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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귀단장 고전특강(119)-네로 황제 시대의 방탕한 로마인의 삶

2016-06-02 11:47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19) 허영과 탐욕에 찌든 하류인생을 통한 세상 풍자 
페트로니우스(20~66년) 『사티리콘(Satyricon)』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지출을 꼼꼼히 계산하는 놈은 천한 수전노이다. 이에 반해 헛되이 돈을 쓰며 탕진하는 자는 아주 세련된 청결한 사람이다."

수에토니우스의 <12인의 황제전>에 나오는 네로의 말이다. 네로(37~68) 황제는 자신의 호언처럼 낭비와 사치를 즐겼다. 네로는 갖가지 음탕한 행위로 자신의 육욕을 채웠고 호화로운 연회를 자주 열어 국고를 탕진했다. 그는 부족해진 재정을 채우기 위해 시민의 재산을 간교한 계책으로 강탈하기도 하고, 심지어 신전의 봉헌 귀중품을 빼앗아 녹여 취하기도 했다. ​

네로의 궁전은 호화롭기 그지없어 '황금 궁전'으로 불렸다. 궁전의 앞뜰은 1마일이나 되는 회랑이 3줄로 늘어서 있을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 저택 안은 금박으로 장식되고 곳곳에 보석과 진주가 박혀 있었다니 호사함이 극치를 이루었던 듯하다.

네로의 광기 어린 행동은 로마 제국의 막대한 재력에 대한 과신과 최고 권력자로서의 오만에서 나온 것이었다. 황제가 이러하니 측근과 귀족들은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고 사회 풍속은 날로 타락해갔다. 윗물이 탁한 데 아랫물이 맑을 수는 없을 터. 일반 시민의 생활 역시 건강했을 리가 없다. ​

네로 황제 재위 시기의 로마 사회 풍속이 어떠했는지 그 전경(全景)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사티리콘(Satyricon)>이다. 이 작품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소설로 일컬어진다. 저자 페트로니우스(Titus Petronius Niger, 20~66)는 네로 황제의 지근거리에 있었던 귀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집정관을 역임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는 정치인이자 문학가였다. 그는 문학회를 만들어 황제와 귀족들과 교유하기도 했고 세련된 문학적 소양과 세속적 취향을 널리 인정받아 네로 황제와 귀족들로부터 ‘우아한 심판관(arbiter elegantiae)’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점잖은 사람들 사이에서 저속한 외설로 매도되는 바람에 널리 권장되지는 못했다. 19세기까지도 사람들 사이에서 이 소설을 읽기는 하지만 드러내놓고 남에게 독서를 권하기는 민망한 책으로 치부되었다. 물론 2000년 전에 쓰인 소설이니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로마인들의 생활상이나 성 풍속도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아한 심판관'으로 불린 페트로니우스가 왜 당시 음서(淫書)로까지 비판 받는 대중 소설을 썼던 것일까?

그가 네로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로마의 지도층으로서 네로의 내밀한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그로서는 어설픈 시작(詩作)을 하면서 시인입네 과시하는 네로의 천박한 행태와 호화 방탕한 생활에 역겨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페트로니우스는 네로가 앞장서서 조장해낸 로마의 타락한 사회상을 조롱하고 풍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닐까싶다. ​

이 책의 등장인물은 떠돌이 검투사인 엔콜피우스와 그의 친구 아스킬토스, 그리고 엔콜피우스의 동성애인인 어린 소년 기톤이다. 이들의 출신배경은 모두 로마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이다. 이들이 로마 제국의 곳곳을 누비며 펼치는 모험담은 오뒷세우스의 모험과는 차원이 다르다. 숭고한 도전과 극복의 스토리가 아니다. 사기와 협잡, 도둑질, 추잡한 동성애와 창녀들과의 엽기적 사랑, 그리고 졸부들의 방탕한 연회의 모습들이 다양하게 전개된다. 전형적인 악한(惡漢)소설인 셈이다. ​

주인공 엔콜피우스는 어린 기톤을 사이에 두고 친구 아스킬토스와 삼각관계가 되어 전전긍긍하는 범인(凡人)이다. 여사제 콰르틸라는 엔콜피우스 일행을 유혹하여 해괴한 연회를 베풀고 관음의 성욕을 추구한다. ​

졸부가 된 해방노예 트리말키오는 주체할 수 없는 재력을 과시하며 연일 주변인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고 진기한 요리의 산해진미를 즐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아름다운 인생은 무엇인가, 영혼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성찰적 대화를 나누던 그리스식 향연과는 거리가 멀다. 트리말키오가 읊조리는 시구는 그의 향락적 인생관을 잘 보여준다.

"오호 애재(哀哉)라, 인간은 한 점에 불과할 뿐.
저승사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로구나.
그러니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 보세나."
 

