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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귀단장 고전특강(126)-절제란 무엇인가?

2016-07-22 08:42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25)-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절제의 미학
플라톤(BC 428~347) 『카르미데스』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플라톤은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가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네 가지 덕목으로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들었다. 공동체 수호자들이 어떤 덕성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조화롭고 질서 있는 국가를 만들 수 있을 터. 플라톤이 도출한 4주덕(主德)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라케스>는 소크라테스의 용기에 대한 담론을, <카르미데스>는 절제(sophrosyne)를 테마로 다루고 있다.  

소프로쉬네, 절제란 무엇인가? 지혜, 용기, 정의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적극적·외향적 가치라면, 절제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먼저 작용되는 소극적·내향적 가치의 특성을 지닌다. 절제는 타인에게 요구하는 가치라기보다 우선 자신의 감성과 판단, 행동의 조절에 스스로 부과하는 관념이라 할 수 있다.

<카르미데스>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기원전 432년 포테이다이아(Poteidaia) 전투에 참가했다가 귀향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10대 초중반의 청소년 카르미데스와 10대 후반의 풋풋한 청년 크리티아스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절제의 의미를 탐색했다. 이 작품은 길지 않지만 단일의 주제에 대해 의미 있는 담론을 보여준다. 아고라나 체육관에서 청소년 및 청년들과 대화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파하던 소크라테스의 일상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타우레아스(Taureas) 체육관(palastra)을 찾았다. 고대 그리스 도시의 팔라스트라는 레슬링 또는 복싱, 그리고 오늘날 격투기와 비슷한 판크라테이온 경기를 위한 연습장이었다. 이곳은 체육활동 뿐만 아니라, 철학자들과 청년들이 만나 담화를 통해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청년들은 이곳에서 알몸으로 운동하며, 균형 잡힌 탄탄한 몸과 운동 기량을 닦았다.

어른들은 팔라스트라에서 청소년들을 훈육하면서, 시민과 전사에게 요구되는 덕성과 강인한 체력을 단련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동성애가 자연스럽게 싹텄다. 이 작품에서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미소년 카르미데스가 체육관에 들어서자, 좌중의 어른들이 서로 자기의 옆에 앉히려 부산떠는 광경이나, 소크라테스마저 카르미데스의 아름다운 몸매를 보고 당황했다고 말하는 대목이 그렇다.  

물론 이는 평소 목석같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미소년의 육체에 유혹을 느꼈다기보다는 미소년의 아름다움을 좌중에게 강조하기 위한 농담조로 읽힌다. 플라톤의 작품 <향연>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아테네 최고의 꽃미남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와 잠자리를 함께 하며 유혹해도 소크라테스가 넘어가지 않았던 일화를 상기해 보라.  

아무튼 소크라테스는 카르미데스의 두통을 치료해 준다는 명목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는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선 머리를 치유해야 하고, 몸 전체를 치유해야 하며, 나아가 궁극적으로 혼을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부분이 건강하려면 먼저 나쁜 일의 원천이 된 몸, 그리고 혼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두통 해소를 위한 대증요법이 아니라, 건강의 균형을 찾아줄 보다 근원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의도하는 것은 의학적 치료가 아니다. 두통 치료라는 명분으로 미소년과 이야기할 거리를 만들지만, 으레 그렇듯이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교사답게 미소년의 영혼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논제로 이끌어 간다. "혼에 절제가 생겨나 자리 잡으면 머리와 몸의 다른 부분을 치유하기 쉽다"고 믿기 때문이다. 절제와 건강은 긴밀히 관계된다고 보는 관점에서 두통 치료의 용건은 ‘절제’라는 덕목에 대한 화두로 자연스럽게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의도한 화두로 대화를 이끄는 탁월한 재주를 지녔다.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알아차린 크리티아스는 카르미데스가 아테네에서 최고 명문 가문인 솔론의 후예인 만큼 절제와 다른 탁월한 자질들을 타고났다는 점을 소크라테스에게 주지시킨다. 카르미데스가 충분히 절제 있다면, 소크라테스가 특별한 주문(呪文)없이도 두통약을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카르미데스가 실제로 절제를 갖추고 있는지 캐어묻는다. 캐어묻는 것이야말로 소크라테스의 주특기. 카르미데스가 자신이 절제를 갖추었는지 여부를 분명하게 응답하지 못하자 소크라테스는 절제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먼저 규명해보자며 특유의 문답법을 전개한다.
 

아테네 학술원 앞에 있는 소크라테스 좌상


카르미데스가 생각하는 절제란 무엇인가? 먼저 일종의 차분함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차분한 사람들은 절제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절제가 훌륭한 것 가운데 하나라고 전제하고, 차분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가운데 어떤 것이 훌륭한 것인지를 논증하면서 차분함이 절제의 속성이 될 수 없다고 논박한다.

글을 읽고 쓸 때 빨리 읽고 쓰는 것이 차분하게 읽고 쓰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 또 레슬링 경기도 활기차게 하는 쪽이 차분하고 느리게 하는 쪽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는 응답을 이끌어낸다. 그렇다면 절제는 일종의 차분함일 수 없고, 절제 있는 삶은 차분한 삶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게 소크라테스 특유의 변증법이 빛을 발한다.  

