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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다큐 '민주주의'…자본주의 시장경제 비판 선동

2016-06-10 10:30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EBS의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방송이 기존의 민주주의 개념을 왜곡, 학문적 공정성을 잃은 ‘선동’이라는 지적이 전문가들에게서 나왔다. 자유경제원은 9일 자유경제원 리버티 홀에서 ‘EBS 민주주의 방송, 이대로 괜찮은가’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최근 5부작으로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민주주의』(이하 EBS)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5명의 전문 패널이 EBS 교육방송의 ‘민주주의 왜곡’ 실태를 분석했다. 5부 『민주주의의 미래』에서 발표를 맡은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은 “EBS는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우려,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권 소장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미래를 낙관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 차 있다”고 밝혔다. 권 소장은 “EBS는 민주주의로 포장된 자본주의 시장경제 비판에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권 소장은 이와 관련 “차라리 ‘민주주의의 미래’ 대신에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미래’라고 제목을 정하는 편이 옳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 소장은 “EBS 다큐프라임이 말하고 싶은 바는, 시장경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해야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선동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래 글은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EBS 다큐프라임, 5부-민주주의의 미래

엉뚱한 민주주의에서 출발, 엉뚱한 해법 제시, 실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비판

EBS 다큐멘터리 ‘민주주의’(5부-민주주의의 미래)는 사실에 대한 왜곡과 잘못되거나 일방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그렇게 잘못 이해된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것처럼 주장한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원인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찾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원인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자연스럽게 그 원인을 제거 내지는 해소한다는 해법도 엉뚱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철저하게 통제하거나 사회주의처럼 생산수단을 공유화해야 한다는 것을 민주주의 구출의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결국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민주주의’인데, 보여주는 전체 줄거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이다.

잘 알다시피 민주주의는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놀이공원을 지을 것인지 교량을 건설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민주주의는 독재자나 소수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집단적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그런데, 다큐는 민주주의를 마치 재분배를 하는 시스템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즉 “정부도 분배하는 역할을 합니다....다시 말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소득을 재분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그렇다. 또 평등한 분배를 민주주의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조세는 불평등에 대처하는 일반적 방법 중 하나이고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민주적이죠.”라는 말이 그렇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 즉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다수의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타인의 재산을 빼앗아 재분배하고 평등한 소득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타락한 민주주의’ 혹은 ‘무제한적 민주주의’라고 비판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다큐는 거꾸로 이 타락한 민주주의, 무제한적 민주주의를 ‘건강한’ 민주주의, ‘올바른’ 민주주의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재분배를 강화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해야 한다’는 엉뚱한 주장을 하게 된다. 이 주장에 따르면, 개인의 개인재산권과 자유를 더 많이 훼손하고 침해하는 국가, 개인의 재산을 더 많이 빼앗아 더 많이 재분배하는 국가일수록 ‘민주적’인 국가가 된다. 개인재산권과 자유를 완전히 침해하고 개인의 재산을 남김없이 빼앗아 재분배하는 북한과 같은 나라들이 더 민주적인 국가가 된다. 반면에 개인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고, 따라서 제한된 수준의 재분배만이 허용되는 대한민국과 같은 나라들은 덜 민주적인 국가가 되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자유경제원은 9일 자유경제원 리버티 홀에서 'EBS 민주주의 방송, 이대로 괜찮은가'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최근 5부작으로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민주주의』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5명의 전문 패널이 EBS 교육방송의 '민주주의 왜곡' 실태를 분석했다./사진=EBS 다큐프라임 홈페이지, '민주주의' 영상캡처



다큐(5부-민주주의의 미래)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부 ‘민주주의의 미래’는 도입 부분부터 왜곡으로 시작한다. 2001년 9.11테러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묻자 부시 대통령이 “쇼핑이나 하세요”라고 했다면서, 이것을 ‘우리는 당신들이 필요 없다’라고 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이 당시 부시 대통령의 “쇼핑이나 하세요”라는 말은 절대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평상시처럼 행동함으로써 테러리스트들에게 미국은 테러 따위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당부의 표현이다. 또한 테러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사회혼란을 방지하며, 경제에 미칠 수 있는 악영향을 최소화하자는 의미였다. ‘세월호 사건’ 등 대형 사고가 있을 때마다 오히려 정치인들이 나서서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평상시처럼 쇼핑을 하라’는 말을 <우리는 당신들이 필요 없다>라고 곡해한 발언을 소개하면서 EBS 다큐는 민주주의가 우리 신체의 쓸모없는 흔적 기관이 되었고, 그 미래가 어둡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나아가 민주주의가 우리 신체의 쓸모없는 흔적기관이 되었고, 그 미래가 암울한 이유로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앞 무대에서 정부기관을 선출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동안 무대 뒤편에서 기업과 부유층이 모든 것을 조종한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앞 무대는 현실이 아니게 됩니다. 실제로는 기업이 지배하는 금권정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에 대항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금권정치, 부유층과 권력자의 영향력에 대항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진짜 과제”라고 주장한다.

