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23) 영혼을 가꾸는 소크라테스의 사랑론
플라톤(BC 428~347) 『향연』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철학적 주제를 다룬 작품은 『향연』이다. 43편의 대화편 가운데 대작인『국가』와 『법률』이 공동체를 위한 거대 담론을 담고 있다면, 이 작품엔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소크라테스는 늘 자기는 에로스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에로스에 대한 것 빼고는 무지하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사랑밖엔 난 몰라'라고 했지만, 실제는 그가 다른 방면에 무지한 철학자가 아님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가 지나치게 겸양을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상정하는 '사랑'의 관념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면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그가 논하는 '사랑'은 통속의 사랑이 아닌 영혼의 사랑과 지혜 사랑을 포괄한다. 그렇다면 그가 에로스에 정통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지혜의 눈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세상 모든 일의 궁극을 다 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무튼 '사랑학'의 대가인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최고 지성인들이 종횡무진으로 사랑을 찬미하는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한 담론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인생철학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음미할수록 매력적인 맛을 거듭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고대 그리스 고전 가운데 제명이 『향연』인 작품은 둘이 있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쓴 『향연』이 그것이다. 둘 다 희랍어 '쉼포시온(Symposion)'으로 쓰지만, 두 작품의 분위기는 차이가 있다. 플라톤의 작품은 토론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토론형 향연인데 반해, 크세노폰의 작품은 주연과 곡예 공연, 토론이 어우러진 이벤트성 향연을 그리고 있다.
이런 까닭에 플라톤 작품은 좀 더 차분한 가운데 진지한 토론을 보여주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소크라테스가 토론을 이끌고 있다. 플라톤의 작품에서 향연의 주최자는 아가톤이다. 그는 비극 경연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만찬을 열고 아테네의 명사들을 초대했다. 게스트는 소크라테스와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인 알키비아데스, 파이드로스, 그리고 에뤽시마코스와 아가톤의 지인 몇몇이다.
이들은 당시 아테네 최고의 지성인들이다. 이들이 벌인 토론은 그야말로 고담준론(高談峻論)의 모범을 보여준다. 토론의 주제는 에로스를 찬미하는 것이다. 향연 참가자들이 오른쪽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차례대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방식이다.
작품의 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향연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에로스를 찬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갑자기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제자 알키비아데스가 스승 소크라테스를 찬미하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폴로도로스가 향연에 참석했었던 아리스토데모스라는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동료들에게 다시 들려주는 방식이다.
작품속의 각 화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에로스의 본질을 다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첫 발언자는 파이드로스다. 그는 에로스 찬미라는 화두를 제안한 사람이다. 그는 에로스의 무한한 힘을 찬미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용감해지거나,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는 사람들마저 있는 것은 에로스가 힘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테베에서 군대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애인들로 함께 구성하여 용맹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만들었던 예를 든다.
두 번째로 나선 파우사니아스는 사랑의 종류를 둘로 나눠 그 특징을 설명한다. 우라니아 아프로디테와 판데모스 아프로디테다. 전자는 천상의 아프로디테요, 후자는 범속의 아프로디테다. 소크라테스는 크세노폰이 쓴 『향연』에서도 이런 분류로 사랑을 구분한 후 천상의 아프로디테를 찬미한 적이 있다. 파이드로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지론을 따른 것 같다. 다만 두 작품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나오고 다른 것에 영향을 주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아무튼 파우사니아스는 몸을 사랑하기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천상의 아프로디테를 더 고결하게 여긴다. 그는 사랑 그 자체에 미추(美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행해지는 방식에 미추가 따른다고 본다. 사랑이라는 행위 자체는 아름답지도 않고 추하지도 않을 뿐이며, 사랑이 올바르게 행해지느냐의 여부에 따라 아름답거나 수치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파우사니아스는 아름다운 천상의 사랑, 즉 우라니아 아프로디테를 권장한다. 몸을 더 탐하는 범속의 사랑보다는 상대를 미덕으로 이끄는 한결같은 사랑이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연인의 청을 무턱대고 들어주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혜롭고 훌륭한 사랑으로 이끌어 주고, 지식을 증진하기를 열망하는 연인에게만 청을 들어 주는 방식으로 사랑을 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의사인 에뤽시마코스의 사랑론에는 직업적 경험에서 나온 통찰이 배어있다. 그는 무절제한 에로스와 절제 있는 에로스로 나눈다. 몸이 건강한 부분을 강화하고, 나쁜 부분을 제거해야 늘 강건해 질 수 있듯, 절제 있는 에로스의 영향을 받을 때 사람들을 우애 있고 행복하게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 역시 파우사니아스가 강조했듯 천상의 사랑을 권장하면서 사랑이 방종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는 남녀 간의 사랑의 본성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소개한다. 인간의 성(性)은 원래 세 종류였다. 남성, 여성, 그리고 남녀추니. 그들은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발을 지녔고, 몸이 둥글어 어느 방향으로든 걸을 수 있었다. 또 달리기 할 때에는 여덟 개의 팔다리로 땅바닥을 디디며 재빠르게 굴러갈 수 있었다. 이 독특한 인간들은 힘이 세고 정력이 엄청난데다 자부심이 대단하여 신들마저 공격하려 했다.