두 번째 응답은 절제는 염치와 같다는 것이다. 절제는 사람을 부끄럽고 수줍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소크라테스는 이 역시 가볍게 반박한다. 절제는 훌륭한 것인데, 염치는 훌륭한 것이기도 하고 나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카르미데스는 세 번째로 절제는 제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규정해 본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쉬운 예를 들어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필요한 제 것을 제작하고 제 할 일만 잘해야 한다면 국가 경영이 잘 될 수 있을까? 똑같은 일을 모두가 하려고 하는 것은 능력과 자질에 맞는 일을 나누어 하는 것보다 비효율적일 것이라는 반박인 깔려 있는 셈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반박에 카르미데스의 대응이 궁색해지자, 결국 크리티아스가 대신 응답에 나서게 된다. 사실 '절제가 제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이해는 카르미데스가 크리티아스에게서 들은 말이기 때문이다. 

세탁장이, 제화공, 양복장이 등 모든 장인들이 제 할 일이 아닌 남의 일까지 하면 절제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인가? 크리티아스는 남의 일을 하는 것도, 헤시오도스가 '일은 수치가 아니오'라고 말했듯, 훌륭한 일을 한다면 절제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역시 의사가 언제 유익한 행위를 하는지 언제 유익하지 않은지 알지 못할 때도 있다는 예를 들어 반박한다.  

마지막으로 크리티아스는 절제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델포이의 신전 기둥에 새겨져 있는 경구인 '너 자신을 알라'의 취지도 사람들에게 절제의 미덕을 가르치려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절제가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이라면 그것의 결과물은 무엇인지 반문한다. 진정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도 알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도 알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아는 것이 특별한 지식이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은 지식에 관한 지식일 터. 

소크라테스는 절제가 지식과 지식의 결여에 관한 지식이라면, 즉 자기가 아는 것도 알고 자기가 모르는 것도 알며, 같은 처지에 있는 남들도 검증할 수 있다면, 절제 있는 사람들은 과오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 분야의 잘할 만한 전문가들에게 일을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절제의 도움을 받는다면, 과오를 줄이고 올바른 인도를 통해 가정이 정돈되고, 국가도 잘 경영될 것이라는 의미다. 이게 절제의 유익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여기까지 절제의 정의와 유익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돌연 정말로 절제가 유익한가에 대해 스스로 회의를 제기한다. 절제 있는 삶은 진정한 지식에 따라 행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지식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잘나가고 행복할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의문한다. 지식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느냐는 좋은 지식인가 나쁜 지식인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완전하게 정의내리는 일에 실패했음을 자책한다. 단지 "절제 있을수록 그만큼 더 행복하다고 여기라"고 조언할 뿐이다. <카르미데스>는 여기서 끝난다.  

절제란 무엇인가? 다각적으로 규명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포리아(Aporia)로 끝났다. 미궁으로 끝난 탓에 오히려 긴 여운이 남는다. 소크라테스는 절제의 중요한 요소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 그리고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들었다. 이것이 절제의 온전한 정의로 규명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절제 있는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함은 분명히 했다. 그것이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카르미데스>는 플라톤의 초기 작품이고, 소크라테스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 극화된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사람, 즉 소크라테스, 크리티아스, 카르미데스는 묘한 악연의 운명을 살게 된다는 점에서 끝나지 않은 ‘절제’의 정의를 다시 숙고하게 만든다. ​

소크라테스는 평생 스스로 절제 있는 삶을 추구했다. 반면에 이 작품에서 십대 후반과 초반으로 그려진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기원전 404년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후 세워진 30인 참주정의 핵심인물이 된다. 이들은 무자비한 공포 정치로 무고한 시민을 무수히 살상했다. 아테네의 민주정을 파괴한 30인 참주들은 '무절제'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30인 참주정의 잔혹한 통치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트라우마는 5년 후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기원전 399년에 소크라테스가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

아테네 시민들은 평소 민주주의의 폭정을 경계하고 비난한 소크라테스가 달가울 리 없었다. 게다가 30인 참주정의 주동자였던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증오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미움으로 전가된 측면도 있었다. ​​

또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작품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젊은이들을 오도하는 소피스트로 매도한 것도 그에 대한 시민들의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억측과 과장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을 잘못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지혜를 추구하라고 가르쳤다. 헛된 야망과 명예를 추구하지 말고 영혼을 가꿀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 때 제자를 자처했던 그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아테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갖고 있던 이러한 편견과 오해가 근본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연설 대목이 길게 묘사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아테네에서 지혜롭다고 이름 높았던 철학자, 작가, 정치가를 한명한명 찾아다니며, 지독하게 캐묻는 문답을 통해 그들이 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더구나 그 사실조차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통렬하게 확인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크라테스는 역설적으로 스스로 자신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임을 확인하게 된다. 진정한 지혜는 '무지(無知)의 지(知)'임을 깨우쳐준 것이다. 그런데 이 '무지의 지'는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이 모르는 것도 아는 것'이라는 절제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자신이 모색하던 미완성의 '절제'의 의미를 끝까지 궁구하고 실행했던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절제가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절제의 규명을 포기했었다. 그런데 끝까지 절제 있는 삶을 살았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그로인해 더 일찍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렇다면 예전에 '절제'가 삶을 행복으로 이끌지 그렇지 않을지 알 수 없어서 아포리아로 남겨두었던 것이 오히려 진실이었음을 자신의 온 몸으로 증명해 낸 것이 아닌가. 이는 절제가 무엇으로 인도하든 구애받지 말고 절제 있는 삶을 추구하라는 소크라테스의 웅변은 아닐는지. 갖가지 유혹에 흔들리고 이모저모 재면서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카르미데스​』,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5)


[박경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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