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은 2014년 하반기부터 기업가연구회를 통해 우리나라와 세계를 호령한 기업인들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하고 발표해왔다.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지난 25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열린 기업가연구회 5기에서 삼성을 세계적 기업집단으로 만든 이건희 회장에 관해 발표했다. 김인영 교수는 삼성의 과거와 현재에서 드러난 이건희 회장의 업적과 기업가정신을 밝혔다. 미디어펜은 김인영 교수의 발제문을 3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아래 글은 세 번째, 마지막 연재다. [편집자주]
전자, 반도체, 스마트폰으로 세계를 매혹하다 [하]
4. 삼성 이전과 이후(before and after)
(1) 삼성은 한국을 ‘제조 강국’ ‘IT 강국’ ‘전자 강국’으로 만들었다. 삼성전자의 200조 매출은 주로 해외에서, 특히 스마트폰을 포함한 IT모바일사업에서 나오고 있다. 2013년 삼성전자의 매출은 228조 7000억 원이었는데 이 가운데 국내 매출은 22조 8000억 원으로 전체 매출에서 국내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0%에 불과하다. 해외에서의 매출과 유명세 때문에 대한민국보다 삼성(Samsung)이 더 인지도가 높다고 할 수 있는 현실이다. 대한민국을 전 세계의 제조업 강국, IT 강국으로 만든 기업이다.26)
(2) 삼성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전자회사로 스스로 자리매김하였다. 삼성은 한마디로 세계에서 통하는 기업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상 한동안 세계적인 기업이었던 포항제철이나 현대건설과 같은 대기업이 있었지만 지속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삼성은 반도체와 스마트폰 그리고 TV 등에서 소니(SONY)를 제치고 1등으로 자리 잡은 회사이다. 어떤 이는 제대로 일본을 이기거나 앞선 이는 명량대첩의 이순신과 삼성의 이건희 밖에 없다고 재미있게 평가했다.27)
이건희는 1987년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하여 2014년 5월 쓰러져 입원하기 전까지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나갔다. 2014년 6월 말 기준으로 삼성그룹은 73개의 국내 계열회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가운데 상장사는 17개사, 비상장사는 56개사이다. 삼성그룹의 주요 계열사로는 전자 부문에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S, 삼성SDI 등이, 금융 부문에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삼성증권 등이, 화학 부문에 삼성종합화학, 삼성정밀화학 등이, 중공업·건설 부문에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테크윈 등이, 서비스 부문에는 호텔신라, 제일기획, 에스원, 삼성경제연구소, 삼성의료원 등이 있다.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는 회사는 제일모직(구, 삼성에버랜드)이다.28)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취임 후 ‘21세기 초일류기업 달성’이라는 비전과 ‘조(兆) 단위 순이익 실현’을 약속했고 '자율경영', '기술중시', '인간존중'을 축으로 하는 경영으로 실현하였다. 당시는 실현 불가능한 선언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평가절하 됐던 목표를 실현함으로서 이건희 회장은 세계적인 기업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삼성의 매출액은 이건희 회장 취임 당시인 1987년과 비교하여 17조원에서 152조원으로 8.9배 성장했으며 2700억 원에 불과하던 세전 이익을 14조 2000억 원으로 52.6배 성장시켰다. 이 시기에 삼성의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140조원으로 140배, 수출은 9억 달러에서 663억 달러로 73.7배 증가하였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이병철 창업주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2세대 기업인으로 꼽힌다.
