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의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방송이 기존의 민주주의 개념을 왜곡, 학문적 공정성을 잃은 ‘선동’이라는 지적이 전문가들에게서 나왔다. 자유경제원은 9일 자유경제원 리버티 홀에서 ‘EBS 민주주의 방송, 이대로 괜찮은가’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최근 5부작으로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민주주의』(이하 EBS)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5명의 전문 패널이 EBS 교육방송의 ‘민주주의 왜곡’ 실태를 분석했다.
이날 1부 『시민의 권력 의지』에서 발표자로 나선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프로그램의 핵심주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불평등”이라며 “민주주의로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EBS의 주장은 한 마디로 ‘시민의 권력’을 이용하여 개인의 재산을 빼앗아 재분배하자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신 교수는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의 주제는 “다수결을 통한 ‘로빈훗 프로젝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이어 신 교수는 이번 다큐프라임 민주주의에서 드러난 EBS의 가장 큰 문제점에 대해 “공영방송에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은 주제를 다루려면 학문적 공정성을 유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EBS는 특정입장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차용했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EBS 다큐프라임에서 ‘민주주의는 자원 배분에 대한 시민 권력’이라고 정의내린 것은 공정하지 않은 독단적 결론”이라며 “바람직한 자원 배분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며, 정치는 불가피하게 시장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재분배의 책임을 가질 뿐”이라고 강조했다. 아래 글은 신중섭 강원대 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EBS <다큐 프라임>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1부 ‘시민의 권력 의지’
시작하는 말
EBS <다큐 프라임>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소개로 시작한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시민들을 위해 고안된 인류의 지혜이다. 민주주의는 아테네의 시민주권 전통에서 출발해 근대 민주공화국 건국, 보통선거권 쟁취, 시민권 확대를 거치면서 인류의 보편적 원리가 되었다. 하지만 불평등이 보편적 흐름이 되면서 시민들은 생존을 위협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를 제어할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시민주권’, ‘갈등’, ‘민주주의의 우선성’, ‘기업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미래’라는 5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테네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정치학, 경제학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를 토대로, ‘불평등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으로써 민주주의의 가치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또한 세계적인 석학들의 인터뷰를 통해 민주주의의 전통을 회복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1부 시민의 권력 의지"
"1983~85년, 아프리카에서는 삶과 죽음이 교차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식량생산량이 역대 2번째로 높았고 보츠와나에서는 가뭄으로 생산량이 1/4로 감소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에서는 기근으로 100만 명이 죽었고, 보츠와나에서는 단 한 명의 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보츠와나는 민주주의 국가였고 에티오피아는 독재국가였다. 기근은 생산력의 문제가 아니다. 자원배분의 문제이며 정치체제의 문제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평등한 정치참여를 기반으로 시민이 자원배분에 대해 통제권을 가진 정치체제이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부터 미국 공화국 건국, 보통선거권 확대라는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궤적을 중심으로, 자원배분에 대한 시민의 통제력이 어떻게 확대되어 왔는지 탐색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지켜지지 않는 공영방송의 기본 윤리
EBS <다큐 프라임>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주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불평등’이다. 아테네 도시국가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민주주의는 대단히 복잡한 개념으로 오히려 오늘날 거의 특정한 내용이 없는 개념이 되었다. ‘민주주의’는 특정 의미를 가진 정치학적 개념이 아니라 아무 곳에나 붙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신의 주장이 민주적이라거나 민주주의와 부합한다고 말하는 것은 합리적 근거 없이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주장이 민주주의로 정당화되며, 전혀 상반되는 두 체제가 모두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 없는 말이 되었다.
EBS <다큐 프라임> ‘민주주의’도 ‘민주주의’를 제멋대로 사용하는 한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제로 등장한 ‘불평등’의 문제를 부각시켜 그것을 민주주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평등’의 원인이나 해결 방안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자신들이 선호하는 방법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면서, 시청자들이 그 방법을 따르도록 오도하고 있다. ‘민주주의’로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EBS <다큐 프라임> ‘민주주의’의 주장은 한 마디로 ‘시민의 권력’을 이용하여 개인의 재산, 그들은 ‘자원’이라고 부르는 것을 빼앗아 재분배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다수결을 통한 ‘로빈훗 프로젝트’에 지나지 않는다.
EBS <다큐 프라임> ‘민주주의’는 부가 어떻게 생산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발전하면서 어떻게 인류가 기아와 빈곤을 추방하고 잘 살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기본적으로 보호해야 할 핵심적인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도 전혀 없다. 무조건 ‘시민 권력’이 합의하여 개인에 속한 부를 빼앗아 나누어 ‘불평등’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시민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을 선동하는 것이다.