기업, 금권정치에 대한 언급은 정치자금을 누가 대는가하는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로 넘어가고,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원인이라는 쪽으로 논의가 옮겨간다. 그런데 이때부터 다큐는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극소수의 부자들, 금융기관들이 부를 축적하는 동안 일반 사람들의 경제적 지위는 그대로이거나 추락하고 있다”는 노암 촘스키의 말이 소개되는 반면에 “지난 이삼십년 간 전 세계의 가난은 크게 줄어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은 줄었다.....많은 사람들이 가난에서 탈출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위대한 승리였다.”는 알베르토 알레시나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의 말도 함께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필립 페팃의 말을 소개한 부분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는 “국가로부터 교회를 분리시켰듯이 국가로부터 기업과 상업을 분리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기업의 세계가 국가 정책을 너무 많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세계 여러 곳에서 사실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수준의 불평등을 정부, 국가, 법이 허용해주고 있는 현실을 설명해준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자유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업과 상업을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시켜야 된다는 말인지, 아니면 기업과 상업을 국가 권력에 더 밀착(종속)시켜야 된다는 말인지? 물론 다큐의 전체 방향은 경제와 기업을 국가 권력에 더욱더 종속시켜 통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재분배를 강화하고 평등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로부터 기업과 상업을 분리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라는 진단은 틀렸고, 오히려 ‘국가로부터 기업과 상업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문제라는 진단이 논리적으로 옳다. 

민주주의는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놀이공원을 지을 것인지 교량을 건설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민주주의는 독재자나 소수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집단적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그런데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방송은 민주주의를 마치 재분배를 하는 시스템으로 변질시키고 있다./자료사진=연합뉴스



이런 식의 뒤죽박죽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부유한 민주국가 시민들은 더욱 강력한 민주주의로의 회귀를 갈망하고 있는 것 같고, 미국의 경우 정부에 대한 신뢰는 1960년대부터 급격히 하락했으며, “오늘날 유럽 대중은 정치에 대한 신뢰를 잃었는데 이는 납득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시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 불안이나 많은 사람들의 풍요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박탈하는 불평등 심화 문제에 정부가 대응하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요.”라는 말도 그 중의 하나이다. 불평등 심화가 문제이고, 따라서 강력한 재분배 정책을 펴는 강력한 민주주의로의 회귀를 갈망한다고 하면서, 하필이면 가장 강력하고도 광범위한 복지정책과 재분배정책을 펴는 유럽에서 정부가 대응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차라리 복지정책과 재분배정책에서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수준에 있는 나라들을 예로 드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나아가 재분배정책의 강도에 따라, 다시 말해 재분배정책을 강력하게 하는 국가들과 그렇지 않은 국가들 등등 그룹별로 나누고, 각 그룹별로 민주주의와 정부에 대한 신뢰도를 파악해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클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할 경우 결과는 다큐가 내세우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즉 유럽과 미국 등 부유한 국가 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 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에 비해 훨씬 높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위기는 부유한 국가가 아닌 가난한 국가들에서 더욱 심각하다는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많은 나라들에서 부유한 국가를 제외하고 부패가 큰 문제.....그렇기 때문에 부유한 소수의 국가를 제외한 국가들에서 부패를 통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다큐에서의 언급은 이러한 가능성을 크게 뒷받침하고 있다.

