고 이름 붙여진 그들은 실제로는 유언비어에 의해 만들어진 광우병 공포에 떨었던 순진한 소녀들이었고, ‘굴욕협상’이라는 감성 자극적 용어로 조작한 한미쇠고기 협상에 대한 울분을 주체하지 못했던 청소년들이었으며, ‘유모차 부대’는 우왕좌왕 하는 군중의 움직임 때문에 자칫하면 자신의 아기가 깔릴 수 있음에도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위 현장의 맨 앞에 자신의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워 데모대의 맨 앞에 두고 방패막이로 쓴 ‘엽기’ 엄마들이었다.
이러한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어떻게 모성(母性)을 가진 아기 엄마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기에게 위험이 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아기 엄마의 자연스럽고 이성적 행동이거늘 유모차를 방패로 시위대의 맨 앞에서 행진한 것은 기획된 ‘죽음의 희생자’를 찾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나아가 유시민은 “국민의 요구를 경청하고 국정운영에 반영해주시를 원했다”고 했지만 촛불시위대들은 왜 대통령이 시위대의 요구를 국정에 반영해줄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시작부터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과 ‘MB out’을 함께 외치며 요구했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유 전장관이 언급한 국민의 목소리란 실은 시위 기획자가 미리 만들어둔 반미(反美) 구호이고, 이명박 정권을 몰아내려는 선동적 외침이었음은 외면하고 있다.
한미 쇠고기 재협상과 ‘이명박 정권 퇴진’을 동시에 주장한 이유는 촛불시위를 통해 이미 선거로 뽑힌 이명박 대통령과 정권을 흠집 내고, 노무현 대통령이 받았던 탄핵을 동일하게 이명박 대통령에게 적용하여 정권 퇴진을 노렸던 것이다. 결국 광우병 촛불시위가 ‘국민의 목소리’라고 마치 직접민주주의에 근거한 행동이었던 것처럼 강변하는 주장은 촛불에 반대하거나 동의하지 않은 침묵의 다수 국민의 의견은 외면한 외눈박이의 강변에 불과했다.
더 큰 문제는 학계의 곡학아세(曲學阿世)였다. 많은 정치·사회학자들은 2008년 광우병 시위에 주부들과 여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이유로 우리 국민들이 ‘먹거리 주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먹거리 주권’에 관하여 본다면 국내로 유입되는 김치(1억2090만 달러)와 마늘(9550달러)의 경우 전량이 중국산이며, 이외 수입 농산물 가운데 중국산의 비중을 보면 팥 99.5%, 당근 98.3%, 양파 94.4%, 고추 93.2%, 쌀 52.8%로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2) 중국산 농산물의 농약 문제에 대하여는 지극히 관대하고, 미국산 쇠고기(나 최근에는 일본산 수산물)에 대하여는 과학적 증거는 외면하고 ‘(먹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식의 과장을 했는지 의문이다. 광우병 촛불시위를 찬양하거나 ‘먹거리 주권’으로 촛불시위를 설며하는 이들이 친북, 친중, 반미, 반일 성향 때문에 왜곡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는 시민주권, 시민권의 표현이 아닌 왜곡·과장된 정보에 많은 사람이 속고 분노하여 움직인 중우정치(衆愚政治, oc-hlocracy, or mob rule) 내지는 '탈선한 직접민주주의'의 모습이었다./자료사진=자유경제원
그마나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던 최장집 교수는 이명박 정권 퇴진 요구와 관련하여 “‘촛불’을 초래한 정권도 잘못이지만, 민주주의는 대의제이기 때문에 ‘정권 퇴진’ 구호는 잘못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충분하지 않은 것이 촛불시위가 – 역사상 모든 혁명적 시위처럼 -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부 전문 시위기획자들에 의하여 자연적인 것으로 세밀하고 철저히 사전 기획된 폭력봉기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광우병 촛불시위는 시위 시작 1개월 만인 2008년 6월 7일 밤이 되면 일부 시위대가 쇠파이프를 들었고, 쇠파이프와 망치, 그리고 경찰에게서 빼앗은 소화기 등으로 버스를 부수고 경찰을 향하여 폭죽을 쏘거나 스프레이에 불을 붙여 불길을 뿜어 위협하는 식으로 폭력화되기 시작했다.
