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지호 기자] 올해 들어 투자자들을 뜨겁게 만든 것은 몇 년째 박스권 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유가증권시장이나 코스닥 등 정규시장이 아니었다. 상장되지 않은 종목을 거래하는 장외주식시장이 투자자에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현직 검사장 최초로 구속 기소된 진경준 전 법무부 출입국관리본부장(검사장)의 ‘주식 대박’ 소식이 전해지면서 장외시장에 대한 환상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진 검사장은 지난 2005년 장외시장에서 비상장주식이었던 넥슨 주식을 4억2500만원에 사들였고 비상장 주식이 일본 증시 상장 이후 30배 넘게 뻥튀기되면서 단번에 100억대 자산가 대열에 올랐다.
무인가 투자사 설립 및 운영, 허위 주식정보 유포, 장외주식 불법거래 등의 혐의로 구속된 '청담동 주식부자' 이희진씨/사진=이희진 트위터
뒤이어 ‘청담동 주식부자’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유사투자자문사 미라클인베스트 대표 이희진씨가 방송에서 30억원대 부가티와 벤츠, 벤틀리, 롤스로이스, 람보르기니, 포르쉐 등 고급차와 호화주택을 내세워 자신의 부를 과시하면서 장외시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졌다.
결국 이씨와 동생 미래투자파트너스 대표 이희문씨는 나란히 구속되는 처치로 전락했다. 이씨는 동생 이씨가 미리 헐값에 사둔 장외주식을 투자자에 권유해 비싼 값에 되판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의 어머니인 황순자 케이론인베스트먼트 대표도 법의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 일각에서는 한국경제TV 등 철저한 검증 없이 그를 출연시킨 방송사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들과 더불어 저금리 기조까지 겹치면서 장외시장은 투자자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정확한 거래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비공식 장외시장이라고 불리는 사설 사이트에서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설 장외시장의 연간 거래규모는 6조원을 뛰어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제는 사설 장외시장의 경우 가뜩이나 정보가 취약한 개인투자자들이 ‘깜깜이 투자’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분석을 내놓고 공시 의무가 따르는 상장 주식과는 달리, 장외시장 종목은 투자자들의 기업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일 수 밖 없다. 이들은 이희진씨와 같은 유사투자자문업자나 브로커(중개인)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사설 장외시장의 거래는 보통 사이트의 게시판을 통해 이뤄진다. 거래 시스템이 안 갖춰져 있다 보니 허수(虛數) 주문, 결제 불이행, 탈세, 부당이익 취득 등이 난무한다.
이씨 역시 본인이 미리 저렴하게 사둔 주식을 증권 방송이나 SNS 등으로 추천한 뒤 주가가 오르면 매도해 대규모 차익을 거뒀다. 이 과정에서 이씨는 더블유게임즈의 공모가가 6만5000원에 정해졌음에도 이를 감추고 주당 8만원에 되파는 대범함을 보였다는 피해자의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사설 장외시장의 경우 개인 간의 거래로 이뤄지기 때문에 매수 추천자가 사기의 의도가 있거나 부당이득을 취했는지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황현일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이씨는 허위정보를 제공하고 선취득한 주식을 개인투자자에 팔아넘겨 자본시장법 제 178조의 ‘부정거래’에 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인다”면서도 “일반적으로 장외시장에서 단순히 투자를 권한 것만으로는 사기죄나 부정거래가 성립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이 측도 신고만 하면 영업이 가능한 유사투자자문업자에 대한 감독‧검사권을 갖고 있지 않아 뽀죡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유사투자자문업자는 불특정다수에 투자정보를 제공하는 업체다.
김명철 금감원 자산운용1팀장은 “금감원이 비제도권에 속하는 유사투자자문업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법적인 권한이 없다”며 “불법행위가 발견되면 검찰과 경찰 등 수사당국에 넘겨주는 정도 역할만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유사투자자문업자를 규제하면 음성화 돼 부작용이 더 크다는 정책적 판단에 따라 크게 손을 대기도 어렵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금융투자업 인가를 받지 않은 이가 투자중개업을 영위하면 5년 이하 징역이나 2억원 이하 벌금을 부과하고 있지만 이 같은 처벌 조항이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금융투자협회가 사설 거래사이트와 개인 간 매매 등으로 이뤄지는 비상장주식 거래를 양성화하기 위해 2014년 8월 개설한 K-OTC 시장은 세금 문제로 아직 사설 장외시장을 대체하기에는 미미한 수준이다. 일평균 거래대금은 7억~8억원 정도에 그치고 있다.
무엇보다 세금이 K-OTC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개인투자자는 K-OTC에서 거래에 따른 수수료(0.5%‧내년 4월부터 0.3%) 외에 양도소득세(대기업 20%, 중소기업 10%)까지 중복으로 부담해야 한다. 이에 비해 코스피·코스닥 등 정규 시장에서의 시세차익에 대한 양도소득세는 면제된다.
종목수도 139개에 그친다. K-OTC 종목은 해당 기업의 신청이 없어도 협회가 직접 매매거래대상으로 지정할 경우에도 거래가 가능하게 된다. 다만 금투협이 직접 매매거래대상으로 지정하려면 반드시 해당 기업이 앞서 공모(50인 이상의 일반인 대상 신주 발행 또는 구주 매출) 실적이 있어야 한다. K-OTC에서 코스피로 도약한 삼성SDS가 이런 경우였다.
또 우리사주 등으로 이미 소액주주가 수천명인 기업이라도 K-OTC에서 거래하면 바로 공모 실적으로 간주 돼 증권신고서 제출 의무 등이 발생한다. 이런 이유로 공모 절차를 진행하지 않은 기업은 K-OTC 진입을 꺼릴 수밖에 없다. 현대엔지니어링 등 사설 장외시장에서의 인기 종목은 K-OTC에서 거래되지 않고 있다.
결국 K-OTC 시장에서 양도세 면제와 거래종목만 확대된다면 ‘청담동 주식부자’ 사건에서와 같은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재영 금투협 K-OTC부장은 “K-OTC 139개 종목 중 양도세가 면제되는 벤쳐기업 25개의 경우 거래량과 회전율이 확연하게 높다”며 “정규 시장과 같은 양도세 면제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어 “소액주주가 일정 수 이상인 기업은 공모실적이 있는 법인으로 간주해 증권신고서 제출을 면제해 줘 부담 없이 K-OTC 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미디어펜=김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