제우스는 인간들의 도전과 방종을 징벌하기 위해 몸을 반으로 잘라 버렸다. 그제야 두 팔과 두 발을 갖게 된 인간들은 힘이 약해졌고, 떨어져 나간 다른 반쪽을 그리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쪽이 된 이들이 무기력해져서 죽어가기 시작하자 제우스는 두 몸으로 갈라진 남녀들의 음부를 앞으로 옮겨놓아 서로 결합하여 성욕을 충족시키거나 자식을 생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로 남성이나 여성에서 잘려나간 자들은 각각 남성 또는 여성 동성애자가 되고, 양성의 본성을 모두 지닌 남녀추니에서 잘려나간 자들은 서로의 반쪽을 그리워하고 합쳐지길 갈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둘이 하나가 되고자 생겨난 욕구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온전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회귀적 본능이자 욕망인 셈이다.
저마다 잃어버린 반쪽의 부절(符節)을 찾아내고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면 그보다 큰 지복(至福)은 없을 터. 인간이 에로스를 찬미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아테네 학술원 앞에 있는 소크라테스 좌상 ⓒ박경귀
이 향연의 호스트이자 비극작가인 아가톤은 에로스 신의 본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미덕을 칭송한다. 에로스는 부드러움, 우아함의 본성을 지녔다. 또 에로스는 "누구에게도 불의를 행하지도 않고, 어느 누구로부터도 불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압과 에로스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정의, 절제, 용기, 지혜의 4주덕(主德)에도 능동적으로 관여한다. 이런 미덕으로 인도하는 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하거나 그런 자질을 갖고 있다면 이는 모두 에로스 덕분이라는 것이다.
향연의 참석자마다 에로스의 다양한 측면을 충분히 찬미했다. 에로스의 숨겨진 속성을 더 이상 찾아내긴 어려울 듯싶었다. 맨 마지막 발언자인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에로스를 찬미할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에로스를 찬미하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에 대해 그런 약속을 한 것은 "내 혀지, 내 마음이 아니었네"라며 엄살을 떨 만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결여되어 있는 것을 갖고자 원하는 것을 욕망과 사랑의 속성으로 보았다. 결핍을 채우려는 동기가 사랑의 본성이라는 의미다. 결여된 아름다운 것, 좋은 것, 훌륭한 것을 원하는 것을 사랑의 본성으로 본다면, 우리가 채우고자 갈망해야 할 최상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만티네이아의 여인 디오티마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를 좌중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에로스론을 전개한다. 에로스는 아름답지도 않고 좋은 것도 아니라며 아가톤의 주장을 반박한다. 에로스는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정령이며, 때로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기도 하고, 인간들 사이의 교류와 대화 속에 스며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에로스의 본성은 자신의 부모의 본성을 모두 이어받았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생일잔치에 왔던 가난의 여신 페니아(Penia)와 방편(方便)의 신 포로스(Poros)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 까닭에 에로스에게는 어머니의 본성에 따라 늘 결핍이 따라다녔다. 다행히 에로스는 아버지를 닮아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들을 얻을 방편을 마련하는 능력도 함께 타고 났다.