가난한 국가들에서 부패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라면, 부유한 국가들에서는 무엇이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일까? 부유한 국가들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은 다큐의 주장과는 달리 불평등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부터 온다고 할 수 있다. 다큐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중도 우파를 지지하든 중도 좌파를 지지하든 결국에는 같은 종류의 정책이 시행될 것이라고 시민들이 느끼게 되면 그들은 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될 것입니다. 서구 사회에서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 중 한쪽을 선택하는 것은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에서만 선택이 가능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라는 말은 부유한 국가에서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정당이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른바 ‘묻지마 복지 경쟁’ ‘퍼주기 복지 경쟁’을 하게 되면 민주주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핵심은 “시민들이 공권력을 폭력의 비극 없이 피를 흘리지 않고 해고할 수 있는 것”인데, 모든 정당의 정책들이 쌍둥이처럼 동일하다면, 집권자나 집권당을 교체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근본적 특징이 실종된 민주주의, 이것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다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소득불평등의 원인이라고 보고 있지만, 경제적 역사적 사실은 정반대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경제자유보고서에 따르면 소득불평등은 국가별로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즉 소득불평등은 국가별 경제정책, 다시 말해 자유로운 시장경제인가 통제경제인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은 국가별 경제정책에 따라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가장 통제적인 경제체제에서 가장 가난한 최하위 10% 국민의 연평균 소득은 910달러에 불과하지만, 가장 자유로운 시장경제체제에서 가장 가난한 최하위 10% 국민의 소득은 무려 8,474달러나 된다. “어느 사회에서나 소득의 차이는 다 있지만, 똑같은 빈곤계층이라 하더라도 시리아에서 가난한 것과 스위스에서 가난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1) 

EBS 다큐멘터리 ‘민주주의’(5부-민주주의의 미래)는 사실에 대한 왜곡과 잘못되거나 일방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그렇게 잘못 이해된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것처럼 주장한다./자료사진=연합뉴스



사정이 이렇다 보니 EBS 다큐 ‘민주주의’(5부-민주주의의 미래)는 그 결론이 매우 실망스럽다. 5부에 걸친 대규모 다큐멘터리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미래,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부분에서 정작 나와야 할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우려,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즉 “민주적 제도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이 아닙니다. 비록 정부는 때때로 부패하며 권력을 남용하고 필요 이상으로 억압적일 때도 있지만, 우리는 어쨌든 정부를 선출할 수 있잖아요.”라는 이야기, 그리고 “저는 민주주의를 밀어낼 만한 라이벌 체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는 이야기가 그렇다.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라 할 수 있는 관점에서의 해결책 또한 해결책이라 할 수도 없다. 나오는 이야기는 기껏해야 ‘투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거나 ‘현재 불이익을 받는 집단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거나 ‘정치지도자들이 잘 하면 민주주의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공자님’ 주장들뿐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그나마 새로운 -사실 새로운 것이라 할 수도 없지만- 주장이라면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 실망스럽긴 마찬가지다.

하나는 ‘하층민과 노조, 그리고 중간계층이 연대하고 적극 참여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이 발언은 토마스 마이어 교수가 한 말인데, 그가 왜 이런 발언을 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그는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인데,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독일사회민주당(SPD)이 설립한 재단이다. 1950년대 초반까지도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았었고, 독일노동조합연맹(DGB)을 집권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 독일사회민주당이다. 

그의 발언의 배경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그의 발언은 다큐가 의도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방향, 즉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수를 이루는 시민들이 연대하여 정부와 국회에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다수결에 의한 집단적 의사결정-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수결에 의한 집단적 의사결정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다수결을 통해, 즉 민주주의를 통해 자신들이 의도한 바를 얻어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수를 이루는 ‘하층민과 노조, 그리고 중간계층이 연대하고 적극 참여’ 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다큐멘터리 5부 전편(全篇)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관점에서의 민주주의의 문제라 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극도로 통제하거나 사회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유재산제도와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할 것’을 주문한 것이나, ‘제품을 만드는 로봇을 소유한 자가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로봇 소유권을 민주화해야 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둔다.’는 주장이 그렇다. 여기서 ‘제품을 만드는 로봇’은 곧 생산수단을 지칭하며, 따라서 ‘로봇의 소유권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말은 곧 생산수단의 공유화, 즉 사회주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시장경제 대신에 사회주의가 되어야만 민주주의가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사회주의와 결합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더구나 이 부분은 엄밀하게 말해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렇듯 전체적으로 볼 때, ‘5부 민주주의의 미래’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도 없을 정도다. 그것은 대부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간단히 말해 민주주의로 포장된 자본주의 시장경제 비판이다. 민주주의 문제를 고민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민주주의의 미래’ 대신에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미래’라고 붙이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1) 팔머, 탐 G. (김광동 번역), 『자본주의는 도덕적인가』, 비봉출판사, 2016, pp. 99-100.

[권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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