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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논란…이승만 대통령과 백범 김구 바로 알자

2016-09-04 08:15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대한민국의 빛과 그림자, 우남과 백범
-우남의 빛을 기리며-

백범은 알아도 우남은 모르는 젋은이들이 있다. 백범 김구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우남 이승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육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보편적 인식이다. 보편적인 인식과 사실이 늘 같을 순 없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놓고 볼 때 두 사람 모두 위인이다. 그런데 더 깊게 들어가면 우남 이승만이 곱절로 훌륭하다. 결과적으로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고, 이승만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보다 김구를 무조건적으로 훌륭하다고 추앙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글에서는 몇 개의 키워드를 통해 백범 우남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하려고 한다. 

김구만 독립운동 했나? 이승만도 했다, 더 전략적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일제시대에 '독립'을 이야기한 사람들은 훌륭하다. 이승만과 김구가 그랬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김구는 중국에서 각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외쳤다고 해서 모두 한 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마음은 같았지만 다른 방향과 방법으로 독립을 염원한 것이다.

‘무장투쟁’의 아이콘 김구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에서 발족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구가 주축이 되어 운영된 단체다. 중국, 만주, 연해주, 미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세력을 포괄한 큰 단체였다. 하지만 독립운동 노선이 저마다 달라 심각하게 분열된다. 이 때문에 1925년 즈음엔 불과 10여 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독립운동가 단체로 격하 되었다. 김구는 와해될 뻔 했던 임시정부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유지했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무너뜨리는 세력과도 격렬히 투쟁했다. 김구가 취한 전략은 ‘무력투쟁’이었다. 일본군 전승기념식에 침투해 폭탄을 던진 윤봉길도 김구의 작품이다. 이 사건으로 김구와 임시정부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은 임시정부를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본국 인민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여러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를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1)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했다. 김구는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광복군이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에 침투할 태세를 갖추었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이다. 이후 임시정부는 개인의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해방 후 김구는 북한에 다녀왔다. 그리고 북한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는 평양에서 김일성과 함께 “외군이 철수해도 내전은 없다”는 4.30 성명을 발표한다. 그는 중화민국 공사 류어만과의 대화에서 '소련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사진=연합뉴스



이승만, 미국에서 외교독립의 역사를 쓰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조선이 사라진 상태에서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은 외교라고 생각했다. 강한 나라에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그들이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그는 국제정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쉽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 직전,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통치할 수 있도록 미국에 청원했지만 미국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이미 없어진 나라였다. 일본과 갈등하면서까지 한국의 독립에 힘쓸 이유가 없었다. 이승만은 그 후에도 숱한 실패를 맛보았다. 국제정치는 냉혹한 것이다. 그러던 중, 미국의 교포사회가 응답했다. 1941년의 일이다. 하와이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했고, 이승만이 위원장에 선출됐다. 중국 임시정부의 김구도 이 결의를 존중했고, 이승만을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동포들에게 ‘대한독립’의 필요성을 알릴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같은 해 6월,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일본의 야욕을 논하며 일본이 조만간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견한 책이다. 실제로 6개월 후,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해군기지를 공격했다. 이승만의 예측이 맞았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이 기세를 몰아 이승만은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 자격으로 미 국무부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했지만 또 거절당했다. 

전쟁 말기가 되어 이승만은 미 육군의 전략정보처가 한국인 청년들에게 특수훈련을 시켜 국내에 침투시키는 계획을 성사시켰다. 1945년 초, 20여 명의 한국 청년들이 특수 훈련을 받았으나, 중국 서안에서 훈련 중이던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마찬가지로, 국내로 침투할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뜻밖의 해방, 무엇이 대한민국 자양분이 되었나

무장투쟁과 외교독립은 어느 정도 해방과 건국에 기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였다. 일본의 패망으로 ‘뜻밖의 해방’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이 더 옳았냐는 것을 판단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세간의 평가는 무장투쟁 쪽에 더 많은 점수를 준다. 그것 말고 알고 있는 독립운동이 없고, 그것만 가르치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운 환경에서 무장으로 투쟁하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 그 일을 김구가 했다. 그런데 그게 독립운동의 전부일까.

이승만은 미국에서 ‘외교독립’의 길을 걸었다. 35년 가까이 미국에 머물며 현실에 굴하지 않고 독립을 꿈꿨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Japan Inside Out’을 출간해 미국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하와이에서 ‘태평양잡지’를 발행해 동포를 계몽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승만의 ‘외교독립’은 단순한 독립운동을 넘어 독립 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체제에 바탕을 둔 국가를 세우겠다는 그의 비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2) 

물론 이승만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외교독립’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 ‘독립’을 위해 애썼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치열하게 대한독립을 염원했고, 대한민국을 건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그에게 ‘친일’의 오명을 씌우고, 아무 것도 안했다고 폄훼하는 것은 무례하다. 

