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곪는 건 알아도 염통 곪는 건 모른다는 속담은 2010년대 초반 대한민국 문화계의 상황에 대한 썩 훌륭한 비유다. 문학-미술-영화-연극-출판-음악 등 문화예술의 장르 하나 하나는 물론 문화와 한 몸인 언론-교육 진영 역시 좌파에게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를 내줬는데, 이것만큼 자기파괴적이고 도착적(倒錯的)인 현안이 또 있을까?
대한민국 염통이 곪아가는 나머지 급기야 체제수호에까지 영향을 주는 상황이 지금이다.
그 결과 문화의 옷을 걸친 정치투쟁이 판을 치고 중립적인 지식정보로 포장된 정치투쟁이 일상 속에서 작동한다. 일테면 반(反)대한민국 성향으로 오염된 지식정보가 단행본이나 교과서 등의 형태로 담겨있고, 교실이나 도서관에서 배움의 영역으로 떠받들어진다. 문화는 좁혀 말하자면 심미적 경험이자 교양체험이지만, 변화된 세상 요즘의 문화란 세상을 떠받치고 운영하는 숨은 힘으로서의 가치와 사회정서 즉 소프트 파워를 일컫는다.
상식이지만 좌파적 가치를 담은 지식정보가 대학의 편제와 내용에 스며들어 표준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곳에서 생산된 지식정보가 신문, 대형포털, TV 등의 미디어를 통해 유통-증폭되면서 건전한 공론장(公論場)을 파괴 내지 황폐화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그 소프트 파워가 병든 결과 대한민국은 책임 없는 주류(主流)없이 항구적 위기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그 현실을 확인하기 위해 다음 인용문을 음미해보자.
소설가 장정일이 최근 펴낸 <장정일의 악서(樂書)총람>(책세상, 2016년)에 실은 ‘펑크록, 레게, 힙합은 어떻게 저항하는가’에 실린 글이다. 참고로 그건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양효실 지음, 시대의창) 이란 책에 대한 서평인데, 서평대상인 책 자체가 좌파 냄새가 물씬하지만, 장정일의 글은 한술 더 뜬다. 이 땅의 좌익들이 가지고 있는 평균적 인식을 드러낸다.
“문화란 무엇인가?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문화는 지배 계급의 이념과 지배의 정당성을 전파하고 지키기 위한 진지였다. 지배 계급이 보편이라고 강요하는 문화는 보편이 아니라 자기 예찬이고 선전이면서, 피지배 계급에게서 자발적인 숭배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대중의 기호 혹은 시장의 선택이 문화의 향방을 자연스럽게 주도한다는 오늘과 같은 대중문화 시대에도 백인, 남성, 이성애자, 엘리트로 이루어진 여론 주도층이 여전히 문화의 심판관 노릇을 하고 있다. 양효실의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시대의 창, 2015)는 권력의 관리와 감독에 저항한 다양한 문화 운동을 예찬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문화진지론을 연상시킨다. 이 짧은 인용문에 저항, 문화운동, 권력에 맞서기, 지배계급의 이념, 피지배계급, 소수자들의 기성질서 거부 같은 중립적이지 않은 용어가 줄줄이 등장하며, 대한민국의 현 상황을 뒤집어버리자는 충동에 가득 차 있다.
그게 예외적인 인물의 돌출발언이 결코 아니다. 상식이지만 좌파적 가치를 담은 지식정보가 대학의 편제와 내용에 스며들어 표준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위험천만하다.
그곳에서 생산된 지식정보가 신문, 대형포털, TV 등의 미디어를 통해 유통-증폭되면서 건전한 공론장(公論場)을 파괴 내지 황폐화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우리 현실이다.
오염된 문화정보-지식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기완결적인 사이클이 이미 완비된 것이다. 생산(각 문화 장르를 포함한 대학교수, 저자, TV, 신문)과 유통(인터넷 포털과 좌파 상업주의의 출판계 그리고 전교조) 그리고, 소비(젊은 층)로 이어지는 거대한 지식정보의 불량 생태계가 구축된 것이다.
