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사회과학의 시대란 1970년대 민중문화운동 이후 열렸다는 선후관계를 잊으면 안 된다. 사회과학의 시대를 잉태한 자궁(子宮)이 민중문화운동인데, 문학을 중심으로 미술-연극-영화 등 한 모든 문화에술 장르를 포괄하는 거대한 반체제, 반정부 움직임이다. 이들을 추동하는 힘이 저항과 분노인데, 그걸 토대로 ‘박정희 반대로’를 외쳤다. 그것이 정치민주화이고, 사회정의이자 민족경제의 길이라고 그들은 확신했다.
포인트는 이런 저항과 분노의 첫 스파크를 만든 원조가 1968년에 죽은 시인 김수영이며, 이후 ‘전투적 서정성’의 김남주와 ‘묏비나리’의 백기완 등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함께 적시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이들이 공유하고 있던 헬조선 심리와 반(反)대한민국 정서의 위험성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일부 순기능도 했겠지만, 한국사회를 황폐화시키는 결과도 초래했다.
김수영이 닦아놓은 분노와 저항의 길에 1970년대의 김지하를 포함한 다수의 작가들이 합류했고 그게 2000년대 초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비판작업이 없이 전개되어 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시문학사의 나쁜 피이자 고약한 전통이 분명하다. 상식이지만 민중문화운동의 출발은 소박했다. 산업화의 그늘과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주자는 것이었다.
문학의 경우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이하 『아홉 켤레』), 조세희의 『난장이 쏘아올린 작은 공』과 황석영의 『객지』 『삼포 가는 길』 등 도시빈민과 주변부 노동자를 그린 일련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런 작품들이 시인 김수영의 사후 얼마 안 된 1970년대에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던 게 문학사의 우연이 아니다.
『아홉 켤레』는 윤흥길이 1977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실은 연작소설 중 첫 편이다. 도시 빈민의 소요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1980년대 대학가 필독서로 뜨는데, 지금은 고교과정에서 버젓하게 배운다. 학교에서 그 작품은 “한국사회의 폭력적 구조를 깨닫게 해주는 작품”으로 설명된다. 문학 장르 전체를 감싼 그런 집단정서는 1980년대 이후 더욱 커지고 높아졌다. 그들은 심지어 암묵적인 정치투쟁을 배제하지 않았다.
사회과학의 시대를 잉태한 자궁(子宮)이 민중문화운동인데, 문학을 중심으로 미술-연극-영화 등 한 모든 문화에술 장르를 포괄하는 거대한 반체제, 반정부 움직임이다. 이들을 추동하는 힘이 저항과 분노인데, 그걸 토대로 '박정희 반대로'를 외쳤다./자료사진=연합뉴스
현기영의 『순이 삼촌』 『지상에 숟가락 하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경우 4.3사건, 여순반란사건 등에 대한 비판적 해석의 표준을 제시했고, 지금은 고전으로까지 추앙받는다. 당시 「실천문학」의 경우 표지에 ‘민중시대의 문학적 실천을 위한 부정기간행물’이라는 슬로건을 달았다. 무시무시했다. 가장 전투적인 시인, 평단으로부터 “전투적 서정미학의 간판”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시인 겸 혁명가 김남주(1946~1994)의 작품을 보자.
예술이라면 제 애비도 몰라보는 후레자식이 예술지상주의였다
염병할! 그놈의 사후의 명성이란 것도
부르조아 새끼들의 위선이 거만이 구역질나서 보들레르는
자본의 시궁창 파리 한복판에 악의 꽃을 키웠다
대한민국의 순수파들 절망도 없이
광기도 자학도 없이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자르르 교양미 넘치는 입술로
자본가의 접시에 군침을 흘리면서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에끼 숭악한 사기꾼들
죽으면 개도 안 물어가겠다
그렇게 순수해가지고서야 어디 씹을 맛이 나겠느냐
- 「예술지상주의」 일부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 시 「낫」 일부
물어보자. 이게 정상적인 시 작품인가? 고개를 절래절래할 수밖에 없지만, 당시엔 그게 너끈히 통했다. 예술 지상지상주의를 때리는 화끈한 시에서 보듯 김남주는 체질적으로 앙가주망(현실참여)의 선두주자였던 김수영과 같은 DNA라는 게 중요하다. 시어에서 시도 때도 없이 피, 칼, 학살, 죽창, 도살장 등의 섬뜩한 수준을 드러냈던 김남주의 공격성은 물론 분노와 저항의 원조 김수영의 수준을 뺨친다. 무서운 일이었다.