해외직원을 포함한 임직원수는 16만 명에서 25만 명으로 1.7배 증가하였고 그 동안 삼성은 반도체, TFT-LCD, 휴대전화, 모니터 등의 세계 1등 제품을 탄생시켰으며, 브랜드 가치도 2007년 169억 달러로 세계 21위를 기록하면서 명실공히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2002년에는 시가총액 면에서, 2005년에는 브랜드가치 면에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일본의 소니(SONY)를 앞지름으로써 세계 최고의 전자기업으로 성장하였다. 2011년에는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판매량이 애플(Apple)의 판매량을 넘어서는 기적을 이루어 냈다.29)
이렇게 삼성의 제품이 소니를 추월하여 세계 어디에서나 팔리는 제품이 될 수 있는 이유의 하나는 제품의 디자인이 크게 향상된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 이건희 회장은 2002년부터는 “세계 1등이 아니면 (삼성의) 공장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하며 동시에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물론 1996년 신년사에서 이미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경영의 최후의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96년 올해를 그룹 전제품에 대한 ‘디자인 혁명의 해’로 정하고, 우리의 철학과 혼이 깃든 삼성 고유의 디자인 개발에 그룹의 역량을 총집결해 나가도록 합시다.”라고 했다.
이렇게 디자인을 강조해도 나아지지 않자 2005년 4월에는 사장단을 이끌고 이탈리아 밀라노 가구박람회를 참석한 뒤 디자인 전략회의를 주재한다. 그리고 “삼성의 디자인 기술은 아직 부족하다. 애니콜만 빼면 나머지는 모두 1.5류이다. 이제부터 경영의 핵심은 품질이 아니라 디자인이다.”라고 제품의 디자인 혁신에 나선다.30) 그 결과가 최근 삼성에서 유럽풍의 멋진 가구의 모습을 갖춘 전자제품이 출시되는 이유로 판단된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은 이와 같이 대단히 높은 경영성과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적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존재해 왔다. ‘삼성공화국론’이 그것인데 삼성그룹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강해지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5만 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며 국내 경제에 기여하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여 한국을 알린 삼성의 기업 규모가 크다는 사실이 바로 부정적으로 영향력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도리어 삼성은 비자금 사건 이후로 정치권과의 연계나 사회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활동은 크게 자제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한 비판과는 반대로 삼성은 그 규모에 합당하게 사회 공헌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31)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왼쪽)과 이재용 부회장.
(3) 삼성은 기업의 성공에 인재가 중요함을 일깨워주었다. 이병철은 삼성을 제일로 만들기 위해 회사 이름에 제일을 붙였다. 제일제당, 제일모직, 제일합섬. 그리고 “기업은 사람이다”를 외치며 제1의 인재를 뽑아 제1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삼성을 기업들의 ‘사관학교’로 만들었다. 이건희는 최고의 인재가 만명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신념하에 사장 역할의 반 이상을 세계적 최고 인재 찾기에 사용할 것을 주문했다.
이러한 삼성의 인재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1980년대 64메가 D램을 개발할 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눌러 앉은 한국의 인재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에서도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어느 회사도 기술을 내놓지 않을 때 결국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한국인 인재였던 것이다. 이후 특히 삼성이 가장 부족한 부분의 하나인 휴대폰의 소프트웨어 개발에 세계적인 인재들이 해결해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이건희 회장은 인재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2000년 신년사에서 “디지털 시대는 총칼이 아닌 사람의 머리로 싸우는 ‘두뇌 전쟁’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뛰어난 인재가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고, 2002년 6월의 인재전략 사장단 회의에서는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 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리는 인재경쟁의 시대, 지적 창조력의 시대입니다.”라고 했다.32) 이는 삼성이 ‘관리의 삼성’에서 ‘기술의 삼성,’ ‘디자인의 삼성’ 그리고 ‘인재의 삼성’으로 변화해감을 의미한다. 이러한 삼성이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이슈 선점과 비전 제시가 한국의 다른 후발 기업(following companies)들에게 주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4) 삼성은 새로운 기업 소유경영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삼성은 아직도 소위 ‘재벌’ 또는 ‘재벌그룹’이라고 불리는 가족 소유경영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재벌이 2차 대전 이후 해체되어 게이레츠 체제로 남아는 있지만 가족 소유경영은 아니다. 그렇다면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을 제외하고는 3대로 이어지는 가족 소유경영이 세계적으로 성공한 모델은 찾기 힘들다. 이건희 삼성그룹의 성공은 소유경영은 무조건 나쁘다거나, 가족경영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므로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 일부의 주장에 대한 중요한 반대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12월 1일 취임 당시 연간 매출액이 13조5000억 원 정도에 불과했던 삼성그룹을 20여 년 만에 세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취임 25년인 2012년에는 그룹 매출이 383조원으로 커져 취임 당시보다 28.3배 성장했으며, 그룹의 자산총액은 255.7조원으로 성장했다. 시가 총액으로 비교해 본다면 1987년 시가총액 1조원에서 2012년 303조2천억원으로 303배 커졌다./사진=연합뉴스
5. 이건희의 삼성이 주는 교훈 - 기업의 성공은 정치가 아니라 경영자가 만들어, 정치와 불가근 불가원, 그리고 ‘정치인은 4류 수준’
이병철 회장의 삼성은 정치권과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의 관계, 즉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는 관계를 철칙으로 삼았다. 한국비료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인의 신의(信義) 없음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삼성은 세계적인 기업이 되면서 기업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정치인과 관료의 자질이 높아져야 함을 지적한다.