지금 한국은 이념적 합의가 깨진 사회다. 헌법 제4조가 규정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희미해졌고, 체제 수호에 필요한 정치사회적 부력(浮力)이 남아있는가 자체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사진=연합뉴스
구체적으로 2011년 방송통신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이 매일 텔레비전 시청시간은 187분, 인터넷 98분 그리고 라디오 청취 71분이다. 평균적인 대한민국 성인은 하루 6시간 동안 매스미디와 SNS에 노출되는 셈인데, 왜곡된 지식정보에 오래 노출될수록 파편화된 정보에 편견을 키우고 편향된 시각을 키울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 구조를 발제자는 낙진(落塵)효과라고 표현한다.
학력이 높을수록, 대중매체에 오래 노출될 경우 세상과 사회를 보는 정상적 안목 형성에 장애가 발생하거나 때론 치유하기 힘든 병리학적인 인지(認知)구조를 낳을 수도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아주 예외적으로 지적 노력을 경주하는데 몇몇 개인에게만 균형 잡힌 대한민국 옹호와 자유주의의 가치가 허용된다. 그래서 그들은 낙진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지식인, 독립적 지식인이다.
한국의 방어적 민주주의자들이 이런 유해한 지식정보 환경과 미디어 생태계 즉 문화 전체를 함께 바꿔줘야 할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우리가 익히 알지만, 좌파 패러다임의 지식과 정보는 오래 전부터 대학을 포함한 각급학교의 편제와 내용에 스며들었다. 아카데미즘의 영역으로 성큼 진입한 지 오래이며, 이제는 해당 분과 학문이나 중,고교 교과목의 표준의 자리를 차지했다. 지난해 좌편향 역사교과서가 일선 학교에서 압도적 다수로 채택된 것이 상징적인데, 훨씬 이전 대학 아카데미즘이 좌파적 가치와 좌파적 이념으로 점령됐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부터 이런 좌파문화 권력의 구조가 형성되고 작동되기 시작했을까?
정교한 분석작업이 별도로 필요하겠지만, 거칠게 살펴보자면 그건 1987년 민주화 항쟁을 전후해 대세로 등장했다. 즉 한국사회의 구조적 내리막길인 87년 체제가 문화계에도 여축 없이 작용하는 셈이다. 당시 권위주의 정부의 유화책으로 이데올로기 금서(禁書) 기준을 일부 완화한 1982년 봄을 기점으로 현대사 연구의 수정주의 흐름을 포함한 좌파적 방법론이 학문적 시민권을 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이미 지식사회에서 지적-도덕적 우위를 점유하는데 성공했던 이른바 민중문화운동은 해방 이후 형성됐던 기존의 보수적 지식체계와 문화권력을 대체할 카드로 급부상 중이었다.
지금도 좌파 내지 좌파정서가 일상화된 것이 문학 장르와 영화 장르인데, 이 두 장르가 민중문화운동을 쌍끌이하며 앞장을 섰다. 비슷한 시기 역사학-정치학-철학-사회학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이 이른바 ‘학술운동’이란 이름 아래 좌파 패러다임을 열렬히 도입했다. 그렇게 진행됐던 이른바 학술운동은 대학의 정규 커리큘럼 바깥 쪽에서 이뤄졌지만, 지금의 사정은 판이하다. 완전 역전이 된 것이다.
우파 정부 재집권이 올해로 8년째이지만, 사회 분위기를 포함한 지식사회, 그리고 문화계에서 좌파의 헤게모니는 요지부동이다. 이념적으로 실용주의를 내세웠던 이명박 정부는 애당초 문제의식이 애매했고, 그와는 달리 국정철학이 상대적으로 선명할 것으로 기대했던 박근혜 정부가 고전을 거듭하는 배경에도 앞서 언급한대로 오염된 지식-정보의 매커니즘이 맹렬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즉 문화권력을 저들에게 빼앗긴 것이 이토록 현실정치마저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어쨌거나 한 사회의 공식적인 지적-문화적 헤게모니가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허물어지고, 급기야 비제도권의 것으로 교체되면서 정치사회적 불안요인으로 등장한 것은 극히 찾아보기 드문 사례에 속한다. 2000년대 초반 지금 좌파의 지식권력-문화권력은 더 이상 정규 커리큘럼 바깥을 서성대지 않는다. 아카데미즘의 중심부로 성큼 진입했고 반대한민국과 친북한을 옹호하는 구조적 힘으로 맹렬하게 작동 중이다.