국제정치를 알면 대한민국이 보인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국제정치에 정통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의 타고난 능력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외교독립’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김구는 세계를 보는 안목은 부족했다. 이 작은 차이가 결국, 한반도 상황을 바로 보는 안목의 차이로 나타났다. 무장투쟁, 외교독립이 해방과 건국에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분명한 것은 외교독립에 앞장섰던 이승만의 식견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승만 대통령을 폄하해서 이득 보는 세력은 反대한민국 세력밖에 없다. 그들은 이승만을 매도하며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과 농지개혁, 안보와 교육 부흥의 네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민주주의를 훼손하면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가르침까지 스스로 알려준 대한민국의 아버지다.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건국일이다. 이를 두고 논란이 많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일이 대한민국 건국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그야말로 ‘임시정부’였다. 정부의 요건인 국민, 영토, 주권 중 어느 하나 갖춰지지 않은 독립단체였고, 다른 나라로부터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진짜 정부라면 당시에 독립운동이 왜 필요했을까. 또 임시가 있다면 진짜 정부가 훗날 탄생했기 마련인데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은 김구를 높이 평가한다는 거다. 나아가 김구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남한 단독정부가 아닌 통일 국가가 세워졌을 것이라고 주장 한다.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일 뿐 오해하지 말자

우선 임시정부부터 이야기 해보자. 1980년대 이후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소상히 이루어지면서 김구와 임시정부의 역사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고 한다. 중국, 미국, 만주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은 민족주의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으로 나뉘었다. 민족주의세력도 다시 우파와 좌파로 분류된다. 3.1운동 이후 여러 갈래의 세력이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이념갈등이 심해 분열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각지에서 활동한 여러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였다. 때문에 해외 독립운동단체들을 대표할 수 없었고, 그 이유로 연합국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3)

김구가 집권했다면 통일국가가 탄생했을까

한반도 분단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나눠서 점령할 때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오랜 역사적 사건들이 누적된 결과다. 특히 공산주의 세력의 활약이 컸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두고 대립하던 1945년 9월, 소련의 스탈린은 북한 지역에 독자정권을 세우라는 지령을 내렸다.

때문에 밑도 끝도 없이 통일국가를 세우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이 못됐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믿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고, 공산주의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북한의 건국에 참여했다. 당시엔 어떤 방법이 옳은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자유민주주의에 확고했던 이승만과 달리 김구의 노선은 일관성이 없었다. 

김구는 반탁 운동을 통해 남한의 공산화를 막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 혼란을 거듭했다. 1947년 11월 남한만의 선거가 예상되자 “남한만의 선거는 국토를 양분하는 비극”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다가 이승만과 회담한 후에는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의 선거가 될지라도 그 정부는 법리상이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라며 다시 찬성한다고 말했다.4) 그러다가 또 남한만의 선거와 정부수립에 반대한다며 1948년 4월,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북한의 공산주의세력과 함께 유엔의 결의를 비판하고 미소 양국군의 철수,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한다. 김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다는 방침을 수정 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세력의 선전에 이용당한 것이다. 김구는 미소 양국군의 철수를 논했지만 북한의 뒤엔 소련이 있었다. 통일국가를 염원한 그였지만 그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김구는 공산주의 세력에게 속았다.

대한민국의 탄생

우여곡절 끝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됐다. 실망한 김구는 이미 만들어진 대한민국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못마땅해 했다. 단독정부를 원하는 세력에게 ‘민족의 박테리아’라고 비난하며 증오심도 표출한다. 미군과 소련 군인이 철수해도 남북 간의 전쟁은 없다는 틀린 예측도 했다. (이것은 훗날 김구와 중화민국 공사 류어만과의 대화록이 공개되며 ‘틀린 예측’이 아니라는 의구심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자유민주주의보다 민족이 중요했다. 때문에 민족의 분단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을 비현실적이라고 했지만 그는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옳은 길이냐 사악한 길이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당시엔 몰랐겠지만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고,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대한민국의 건국은 옳은 길이었다. 사악한 길은 공산주의를 택한 북한이지 남한이 아니다.

이승만은 어땠을까. 그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자였다. 이승만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의 힘을 믿었고 이 믿음은 평생 흔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믿지 않았다. 타협도 없었다. 김구뿐 아니라 수많은 세력이 대한민국 건국에 악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신의 한수였다.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까.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무등을 타고 입북하여 북한의 실권을 쥐고 조선노동당을 창건하면서 그는 3중 국적 및 3중 당적자가 되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정 하에서 소련군 대위 및 소련공산당 하급당원으로서 상전인 소련군과 소련공산당의 지시를 받아 북한에 소련 위성 공산국가 수립에 앞장섰던 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진은 김일성(좌)과 박헌영(우)


백범과 우남의 엇갈린 평가, 대체 왜?