EBS 다큐프라임은 "민주주의는 자원 배분에 대한 시민 권력"이라고 정의내린다. 하지만 이는 공정하지 않은 독단적 결론이다. 공영 방송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방송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바람직한 자원 배분은 정치가 아닌 시장에서 이루어지며, 정치는 불가피하게 시장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재분배의 책임을 가질 뿐이다./사진=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다수의 합의에 의한 ‘불평등’의 해결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선동하는 EBS <다큐 프라임> ‘민주주의’가 어떻게 공영방송인 EBS에 의해 제작되고 방송되는지 의문이다. EBS는 대표적인 공영방송으로 시민들의 시청료와 기업의 광고료,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방송이다.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명분으로 설립된 EBS는 창조과학기술부의 지원으로 EBS <다큐 프라임> ‘민주주의’를 제작하고 방송했다. 창조과학기술부의 지원금은 국민의 세금에서 나온 것이다. 시청료는 다양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시민들이 비자발적으로 납부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민국의 대표적 기업들이 ‘자유기업의 이념’을 부정하는 EBS <다큐 프라임> ‘민주주의’를 통해 자신들을 광고하고 있다.
EBS <다큐 프라임>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방송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불평등’은 현대 사회의 중요한 의제 가운데 하나이고,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대립하면서 논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BS <다큐 프라임>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입장에 부합하는 사례와 의견을 임의적으로 편집하여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
‘민주주의’와 ‘정치’라는 개념은 정치학적으로 다양하게 정의되며, 아직까지 어떤 정의가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은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다.’와 ‘민주주의는 시민에 의한 통치이다.’라는 주장을 합쳐 ‘민주주의는 자원 배분에 대한 시민 권력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아가 ‘민주주의는 자원배분에 대한 시민 권력이다.’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어원적 정의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시민에 의한 통치’는 추상적이어서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다.’라는 정의는 특정 정치학자의 주장으로 ‘정치’에 대한 주류적인 해석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정의를 합쳐 ‘민주주의는 자원 배분에 대한 시민 권력이다.’라는 주장을 독단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공영방송에서 ‘민주주의’, ‘정치’,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은 주제를 다루려면 적어도 학문적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BS는 특정의 입장을 주장하고 있는 학자들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차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공영방송의 기본윤리를 지키는 방송이라면 반대 의견이나 대립적인 입장을 균형 있게 소개해야 한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나 다양한 관점에서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 학설들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은 없다.
우리 헌법의 경제 조항인 제119조는 “①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은 2항만 소개하면서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다. 2항이 아니라 1항이 중요하고, 2항은 1항의 보조조항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편파적인 태도이다. 특히 일반 시민이나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영향을 미치는 EBS라면 특정의 이념이나 입장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여 최종적인 결론은 시청자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기근이나 가난이 아니라 '불평등'의 문제를 민주주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주장에 불과하다. 현재의 불평등도 사실은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의 산물이다./사진=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이론적인 문제점들
‘시민의 권력의지’란 무엇인가? 이 방송은 ‘시민의 권력의지’를 말하면서 마치 ‘시민’을 하나처럼 설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하나인 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나라의 구성원 전체가 시민이며 시민은 각각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각기 다른 시민은 하나의 통합된 의견을 갖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때에 따라 필요하면 토론과 합의를 통해 공동의 규칙을 정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공동의 규칙은 최소한으로 제한된다.
각기 다른 시민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의견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전체주의로 나아간다. 전체주의가 아니면 어떤 문제에 대해 하나의 의견이나 해결 방식이 도출되지 않는다. 다양한 의견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의견으로의 통합은 물리적인 힘, 강제적 권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강제적 권력을 통한 의견의 일치는 나치즘과 파시즘, 구 공산주의, 현재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불평등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불평등이 발생한 원인은 무엇이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각기 의견이 다르다. 불평등의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며, 그것을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원인에 대한 진단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하나의 ‘시민의 권력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EBS <다큐 프라임>은 ‘불평등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민주주의’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민주주의는 ‘개별적 의사결정’이 아니라 ‘집단적 의사결정’이다. 민주주의는 집단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는 구성원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구성원 각자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한다. ‘집단적 의사결정’에 몇몇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의지가 반영될 때 우리는 이 의사결정 과정을 민주적이라 부른다.
전형적인 민주적 집단적 의사 결정 과정인 선거에서 누가 당선되어야 한다는 것은 미리 결정할 수 없다. 누가 당선자인가는 선거 결과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책 결정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예를 들어 ‘법인세를 인상하기로 한 국회의 결정’이나 ‘법인세를 내리기로 한 국회의 의사 결정’은 모두 민주적 의사 결정이다.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이루어진 국회의 결정은 모두 민주적 의사 결정의 결과이고 민주주의의 결과이다.