인적자원 분포만해도 그렇다. 지금 활동적인 50대 전후의 대학 교수는 물론 출판계의 유명 베스트셀러 저자 그룹을 포함한 편집자-출판사 대표 등 대부분이 젊은 시절 지적-문화적 세례를 좌파 학술운동, 민중문화운동에서 받았다. 좌파의 도그마에 빠져있거나, 아니면 좌파정서에 오염된 그와 같은 아류 지식인들이 너무나 많고, 이미 이 사회 각 부문의 중견-중진으로 활동한다.
지난 4.13총선을 통해 20대 국회에 입성한 의원들의 이념 지형은 바뀐게 없다. 국보법 위반 전력자(19대 국회 23명, 20대 국회 20명), 운동권 출신 의원들(더민주당 의원 123명의 경우 20대 국회에 57명)이 뽑혔다./사진=연합뉴스
실로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제도권은 일패도지(一敗塗地)했다.
올해 초 역사교과서 전쟁 당시 장신대 김철홍 교수의 가슴 철렁한 진단처럼 “대한민국은 지금 이념의 낙동강 전선에 서있다.” 즉 건국 이후 1970년대까지 정부의 보호 아래에서 소박하게나마 자유주의의 전통을 유지해오던 관변(官邊) 반공주의 세력, 방어적 민주주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헤게모니를 갖는데 성공한 한국형 신좌파의 등장과 놀라운 성공 탓이다. 그렇게 구축된 좌파의 지적-문화적 승리라는 성채 앞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정통 세력은 매일같이 무력감 혹은 좌절감을 경험한다.
경제학자 이영훈 교수의 경우 어느 글에서 이렇게 속내를 비췄다.
“자유주의를 강의하기 위해서는 꼴통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속으로 자유주의자이면서 입까지 자유주의자인 교수는 대학에서 희귀한 존재다. 지적 풍토가 이러해서는 이 사회를 얽어 매는 역사의 굴레를 벗기면서 또 하나의 비약을 이끌 리더십이 생겨나기 힘들지 않을까?” (‘한국 자유주의의 미래’, <통합, 누구와 어떻게 할 것인가> 39쪽)
이런 지적 풍토의 대학과정을 마친 사람의 상당수가 깜짝 놀랄 정도로 반기업적 정서를 표출한다거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 우연일 리 없다. 그 결과 2000년대 초반 지금 한국은 이념적 합의가 깨진 사회다. 헌법 제4조가 규정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희미해졌고, 체제 수호에 필요한 정치사회적 부력(浮力)이 남아있는가 자체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최악의 경우 체제붕괴(regime collapse) 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진단도 피할 수 없다.
입춘에 장독 깨진다는 우리네 속담이 있지만, 북한 전체주의 체제의 몰락을 코앞에 두고 우리가 먼저 자멸할 수도 있는 위기국면이다.
유례 드문 국가건설의 성공 사례가 우리가 아니던가? 건국 70년이 채 못 된, 아직은 젊은 현대국가인 대한민국의 이례적인 노쇠 현상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그리고 그건 곧 들이닥칠 재앙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뜻에 다름 아니라는 게 발제자의 관견이다. ‘곧 들이닥칠 재앙’의 징후를 나는 지난 4.13총선에서 이미 보았다.
밝히지만 그건 이념적 무뇌아에 다름 아닌 집권여당 새누리 소속 의원의 면면이나, 20대 총선을 통해 국회로 진출한 상당수 야당 의원들의 수상쩍은 이념 성향 때문만은 아니다.
여전한 국보법 위반 전력자(19대 국회 23명, 20대 국회 20명), 또 역시 전과 비슷한 수준의 운동권 출신 의원들(더민주당 의원 123명의 경우 20대 국회에 57명)을 뽑은 걸 보면 실로 가슴이 철렁한다. 폭력혁명에 의한 북한식 정치체제로의 전환과 별도로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은 절차적 민주주의인 선거과정을 통해 자발적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덜컥 내놓는 충격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문화는 좁혀 말하자면 심미적 경험이자 교양체험이다. 본래의 그 모습을 어떻게 회복할까라는 문화영역의 문제를 넘어 이 나라 체제수호의 현실적인 현안이라는 걸 재확인한다. 이걸 방치하다가는 사실상의 내전상황에 돌입하거나, 아니면 선거과정을 통해 자발적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덜컥 내놓는 충격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지름길인가는 별도의 자리에서 거론하기로 하자. /조우석 주필
(이 글은 조우석 미디어펜 주필이 21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대한민국문화예술인 주최로 열린 ‘문화전쟁,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3차 세미나에서 발표한 발제문이다.)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