김구의 일기, ‘백범일지’를 대부분 알고 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전국 초중고교 도서관에 비치된 이승만 관련 서적은 96여 권인 반면, 김구 관련 서적은 4560여 권이다. 건국대통령은 몰라도 김구에 대한 자료는 널리고 널렸다. 그렇게 편중된 교육환경에서 김구를 위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또한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김구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논할 때도 용기가 필요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승만 대통령 다시 보기

이승만 대통령을 폄하해서 이득 보는 세력은 反대한민국 세력밖에 없다. 그들은 이승만을 매도하며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말한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과 농지개혁, 안보와 교육 부흥의 네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아무리 공이 커도 민주주의를 훼손하면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가르침까지 스스로 실행하며 알려준 대한민국의 아버지다.5)

물론 어느 시대의 어떤 인물도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잘못된 것을 비판하는 것은 지당한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에 대해 공헌을 외면하고 덮어놓고 비판만 하는 것은 비겁하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우남의 단호한 국가 안보는 공산주의와 김일성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농지개혁은 국민들을 자립하게 만들었으며, 교육 부흥은 훗날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력이 됐다. 일각에선 그를 독재라고 평가하지만 이 세상 그 어떤 독재자도 그만 두란다고 스스로 그만두는 경우는 없다.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몸소 보여준 사람이다.

김구도 다시 보자

김구 역시 좌우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경하는 훌륭한 사람이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그의 행보에는 일관성이 없다. 남한 단독 정부를 전폭 지지하다가,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한다. 불과 몇 주일 사이의 일이다.

일각에선 백범일지에 묘사된 그의 모습이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도 나온다. 역사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구가 어린 나이에 동학에 참여해 독학혁명의 핵심으로 활약했다고 알고 있다. 김구 역시 그렇게 이야기 했다. 그는 백범일지에 “계사년 가을에 오응선·최유현 등이 경통을 받고 충청도 보은에 있는 해월 대도주를 방문하는 일행 열다섯 명에 자신도 선발되어 최시형을 만났고 그곳에서 접주 첩지를 받았다”고 기록했다.6) 아주 구체적이다. 하지만 『동학사상자료집』의 최유현 기록엔 최유현을 포함한 6명이 대선사를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김구(김창수)의 이름이 없다. 6명과 15명의 차이도 매우 크다. 또 김구의 업적을 꼽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국모보수’도 허구에 불과하다. 김구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고 말하며 자신의 살인행위를 정당화 했고, 그 대상이 쓰치다라는 일본 육군 중위라고 기록했다.7) 하지만 쓰치다는 일본 육군 중위가 아니다. 단지 군인이냐 상인이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다. 쓰치다의 신분이 일본인 육군 중위로 알려지게 된 것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책임이 크다고 한다. 

이렇듯 김구의 업적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재구성 된 부분이 많다. 누군가의 업적을 재구성하면서까지 위인으로 받들 필요가 있을까. 더욱이 그 인물이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건국에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면 이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한민국 성역, 김구에 대한 진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김구

해방 후 김구는 북한에 다녀왔다. 그리고 북한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는 평양에서 김일성과 함께 “외군이 철수해도 내전은 없다”는 4.30 성명을 발표한다. 그는 중화민국 공사 류어만과의 대화에서 '소련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의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하면 비약일까. 조금의 가능성도 가능성은 가능성이다.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유일한 수단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는데 그것의 철수를 논하는 건 지금 좌파들이 주장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더욱이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음에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한 그의 진심은 무엇일까. 

마치며

역사는 복잡하다.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승만과 김구도 그랬다. 한 치의 의심 없이 훌륭한 인물이라 생각했던 김구가 대한민국의 탄생에 득이 되기보단 일관성 없는 행보를 펼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힘들더라도 받아드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나쁜 사람인 줄 알았던 이승만이 훌륭한 선각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그것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생각의 틀을 깨는 자 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조우현 자유경제원 연구원


1) 대한민국 역사, 이영훈 저, 기파랑, 2013

2) 이승만 깨기, 남정욱 류석춘 편저, 백년동안, 2015

3) 대한민국 역사, 이영훈, 기파랑, 2013

4) 대한민국 역사, 이영훈, 기파랑, 2013

5) 불평사회 작별기, 남정욱, 루비박스, 2014

6) 도진순 백범일지, P.46

7) 백범일지, 김구, 엮음 어린이독서진흥회, 2004


참고문헌

대한민국 역사, 이영훈, 기파랑, 2013
이승만 깨기, 남정욱 류석춘 편저, 백년동안, 2015
김구 청문회, 김상구, 마법의책공장, 2014
“劉馭萬(유어만) 公使와 나눈 대화록-김구(金九)에게 매우 불리한 자료” 조갑제닷컴, 2014


(이 글은 지난 8월 24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청년 이승만과 김구를 말하다 -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토론회에서 조우현 자유경제원 연구원이 발표한 발제문 전문이다.)

[조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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