당대 로마 부유층 연회의 단면을 보는 듯싶다. 어쩌면 페트로니우스가 네로의 황금 연회를 비꼬기 위한 복선인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진흙탕 같은 연회 속에 보석 같은 풍자와 비평을 삽입한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애초에 품위와는 거리가 먼 트리말키오의 말로 보기에는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인도산 진주에 그토록 연연해하는 이유가 무엇이뇨?
바다에서 건져 올린 노획물로 치장한 그대의 방탕한 아내가
정부의 침대 위에서 다리를 활짝 벌리는 꼴을 보고 싶어서인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보석, 초록빛 에메랄드가 무슨 소용이고
불처럼 빨갛게 빛나는 카르타고산 루비는 또 무슨 소용이뇨?
그 광휘 안에서 미덕이 빛을 발하지 못한다면
신부는 구름으로 옷을 지어 입거나 지푸라기를 걸쳐
사람들 앞에 맨몸뚱이를 드러내는 것이 옳지 아니한가?"​

엔콜피우스가 고귀한 예술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는 이유를 대해 시인 에우몰푸스에게 묻자, 자칭 시인이지만 사기와 협잡에 능한 남색가인 그는 이렇게 응답한다.

"돈 욕심이 이러한 변화를 초래했지. 꾸미지 않은 미덕이 살아 숨 쉬던 옛날에는 자유로운 예술이 융성하면서 후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밝혀내려고 다들 치열하게 경쟁했네.…… 하지만 우린 어떤가? 주색에 빠져 지내며 전통에 빛나는 예술 작품조차 공부하려 들지 않네. 대신 과거를 비난하면서 오로지 악습만 배우는 것이 작금의 현실 아닌가? 변증법은 또 어찌 됐나? 천문학은? 지혜에 이르는 탄탄대로는? 달변이 되게 해달라거나 철학의 근원에 다가가게 해달라고 신전을 찾아 기도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에우몰푸스에겐 어울리지 않는 반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에우몰푸스의 목소리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고상한 문화예술을 도외시하고 천박한 풍습에 젖어가는 네로 시대 로마 시민을 풍자하는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이 아닐까.​

페트로니우스는 철학과 예술, 그리고 다양한 학술이 융성하던 고대 그리스 황금기를 그리워하면서 로마의 타락한 사회 풍조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네로 시대의 억눌린 언로 속에서 새로운 운문의 장르를 통해 가슴에 맺힌 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타락하고 천박한 이들의 대담 속에 살짝 살짝 끼워 넣고 있다. 그가 교양 있는 지식인들의 정색하는 담화의 형식을 빌리지 않은 것은 오히려 탁월한 선택처럼 느껴진다. ​

에우몰푸스가 읊조리는 시의 주제는 로마의 건국 영웅들의 이야기나 구국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트로이의 목마를 성에 들이지 말라는 라오콘을 고언(苦言)이 무시되면서 트로이가 파괴되고 함락되는 처참한 상황을 길게 노래하지만 대중들의 돌팔매질을 받으며 낭송을 방해받는다. 이 대목은 진지한 문학이 경시되던 로마의 문화상을 비유한 것일 수 있다. "시를 암송하려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욕하다 맞아죽을 뻔"한 상황이 벌어지는 현실이 당시 로마의 풍경이었던 듯싶다. ​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갖가지 기묘한 야화들은 독자들의 흥미를 당긴다. 희귀한 음식과 고급의 술을 즐기고, 노예들의 공연을 보거나, 목욕탕과 연회장을 오가는 연회 풍경은 로마 시대의 사치스런 주연의 정경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음담과 기행(奇行)이 넘치는 내용 가운데 톡톡 쏘는 풍자와 비판을 여기저기서 퉁기는 것이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다. ​

아쉬운 점은 이 번역에 사용된 <사티리콘>의 현존 원본은 20권 가량으로 추정되는 원본 가운데 3권
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것도 중간 중간 소실된 부분이 많아 문맥의 흐름이 자주 끊기는 점이 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부와 허풍선이들, 방탕한 하류 인생들의 통속적 삶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는 이 작품은 네로 황제가 재위하던 당대의 풍속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

<사티리콘>은 그리스 사티로스극의 영향을 받은 것임에 틀림없다. 음탕한 주제와 톡 쏘는 비판, 한 바탕 웃음을 끌어내는 풍자와 해학을 풀어내기에 '사티로스'라는 가면이야말로 적절한 선택이 아닌가 싶다. 허영과 탐욕에 찌든 인간 군상들은 기실 사티로스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저자는 이런 구조를 설정하고 당대 로마인들의 부조리한 삶을 마음껏 풍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페트로니우스는 최초의 풍자소설의 창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소설과는 무관한 것 같지만, 그는 친구의 고발로 네로에게 모반자로 의심을 받자, 스스로 혈관을 끊고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다 죽었다. 그는 '우아한 심판관'답게 '우아한(?)' 죽음을 택했다. 그의 안타까운 인생의 결말은 그가 풍자한 방탕한 로마 사회가 결국 네로의 포악한 통치의 부산물이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하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사티리콘』, 페트로니우스 지음, 강미경 옮김, 공존(2008), 516쪽.​



[박경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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