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문제가 새삼스럽게 화제다. 정부가 불법 낙태수술에 대한 처벌을 강화키로 결정하면서 불씨를 키웠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22일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대한 기준을 담은 ‘의료법에 관한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의료인이 불법 낙태수술(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경우 현행 1개월에서 최대 12개월로 상향 조정된 자격정지 처분을 받는다. 의료계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해당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합법적 낙태를 비롯해 모든 낙태수술에 전면 보이콧하겠다는 입장이다.
한 개인 혹은 가정 단위에서 결정해야 할 아이의 출산에 대해 국가가 개입해 온 역사는 깊다. 자유와 기본권이 철저히 유린당한 세월이 길다는 뜻이다.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에 학을 떼던 중국 정부는 1978년부터 한 가정에서 한 아이만 낳을 수 있도록 강제하는 이른바 ‘계획생육정책(計劃生育政策)’을 시행했다.
이 정책으로 국가에 의해 강제 낙태를 당한 인구만 2010년까지 총 2억 7200만 명에 달한다고 기록된다. 20세기 루마니아에서는 산아 증진을 위해 콘돔 사용 등 피임과 낙태 시술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당시 공산독재정권은 실제로 이 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 전국에 도청기를 설치하는 등 민간에 대한 광범위한 검열을 실시했다.
국가가 개인으로부터 콘돔을 빼앗거나, 반대로 개인의 자궁 안에 흡입기를 꽂아 넣는 조치는 그 목적하는 바가 아무리 거국적인 그림이라고 할지라도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온 역사를 통틀어 합의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언제나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이었다.
그 옛날 단군이 세운 고조선에서 최초로 제정했다는 8조법도 소유권과 신체의 자유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남을 죽인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 △남을 때려 다치게 한 사람은 곡식으로 보상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은 그 물건의 주인집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타의, 혹은 외부의 판단으로 개인의 자유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전 인류가 공유하는 거의 유일무이한 가치이다.
소위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경제주체가 자기 소유의 돈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 주장은 ‘자기 소유의 신체’로 치환되어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신체는 돈보다 민감하고, 직접적이며, 더욱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저출산과 생명 존중이라는 거시적인 문제의 책임을 묻기엔 개인의 자궁은 너무나도 비좁고 은밀하다.
뚝심 있는 낙태반대론자들은, 공권력이 가장 사적인 공간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 개인들을 검열하는 데에 아무 죄책감 없이 찬성한다. 옛 루마니아와 중국의 공산당 정부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다.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하기 위해 행해지는 낙태 시술은, 대체로 출산과 육아를 하기 힘든 환경에서 결정된다. 미성년자 임신, 아버지의 부재, 산모의 건강, 빈곤 등 수도 없는 개인적 이유들이 출산과 육아를 포기하도록 종용한다./사진=연합뉴스
낙태반대론자들은 ‘태아’가 인간이기 때문에 함부로 생존권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나, 이에 관해서 법학계는 물론 의학계마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논쟁 중이다. 태아를 사람으로 간주하는 시점에 관하여 우리나라에서는 형법과 민법이 규정하는 원칙이 다르며, 의학계에서는 무려 12가지 이상의 학설들이 대립하고 있다.
법적으로 권리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으며, 의학적으로 인간인지 아닌지 합의조차 되지 않은 개체의 권리를 위해, 엄연히 자아가 존재하는 자연인의 권리를 국가권력이 훼손하는 것은 일종의 가치전도 현상이다. 이에 관한 자유지상주의 정치 이론가 머레이 라스바드(M. N. Rothbard)의 지적이 읽어볼 만하다.
「만약 태아를 인간과 동일한 권리를 갖는 생명체로 간주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임신한 여성이 원하지도 않는데 그 여성의 신체 내에 기생충처럼 계속 붙어 있는 것은 과연 ‘인간’의 권리인가? 여기서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은 모든 여성을 포함한 인간의 절대적 권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낙태라는 행위는 임신한 여성이 원치 않는 어떤 형태를 그녀의 몸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 M. N. Rothbard, 『For a New Liberty: The Libertarian Manifesto』, 한국문화사, 권기붕 외 역
이러한 논의 역시 태아의 법적, 의학적 지위에 관한 합의가 선결되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만약 개인이 피임이나 낙태하는 것이 ‘살인(殺人)’이라면, 자연유산은 과실치사 내지는 무과실치사로 치부되어야 한다.
낙태금지가 결코 저출산의 대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자명하다.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하기 위해 행해지는 낙태 시술은, 대체로 출산과 육아를 하기 힘든 환경에서 결정된다. 미성년자 임신, 아버지의 부재, 산모의 건강, 빈곤 등 수도 없는 개인적 이유들이 출산과 육아를 포기하도록 종용한다.
이런 상황에서 ‘강제로’ 태어난 아기는 고스란히 그 사회의 비용이 된다. 저출산이 국가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이유는 극소수의 노동인구가 다수의 비노동인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기형적인 구조 때문이다. 그러나 환영 받지 못하는 아기들은 버려지고 학대 받거나 아무렇게 방치되어, 그대로 노동인구가 추가로 먹여 살려야 할 비용이 된다.
국가의 역할은 최소가 되어 궁극적으로는 아무도 국가권력이라는 강제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개인과 개인들이 모인 집단이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원하고,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매우 건설적이고 정의로운 목표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아무리 건설적이고 정의로운 목표라 해도 그 수단이 개인의 가치를 침해한다면 그것은 행해져선 안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37조 2항은, 국가는 비록 공공복리를 위해서라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은 침해할 수 없다는 원칙을 밝히고 있다. 전체를 위해 국가가 개인의 사적인 결정권을 강제해도 된다는 것은 나치스나 전체주의 공산당 정부들이 내세웠던 당위론이다. 필자는 감히 낙태에 반대할 수도, 찬성할 수도 없다. 오직 개인만이 자신에 대한 결정권을 소유한다는 가치만을 믿을 뿐이다. 국가는 개인의 자궁에 명령할 권리가 없다. /박성은 한국대학생포럼 기획실장
[박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