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31)-속지 않는 토론 관찰의 매뉴얼
쇼펜하우어(1788~1860) 『토론의 법칙』
'수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웅변술의 세 가지 장르를 구분하여 각각의 특성에 맞는 설득력 있는 담론의 방법론을 제시했다. 토론적 장르와 사법적 장르, 그리고 제시적 장르가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의 아름다움과 미덕을 칭송하는 제시적 장르의 연설보다, 대립적 견해를 가진 상대와 토의하는 토론적 장르나 법정에서 위법과 무죄를 다투는 사법적 장르는 그 담론의 전개가 더 뜨거울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에서 사법적 장르는 법률가들에게, 제시적 장르는 국가지도자나 정치인들에게 더 특화된 영역이다. 하지만 토론적 장르만큼은 각 분야 전문가는 물론 국민 누구나 여러 가지 상황에서 자주 경험할 수 있는 장르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도 토론의 기회가 넘친다. 언론매체가 만드는 각종 찬반 토론의 자리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자리는 토론의 장을 이분법적 구도로 설정하여 특정 주제에 대한 다양하고 자유로운 사고를 제약하기 일쑤다. 오히려 갈등과 대립을 더욱 조장하고 증폭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논쟁은 넘치지만 합의와 조정을 이끌어내는 진지한 토론이 드물기 때문이다.
19세기 초반, 의지의 철학을 주창한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토론의 방법론에 대해 전개한 내용들은 이채롭다. 그의 토론술(Dialektik)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수사학을 전개하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향을 닮았다.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의 사악한 욕망과 심리를 역이용하는 공격적인 논박의 기술을 제시하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하는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은 논쟁에서 무조건 승리하려는 사람에게는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논증이 안 된 내용을 기정사실화하여 전제로 삼는다.", "내용이 없는 말을 심오하고 학술적인 말로 둔갑시킨다.", "불합리한 주장을 함께 제시해 양자택일하게 한다"는 주장이 그렇다.
그가 주장하는 반격하는 기술 역시 구체적이고 효과적이다. 요즘 방송매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궤변론자들의 행태가 바로 쇼펜하우어의 기법을 숙달한 때문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틀린 증거를 빌미삼아 정당한 명제까지도 반박한다.", "상대방의 궤변에 궤변으로 맞선다.", "상대적 주장을 절대적 주장으로 바꿔 해석한다." 달변가들의 토론을 보면 이런 원리(?)에 충실한 사람들을 자주 보지 않는가.
승리에 몰두하는 토론자가 주장하는 모든 논거는 객관적 사실과 합리적 근거와는 거리가 멀다. 승리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결론을 이끌어 내는 기술이나 위기에서 탈출하는 기술 역시 무릎을 칠 정도로 정곡을 치른다.
"참 전제가 안 통하면 거짓 전제로 결론을 도출한다.", "거짓추론과 왜곡을 통해 억지 결론을 끌어낸다." 사실 이러면 문제다. 그런데 한 술 더 떠 이런 권고도 있다.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재빨리 쟁점을 바꾼다.", "이론상으로는 맞지만 실제론 틀리다고 억지를 쓴다.", "질 것 같으면 진지한 태도로 갑자기 딴소리를 한다." 등등 바람직하지 않은 토론 패턴들의 백화점처럼 전시된다.
이렇듯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논쟁의 방법은 윤리적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객관적 진리의 접근법은 더더욱 아니다. 오로지 승리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온갖 억지와 왜곡, 모순으로 가득한 '논쟁적 토론술'이다. 쇼펜하우어가 이런 사악한 승리의 비법을 교사(敎唆)(?)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런 토론술을 모든 토론의 이상적 모습으로 제시한 것일까? 아니면 추하고 역겨운 현실의 토론 실태를 냉정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인가.
쇼펜하우어는 토론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사악한 기교를 망라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토론가들이 이 기법을 숙달하기 위해 몰두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씁쓸하다.
쇼펜하우어는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꼼수와 잔꾀를 모두 열거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현실의 토론이 얼마나 냉혹한지, 또 토론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왜곡이 내재할 수 있는지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결국 대중이 왜곡과 꼼수의 현혹에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 주려 한 것은 아닐까.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비법이 토론자에게만 효과적으로 악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쇼펜하우어의 통찰은 토론을 관찰하는 청중에게 더 유용할 수 있는 지혜다. 토론에서 격돌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논리에 은닉된 왜곡과 꼼수를 간파해 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론에 나서는 사람들은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을 상대와 청중을 기만하는 기술로 활용하려 하겠지만, 현명한 청중은 이들의 왜곡과 기만에 더 이상 속지 않는 토론 관찰의 매뉴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 '천기(天機)'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곡과 꼼수에 능숙한 궤변론자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까? 아니면 늘 그래왔든 왜곡과 기만에 속아온 인간의 어리석음이 여전이 반복될 것인가?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토론의 법칙』, 쇼펜하우어 지음, 최성욱 옮김, 원앤원북스(2011, 11쇄), 136쪽.
[박경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