민주적 집단적 의사 결정은 특정의 결과를 전제하지 않는다. 어떤 의견이 채택되어야 한다는 사전의 결정은 없다. 왜냐하면 결과가 과정을 시행하기 이전에 미리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과정이 민주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그 과정을 비민주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시민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다큐 프라임>에서 ‘불평등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민주주의’라고 할 때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서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을 채택하든 아니면 현재의 불평등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선택하든 그것은 모두 민주적 의사결정이고 민주주의의 결과이다. <다큐 프라임> 제작자들이 ‘불평등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정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집단적 의사 결정에서 나오지 않아도 그것은 민주주의의 결과이고 민주적 의사 결정이다.
아무리 민주주의적인 사회라고 할지라도 집단적 의사 결정으로 모든 것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집단적 의사 결정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개인의 권리에 대해서는 집단적 의사 결정이 개입할 수 없다. 소수자의 종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하여 다수의 결정으로 그 종교를 금지할 수는 없다. 개인의 자유와 생명, 재산에 대한 권리는 그것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에 집단적 의사 결정으로 이러한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 프라임>은 ‘시민의 권력의지’나 ‘민주주의’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진행하고 있다. 집단 결정이 침해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언급은 없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결정이 항상 옳은 결정이 아니라는 사실도 지적해야 한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포퓰리즘적 의사 결정이 가져온 폐해에 대해서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몰락, 브리질, 그리스의 경제 위기가 모두 민주주의를 표방한 다수 의사 결정의 결과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그리스 시대부터 분명하게 지적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보다도 민주주의의 병폐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집단적 의사 결정이 초래할 부정적인 결과를 우려하였다. 민주주의가 타락하여 중우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최선의 정치 체제에서 제외하였다.
이 <다큐 프라임>은 1부는 “다수는 비록 한 명 한 명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였을 때에는 전체로서 가장 훌륭한 소수의 사람들보다도 더 훌륭할 수 있다. 그들은 다수이고, 각자로는 나름대로 탁월함과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래서 자원배분에서도 시민의 집단적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라는 말로 끝맺을 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 옹호자는 아니었다.
이 프로그램은 ‘기아’를 찾아내기 위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1800년대 중엽 아일랜드와 1980년대 아프리카까지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오늘날 북한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죽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아사(餓死)의 유무를 민주주의에서 찾았지만, 아사의 실제 원인은 민주주의의 유무가 아니라 자유시장 경제의 존재 여부이다. 자유시장 경제가 꽃 핀 곳에서는 아사가 발생하지 않았다. 자유시장 경제가 발전한 곳은 어디에서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다수결로 소수의 재산을 세금으로 걷어 재분배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 침해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생산의 주체를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평등한 가난의 분배로 전체주의적인 공산주의 사회로 회귀할 것이다./사진=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은 마치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고, 시민들이 자원 배분에 참여하지 못해 기아가 발생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당시 아일랜드 기아의 첫 번째 원인은 감자마름병이었고, 아프리카 기아의 1차적 원인은 가뭄이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만일 감자마름병이나 연속적인 가뭄이 없었다면 기아는 상당부분 완화되었을 것이다. 물론 정치가 기아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것을 주요 원인으로 설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만 기아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기아의 근본 원인은 분배가 아니라 생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산이 되었음에도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자유 시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아의 근본 원인을 경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서 찾는 것은 인과관계를 잘못 설정한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는 함께 성장하였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풍요는 민주주의 덕분이 아니라 자유 시장 덕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에는 관심 없이 생산된 것을 무조건 재분배하겠다고 하면 누가 생산하겠는가.
이 프로그램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끌어들이면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아일랜드와 아프리카의 ‘대기근’ 곧 ‘기아’를 예로 들었다. 그러나 ‘기아’, ‘빈곤’, ‘불평등’을 동일한 경제 현상으로 볼 일은 아니다. 이 셋은 한 나라의 경제 체제로서 시장 경제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 ‘기아’와 ‘빈곤’은 대부분 사라지고,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한다.