사실 김남주는 해방후 최대 공안사건의 하나인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준말로 ‘베트콩’조직을 본 딴 공산혁명운동 조직임)의 핵심멤버로 활동했으며, 동시에 광주5.18의 총 설계자의 한 명으로 꼽힌다. 노동자 시민이 통치하는 광주꼬뮌(해방구)의 꿈을 실현하려 했던 자칭 타칭 ‘해방전사’이기도하다. 동시에 김남주는 당시 이른바 시민군의 총책이자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바쳐진 주인공인 윤상원의 지하운동권 ‘윗선’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곡으로 하겠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백기완 원시 '묏비나리'를 읽어보길 권한다. 그건 김수영의 분노와 저항이라는 스파크가 일으킨 무서운 작품이다./자료사진=연합뉴스
지금도 광주 5.18의 상징적 인물로 떠받들어지는 게 윤상원이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머리끝까지 가득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했으며, 당시 광주 금남로에서“남로당의 후예를 자부한 채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염두에 둔 채 ‘민주’를 외쳤다.(김대령 지음 ‘임을 위한 행진곡’6쪽) 참고로 시인이자 혁명가 김남주의 윗선이 빨치산 출신인 류낙진(탤런트 문근영의 외할버지)과 민족경제론의 박현채 등 광주 4인방이라는 것도 기억해둬야 한다.
그렇게 시인 김수영과 광주의 시인 김남주 사이의 거리는 먼 듯 가깝다. 분노와 저항이 보다 구조화되고, 계급투쟁 내지 민중봉기 그리고 국가전복 움직임으로 내달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어름에 등장한 게 백기완이란 도깨비다. 문학 장르의 사람이 아니면서도 문학적 언어를 구사했고, 그래서 널리 유포됐던 위인이 백기완이다.
요즘 한참 뜨거운 이슈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시(原詩) 작가가 백기완의 ‘묏비나리’라는 것도 더 이상 비밀이 아니며, 그 시도 극렬한 저항과 분노의 코드로 장식됐다는 것도 이제는 세상이 다 안다. 일테면 그 시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과 직접 연결되는 대목을 읽어 보자. 가진 자들과 미국인들, 그리고 그 들의 땅으로 간주되는 듯한 우리 대한민국을 향한 입에 담기조차 겁나는 험악한 저주로 가득 차 있다.
이 썩어 문드러진 하늘과 땅
뎅그렁 원한만 남은 해골
그대 등짝에 쏟아지는 주인 놈의 모진 매질
천추에 맺힌 원한
군바리를 꺾고, 양키(코배기)를 박살내고
제국주의의 불야성
피에 젖은 대지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
손톱을 빼고 여성 생식기(그곳)까지 무를 쑤셔 넣고
사람을 산 채로 키워서 신경과 경락까지 뜯어먹는 가진 자들
노동자의 팔뚝에 안기라
온몸을 해방의 강물에 던져라
가진 자들의 거짓된 껍질을 벗겨라
- ‘묏비나리’ 일부
어떠신지? 김수영-김남주-백기완이 공유하는 그 무시무시한 분노와 저항이라는 것의 실체가 가늠되시는지? 이 ‘어둠의 연결고리’를 한국문단은 외면해왔다. 그래서 문제인데, 광주의 희생자들이 모두 대한민국을 저주하고 전복하려다 죽었으니 산 자는 그 길을 따르라고 촉구하는 것이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곡 지정의 의도인가를 굳이 묻는 것은 이 자리에선 생략한다.
다만 그 노래를 제창곡으로 하겠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백치 내지 얼간이들은 백기완 원시 ‘묏비나리’를 읽어보라는 것, 그건 김수영이 분노와 저항이 일으킨 스파크가 일으킨 무서운 작품이라는 걸 감지하길 새삼 권유하는 바이다.(잊으면 안 되는 점은 백기완의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의 삶도 김남주가 개입했던 남민전과 얽혀있다는 점이다. 남민전 전사 대부분은 백기완과 황석영 등의 동지 그룹이었다. 10.26 박정희 사후 국가전복을 위한 총궐기 음모인 ‘명동YWCA위장결혼식 사건’을 통해 백기완은 남민전 그룹과 다시 연결된다.)
시인 김수영의 유명한 말대로 문화는 본디 불온한 것이라서 비판적 상상력을 기본으로 한다. 문제는 그게 도를 넘어 괴물이자 공룡으로 진화했다는 것이 문제다./자료사진=SBS카드뉴스 '스브스뉴스'
물론 김수영-김남주-백기완 사이의 상관관계는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1970~80년대와 당시 문화계를 사로잡았던 민중문화운동의 분위기를 대강이라도 가늠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그들 사이의 분노와 저항의 코드를 알아채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다. 이제는 밝힐 것은 밝힐 때가 되지도 않았던가?
김수영이 죽은 건 1968년이며, 백기완이 그 시를 쓴 것은 1980년도였으니 두 시인 불과 12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김남주가 등단한 것은 1974년 ‘창작과비평’이었다. 이런 선후관계와 별도로 이들 모두가 공유했던 것은 섣부른 정의감, 방향을 잃은 분노와 저항이었고, 그게 한국문단과 사회 전체에 불행으로 작용했음을 인정할 때가 지금이다.
시인 김수영의 유명한 말대로 문화는 본디 불온한 것이라서 비판적 상상력을 기본으로 한다. 문제는 그게 도를 넘어 괴물이자 공룡으로 진화했다는 것이 문제다. 이렇게 병든 문학과 문화계 모두의 심장부에 ‘거짓 신화’로서의 시인 김수영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두려운 빅 브라더가 맞다. /조우석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