에로스는 지혜와 무지의 중간에 있다. 이미 지혜로운 신들은 지혜를 사랑하지 않지만,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지혜를 사랑한다. 나아가 무언가 채우려는 열망을 갖고 합당한 방편을 찾으려는 본성을 지닌다. 그러면 모든 것을 채우려는 열망은 모두 '사랑'이라 불려 마땅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인간들은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 한다. 좋은 것들을 소유함으로써 행복해지려는 인간들의 욕구야말로 인간 모두에게 발견되는 '간교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업, 운동, 학문 등 여러 분야에서 성취를 얻고자 하는 '사랑'을 지향한다고 해서 이들이 사랑을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불리지만, 이들의 활동이 '아름다운 혼'을 가꾸기 위한 사랑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은 영속적이고 불사(不死)를 원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랑도 불사를 원한다. 인간이 남녀의 결합을 통해 자식을 낳고 세대를 이어가는 것도 불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편이다. 그러나 진정한 불사를 원하는 자는 어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심지어 목숨을 바쳐서라도 불후의 미덕과 명성을 남기길 원한다. 알케스티스가 남편 아드메토스를 구하기 위해 죽고, 아킬레우스가 절친 파트로클로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은 것이 그런 예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을 표출하는 자들은 출산을 통해 불사를 확보하지만, 아름다운 몸과 아름다운 혼이 결합된 출산이어야 진정한 불사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아름다운 몸에서, 아름다운 활동으로, 나아가 아름다운 지식으로, 또 아름다운 것 자체로 나아가는 미덕을 낳는 것, 그것이 진정한 불사를 이루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아름다움의 단계를 상승시켜 가는 '에로스의 사다리'를 차례차례 올라야 신의 사랑을 받고 불사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이러한 불사의 존재가 되게 하는 일에 에로스가 가장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에로스는 인간을 가장 아름다운 혼을 가진 불사의 존재로 만들어 주는 위대한 힘을 가진 존재인 셈이다. 더구나 에로스는 지혜, 용기, 정의, 절제를 지배할 수 있는 힘까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에로스에 대한 찬미의 담화는 알키비아데스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파장이 되고 담화의 주제는 엉뚱하게 흘러간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늘 연모했던 아테네 최고의 꽃미남이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칭찬해 보라는 좌중의 요구에 응한다. 술에 취한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못생긴 사람의 대명사인 실레노스(Silenos)나 사튀로스인 마르쉬아스(Marsyas)를 닮았다고 놀리면서, 자신이 소크라테스에게서 당한 무시나 모욕의 사례를 고발한다.
그러나 실제는 소크라테스가 무지한 척하지만 더 할 수 없이 지혜롭고 절제력이 있으며, 철학적 담론으로 젊은이들에게 '독사보다 더 심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특히 아름다운 자신이 밤을 함께 보내며 유혹했지만, "아버지와 형과 잤을 때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며 자신이 조롱과 모욕을 당했다고 넋두리한다.
소크라테스가 극도의 절제와 용기를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병영에서의 사례도 밝힌다. 소크라테스는 한 겨울에도 맨발로 전투에 나갔고, 패전한 전투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후퇴했으며, 용기 있는 행위로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고도 포상을 사절했다는 것이다. 향연의 주제는 원래 에로스를 찬미하는 것이었지만, 결말은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찬미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야말로 에로스 못지않게 현실 세계에서 모두에게 찬미되어야 할 존재였음을 그리스인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담론처럼 풍성하고 다양하며, 흥미로운 주제는 없을 터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는 인류 역사상 인간이 최고의 관심 대상이자 주인공의 역할을 하던 시대였다. 그런 까닭에 사람과 사람들을 연대시키는 힘, 그리고 공동체를 더욱 결속시키는 힘은 에로스일 수밖에 없다. 에로스는 인간의 욕망, 도전과 응전을 이끌어주는 강력한 촉진제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지혜 사랑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가꾸는 일에 일평생 매진했던 것도 인간의 탁월성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소크라테스는 그야말로 에로스의 화신이었다. <향연>은 이런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핵심 관념인 에로스를 가장 다채롭게 조명해 낸 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향연』,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2010), 253쪽.
[박경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