‘대기근’과 같은 기아의 문제와 ‘불평등’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서양 근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도입되기 전에 인간의 식량은 자연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기후 사정이 ‘대기근’의 원인이었다. 물론 ‘대기근’ 시기에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고, 이들은 대부분 신분적으로 상류계층에 속했다. 굶어죽을 사람과 살아남는 사람을 결정하는 요인이 정치적이었지만 절대 식량이 모자라면 누군가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농업이 기계화되고 과학영농이 도입되면서 자연스럽게 ‘대기근’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시장경제에서 멀리 있는 국가에서는 주기적으로 ‘대기근’과 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곤상태에 머문다.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에서 ‘기아’는 사라졌다. 그런 사회에서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예외에 속한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문제다. 절대적인 빈곤은 사라지고 상대적 빈곤만 남아 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면 불가피하게 ‘불평등’은 확대된다. 특히 후기산업사회의 도래와 지식경제, 세계화의 전개로 일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무한정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산업 형태의 변화로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부의 축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상위 계층에 속한 사람과 하위 계층에 속한 사람 사이의 부의 차이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을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해야 할 일차적 과제로 설정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불평등’이 문제라고 하지만, ‘지나침’을 합리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불평등을 바로잡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잘사는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걷어 재분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잘사는 사람’의 기준은 자의적이다. 그리고 현재보다 더 광범위한 재분배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불평등한 상태’는 존재하기 때문에 재분배 주장은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도 ‘경사면의 문제’가 적용된다.
기근이나 가난이 아니라 ‘불평등’의 문제를 민주주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시행하는 것은 어렵다. 현재의 ‘불평등’도 사실은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의 산물이다. 뿐만 아니라 다수결로 소수의 재산을 세금으로 걷어 재분배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 침해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생산의 주체를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평등한 가난의 분배로 전체주의적인 공산주의 사회로 회귀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의사결정 원리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불평등과 격차에 대해 해결할 수 있는 만능 답안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개별적 의사결정’이 아니라 ‘집단적 의사결정’이다. 민주주의는 집단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는 구성원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구성원 각자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한다. ‘집단적 의사결정’에 몇몇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의지가 반영될 때 우리는 이 의사결정 과정을 민주적이라 부른다./사진=연합뉴스
이 프로그램이 채택하고 있는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다.”라는 ‘정치’에 대한 정의도 이 프로그램 제작자들의 주장과 달리 ‘정치에 대한 가장 널리 알려진 정의’가 아니다. ‘정치’에 대한 정치학자ㆍ정치철학자들의 정의는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정치학 교과서1)는 정치를 ① 통치기술로서 정치 ② 공적업무로서 정치 ③ 타협과 합의로서 정치 ④ 권력과 자원배분으로서 정치로 구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들은 아무런 설명 없이 독단적으로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다.”라고 정의 내린다. 이 정의는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④ ‘권력과 자원 배분으로서 정치’를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에 대한 네 번째 정의는 정치를 좁은 의미의 정치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는 급진적인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정치를 정부, ‘공적인 일’과 같은 특정한 영역에 한정시키지 않고 모든 사회 활동과 인간 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파악한다. 아드리아 레프트위치는 “정치는 모든 인간 집단, 제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집단적 사회 활동의 - 공식적ㆍ비공식적 활동과 공적ㆍ사적 활동을 포함하여 - 핵심”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정치는 국가 사이, 지구적 무대에서와 동일하게 가정, 소규모 친구 집단에서도 일어난다.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다.”라는 이 프로그램이 채택하고 있는 정치에 대한 정의는 해롤드 라스웰의 정치에 대한 개념과 동일하다. 그는 정치가 사회생활에서 자원의 생산, 분배, 소비와 관계한다고 보면서 정치는 본질적으로 권력이라고 주장했다. 정치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 원하는 성과를 달성해내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라스웰에 의하면 정치는 다양성과 욕구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욕구와 욕망은 무한한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용할 있는 자원은 제한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는 희소 자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이며, 권력은 희소 자원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권력을 가진 자가 희소 자원을 얻게 된다.2)
정치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배경으로, 이 프로그램은 ‘시민의 권력’이 “자원을 권위적으로 분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에 의한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며, 민주주의는 자원 배분에 대한 시민 권력’이라는 것이다. ‘자원의 생산’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생산된 자원을 시민 권력이 권위적으로 배분해야 한다는 선동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맺음말
1부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민주주의와 자원 배분에 대한 독단적인 결론을 내린다.
‘정치에 대한 가장 널리 알려진 정의’
(1)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다.”(데이비드 이스턴)
‘민주주의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정의’
(2) “민주주의는 시민에 의한 정치이다.”
‘정치’와 ‘민주주의’의 정의를 합치면
(3) “민주주의는 시민에 의한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다.”
‘정치’와 ‘민주주의’의 정의를 합치면
(4) “민주주의는 자원 배분에 대한 시민 권력이다.”
이 프로그램의 이러한 정의는 공정하지 않은 독단적 결론이다. 공영 방송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방송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바람직한 자원 배분은 정치가 아닌 시장에서 이루어지며, 정치는 불가피하게 시장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재분배의 책임을 가질 뿐이다.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1) 앤드류 헤이우드, 『정치학』, 조현수 옮김, 성균관대학 출판부, 2009, 22-37쪽.
2) 앞의 책, 36쪽.
[신중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