이건희 회장의 ‘베이징 발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발언의 배경과 발언 전문을 볼 필요가 있다. 1995년 4월 이건희 회장은 중국의 장쩌민 주석과 리펑 총리와 연속해서 회담을 갖게 된다. 삼성이 2000년까지 중국에 총 40억 달러를 투자해 100억 달러 규모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계획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장쩌민 주석과의 만남에서 “국가지도자는 나라의 비전을 설계해야 한다”는 말에 크게 감명을 받으며, “일본은 이미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중국은 지도부가 앞장서서 경제 발전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데, 우리의 행정과 정치는 규제와 권위주의의 과거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답답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경쟁력을 높이려면 국민·정부·기업이 삼위일체가 되어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국가 경영도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틀을 새롭게 짜여 한다.”는 요지의 말을 간담회에서 하게 된다.33) 발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가 회장이 되고 처음 이렇게 많은 기자들과 만난다. 현재 우리 정치와 관료행정 수준으로는 21세기를 준비할 수 없다고 본다, 우리의 현 수준을 국제 수준과 비교해 볼 때 비관적이다. 우리의 정치인은 4류 수준, 관료행정은 3류 수준, 기업은 2류 수준이다. 이 정권 들어와서 행정 규제가 풀린 것이 하나도 없다....이 정부와 삼성은 밀월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안티한 관계에 있다. 자동차 사업은 우리가 정부와 밀월관계에 있어 따낸 것이 아니라 부산시민들이 불만을 터드리는 바람에 허가된 것이다....중국 국가 주석은 반도체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반도체 공장을 지으려 해도 허가가 안 나오고, 허가를 받으려면 도장 천 개를 찍어야 한다. 반도체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인허가 행정이 규제 일변도이므로 외국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이대로 가다간 우리나라는 2류 국가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문제는 인허가권을 쥐고 규제를 가하는 관료들의 수준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34) (강조는 필자가 한 것임.)
이건희 회장의 발언의 핵심은 관료와 정치인이 변해야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건희 회장의 ‘베이징 발언’이 있었던 1995년부터 2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 정치인 4류, 관료 3류의 현실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비극은 그의 예언대로 대한민국의 경제가 추락해 가고 있는 모습이다.
