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문상진 기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엿새간의 방한일정을 마치고 출국했지만 대한민국 정치판은 그가 남긴 행보와 말의 진위를 놓고 시끌벅적하다. 새누리당은 총선 실패로 상처 입은 잠룡들이 물밑에서 조심스런 행보를 보였으나 반기문 대망론이 불거지자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지금처럼 숨죽이고 있다가는 자칫 존재감조차 묻혀버릴 것 같다는 위기감이 작용했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당은 일제히 비판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는 차기 대선 '킹메이커' 역할 번복 논란에 휩싸이는 등 활동 재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김 전 대표는 7~8월 전당대회에서 총선 패배에 대한 공방이 일단락되면 본격 활동 재개를 위해 전·현직 의원과 참모들과 수시로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지역구 활동과 함께 여러 인사들을 만나 향후 행보와 자신의 당내 역할에 대해 숙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 총장의 대망론과 함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는 관측이다.
방한 일정을 마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27일 오후 출국을 위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 대기중인 취재진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원희룡 제주지사도 31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물론 본인께서는 확대해석하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일정 잡고 메시지 던지고 하는 거 보니까 이거는 뭐 국내 그냥 정치인들 뺨치는 그런 생각도 들더라"면서도 "좋은 지도자 후보, 그리고 강력한 대선 후보가 나온다라는 것은 국민들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많아지는 것"이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더민주 문재인 대표와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반기문 총장에 대한 말을 아끼고 있다. 문재인 전 대표는 반 총장에 대해 정치적 발언을 안 하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안철수 대표 역시 "남은 임기동안 대한민국 국민과 세계인에게 좋은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원론적 얘기만 했다.
반기문 대망론에 문재인 전 대표나 안철수 대표는 섣부른 대응을 했다간 자칫 여론의 화살을 맞을 수도 있다는 우려감에 일단 신중모드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반 총장이 새누리당 경선에 뛰어 들 경우 새누리당의 중도· 보수층을 노린 안철수 대표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
이란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문재인 전 대표나 안철수 대표보다 수위 높은 경계의 시선을 비쳤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반 총장의 대선 출마와 관련해 "유엔 결의문의 정신이 지켜지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박원순 시장의 지적에 대해 국제관례상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과 권고적 성격일 뿐 구속력은 없다는 등 해석이 분분하다. 박원순 시장측은 애매모호한 발언이라면서도 "마음이 콩밭에 가 계신가 아니가 싶다"며 경계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반면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개인적 발언 차원을 넘어 당 입장인 대변인 공식논평까지 내며 연일 '반기문 때리기'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30일 더민주는 원내대변인 논평을 통해 "반 총장이 새로운 시대와 시간을 맞이하는 다음 대선에 부합하는 분인지 좀 더 검증이 필요하다고 했다"며 불편한 속내를 내비쳤다.
20대 국회 국회의장 도전을 시사한 더민주 정세균 의원은 이날 "과거 내각에서 일할 당시 이분(반기문 총장)이 대한민국을 책임질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우회적으로 비난했다. 정 의원은 노무현 정부 때 산업자원부 장관을, 반기문 총장은 외교부 장관을 맡아 함께 일한 인연이 있다.
31일에는 '문재인 호위무사'로 불리는 김홍걸 더민주 전 국민통합위원장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저는 그 분이(대선에) 나올 가능성이, 최종적으로 완주할 가능성이 아주 적다"며 '반기문 대망론'을 평가절하했다.
김홍걸 전 위원장은 이날 YTN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에 출연, '반기문 대망론'과 손 학규 전 고문의 ‘새판짜기’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김 전 위원장은 반 총장의 방한 일정에 대해서도 "본인이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해도 유엔 사무총장의 처신으로 적절치 못했다"고 비판했다.
앞서 지난 29일에는 이종걸 의원이 더민주 원내대표 임기를 마치면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반기문 총장에 대해 "대통령이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된다면 국민이 시궁창에 버리는 이름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말에 가까운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29일 오후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 관광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민의당도 30일 대변인 논평을 통해 "반 총장이 행여 권력을 탐하거나 (유엔)사무총장으로서의 본연의 의미를 방기한다면 국민도 국제사회도 지탄할 것"이라며 "직분에 충실하라"고 경고성 목소리를 냈다.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은 같은 날 TBS 라디오에 출연해 "반 총장은 청와대와 여권이 만들어 준 꽃가마에 탄 기분이겠지만 너무 나간 것 같다"며 "여기저기서 정치인 만나고 아리송하게 얘기하는 것을 국제사회나 국민이 올바른 평가를 할지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반기문 총장이 한 기자회견 '국내 활동, 과대해석 추측 삼가달라' 누가 과대하게 하고 누구에게 삼가달라는거죠. 본인이 안했으면 누가 과대해석 추측할까"라며 이같이 말했다.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도 31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대선출마 시사 발언과 관련해 "국가를 경영하는 비전과 철학이 어떤 건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고 검증된 적도 없다"며 "현재로서는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명망 말고는 가진 게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노 원내대표는 이날 '한수진의 SBS전망대'에 출연해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과연 두 번의 임기 중에 무엇을 했느냐에 대한 국제사회의 따가운 평가도 많다"며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 강력한 의사를 사실상 표명한 셈인데,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처신에 문제가 제기될 여지가 많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방한이 그의 행보와 말의 진위를 떠나 대권 레이스에 불을 붙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갓 문을 연 20대 국회가 산적한 민생사안과 화급한 기업 구조조정을 외면하고 자칫 대권경쟁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혹독한 민심의 심판인 여소야대 3당 구도체제에서 국회는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독주할 수도 없지만 더 이상 발목잡기로 19대 국회의 악습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대권 후보자들도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천하를 얻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디어펜=문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