다음은 시간적 흐름으로 본 광우병 촛불시위의 전개 과정이다.3)
2008.4.18 한미 쇠고기 협상 타결발표
2008.4.19 한미정상회담
2008.4.26 이명박탄핵 범국민운동본부, 서울청계광장에서 첫 집회. 이명박 탄핵 및 정책반대, 쇠고기 수입반대 등의 구호 등장
2008.4.29 MBC PD 수첩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방송
2008.4.30 광우병 괴담 본격 확산 “젤리 피자 화장품 생리대도 광우병 위험” 등. 포털과 인터넷 카페 및 커뮤니티에서 광우병논란 확산
2008.5.2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첫 촛불집회
2008.5.6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발족
2008.5.15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전국적 조직화 및 시위확대 모색
2008.5.22 이명박 대통령 “쇠고기 문제 송구” 사과 대국민담화
2008.5.24-25 촛불집회 심야 가두시위로 이어짐. “청와대로 가자” 구호 등장
2008.5.25 아프리카TV, 오마이뉴스TV, 진보신당 칼라TV 등 시위현장 생중계
2008.5.29-30 촛불집회가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되고, 유모차 부대 등장
2008.6.2 이명박 정부, 미국에 “30개월 이상 소 수출금지” 요청
2008.6.6 청와대 수석비서관 전원 일괄사의
2008.6.10 국무위원 전원 일괄사의에도 불구하고 “정권퇴진” 구호 등장
즉, 2008년 4월 19일 한미정상회담 이후 10일 후 MBC PD 수첩 방영, 그리고 바로 광우병 괴담 본격 확산, MBC PD 수첩 방영 3일 만인 2008년 5월 2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첫 촛불집회, 그리고 1달이 못되어 촛불집회가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되고, 유모차 부대가 등장하고 이어 10일 만인 6월 10일 “이명박 정권퇴진” 구호의 등장은 마치 한 편의 잘 기획된 선동에 의한 시위로 보이게 한다. 결국 광우병 촛불 시위는 “시민주권, 시민권의 표현”4)이 아닌 왜곡·과장된 정보에 많은 사람이 속고 분노하여 움직인 중우정치(衆愚政治, oc-hlocracy, or mob rule) 내지는 ‘탈선한 직접민주주의’의 모습이었다.
민주주의(민주제)는 그저 다양한 정치체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존재가 전제된 제도로 깨어 있는 시민이 없는 민주주의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타락한 중우정치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아테네의 몰락을 가져온 중우정치란 플라톤에게 “다수의 난폭한 폭민들이 이끄는 정치”라는 뜻의 폭민(暴民) 정치였으며, 아이스토텔레스에게는 “다수의 빈민들이 이끄는 빈민 정치”였다.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대중의 정제되지 않은 요구를 모두 따르라는 8년 전 광우병 촛불시위는 소위 ‘6월 항쟁’이라는 시위가 만들어 낸 ‘87 민주화 체제’가 가진 병리현상의 일부이다. 병리현상에는 광장에서의 불법·폭력 시위, 반미, 반체제가 포함된다. 광우병 촛불시위의 근원이 되는 87체제의 극복 없이 광우병 촛불시위라는 ‘탈선한 직접민주주의’의 극복도, 심지어 한국경제 저성장으로부터의 탈출도 없다.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1) 이하는 김인영, “광우병 촛불시위 - 기획된 반미(反美), 이명박 정부 흔들기 군중집회,” 자유경제원 개원 18주년 기념 특별토론회(2015년 4월 9일), “광우병 사태, 그 후 7년: ‘천민민주주의’에 흔들리는 대한민국의 오늘,” 토론문에 근거함.
2) “한·중 수교 20년...‘한국인 밥상도 바꿨다’".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 281108 참고.
3) 金仁寧. “韓國における 2008年 「ろうそくデモ」;始まり、展開、その意味するもの.” AJEC Report, Vol. 47, 2009, pp.39-47의 일부를 요약, 수정함.
4) 광우병 촛불시위에 대한 김기식의 정의(定義). 이창곤,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 서울: 밈, 2010, p.180.
[김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