결론적으로 이건희 회장 시기의 삼성 성공의 핵심은 기업가 정신과 그의 탁월한 경영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건희는 자신의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의 “미래 경영자의 모습”과 “사업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서 경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나는 ‘경영은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뛰어난 영화 뒤에는 반드시 명감독이 있듯이 훌륭한 경영의 뒤에는 탁월한 경영자가 있다. 급변하는 환경에 대응하여 기업을 발전시키는 주체는 사람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가 바로 경영자다.” 35)
“사업에 성공한 사람을 놓고 간단히 운(運)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업을 해본 사람은 운(運)이 좋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공하려면 그에 값하는 남다른 노력이 있어야 하고 수많은 고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36)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국내 최고의 기업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배경에는 물려받은 재산을 안이(安易)하게 지켜내는 수성자의 모습도, 정부를 배경으로 한 권력의 후원도 또는 호경기를 맞아 일시적으로 성장하는 운(運)도 아닌 무한히 노력하는 끈기와 집념의 경영자의 모습이 숨어 있다. 이건희 회장이 자신을 삼성의 ‘소유주’라기보다는 ‘기업 경영자’라고 말해 온 이유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37)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삼성은 한국을 제조강국 IT강국 전자강국으로 만들었다. 삼성전자의 200조 이상의 매출 중 90%는 해외에서, 특히 스마트폰을 포함한 IT모바일사업에서 나오고 있다./사진=미디어펜
26) ‘전자(電子) 강국(强國)’의 이미지는 삼성과 LG의 합작품이다.
27) 박상하, 『이건희: 초고속 성장 제국 ‘삼성전자’ 이건희 스토리』, 제4부 참조.
28) 네이버 지식백과, “삼성그룹(Samsung Group).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649960&cid=43167&categoryId=43167 (접속일: 2015년 11월 6일).
29) 김인영, 「기업에 대한 통념 깨기 ① 기업의 의미와 사회 공헌 - 삼성의 사례를 들어」, 자유경제원, 2016년 5월 17일, p. 6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옴. http://cfe.org/20160517_144592 (접속일: 2016년 7월 20일)
30)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p. 374-376.
31) 삼성의 사회공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인영, 「기업에 대한 통념 깨기 ① 기업의 의미와 사회 공헌 - 삼성의 사례를 들어」, 자유경제원, 2016년 5월 17일을 참조할 것.
32)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p. 366-367.
33) 이건희,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서울: 동아일보사, 1997, p. 61.
34)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p. 304-305.
35) 이건희,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서울: 동아일보사, 1997, p. 275.
36) 이건희,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서울: 동아일보사, 1997, p. 286.
37) 본 글에서는 글의 주제인 이건희 회장의 기업가정신과 관계없는 진보좌파 계열 언론이나 학자, 그리고 민노당(통진당, 정의당)의 과장된 삼성공화국론, 소유지배 문제, 무노조 경영 비판, 세습 경영, 삼성전자 한계론 등에서 다루지 않는다.
참고문헌
공정거래위원회. 『2013년 공정거래백서』. 서울: 공정거래위원회. 2013년. http://www.ftc.go.kr/policy/whitebook/whitePaperView.jsp?open_info_lt_no=12&currpage=1&searchKey=&searchVal=&stdate=&enddate=
기타오카 도시아키(北岡俊明)·일본디베이트연구협회. 『세계 최강 기업 삼성이 두렵다』. 책보출판사. 2006.
김인영. 『한국의 경제성장』. 서울: 자유기업원. 1998.
김인영. 「기업에 대한 통념깨기 ① 기업의 의미와 사회 공헌 - 삼성의 사례를 들어」. 자유경제원. 2016년 5월 17일. http://cfe.org/20160517_144592.
김현석. “이건희 회장 25년…"애플의 유일한 경쟁자" 삼성 매출 39배 커졌다.” 『한국경제신문』. 2012년 11월 20일.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111915201.
박상하. 『이건희: 초고속 성장 제국 ‘삼성전자’ 이건희 스토리』. 서울: 경영자료사. 2014.
박영래. “삼성전자 연간매출 9년래 첫 감소.” 『아이뉴스24』. 2015년 1월 8일.
이건희.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서울: 동아일보사. 1997.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서울: Human&Books. 2010.
이병철. 『호암자전』. 서울: 중앙일보사. 1986.
이인열. “일본이 두려워하던 한국.” 『조선일보』. 2016년 7월 23일. A30.
[김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