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대통령 연설문 유출 논란이 벌어진 지 하루만에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사과를 통해 해명에 나서면서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배 여부가 주목된다.
최순실 씨의 사무실에서 나온 컴퓨터에 청와대 내부 문건들이 들어 있었다면 유출을 지시한 사람이나 직접 유출한 사람 모두 법률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출된 문건이 수정 단계에 있는 연설문이거나 원본파일이 아니라면 법적 처벌은 쉽지 않다.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삭제 지시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지원(e知園) 회의록 파기’ 사건에 대해 1·2심 재판부가 무죄판결을 내린 것이 이를 방증한다. 재판부는 “문제가 된 대화록 초본은 대통령기록물이 아니다”라고 판단했으며, 그런 판단 기준 가운데 ‘생산·접수의 완료’ 여부가 포함됐다. 즉 완전히 생산 과정이 끝난 대화록이 아니라 폐기되어도 될 초본이었다는 이유였다.
또 최근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에서도 법원은 “문서의 원본이 아니어서 이를 처벌할 경우 법조문 해석의 지나친 확장 또는 유추해석으로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는 입장을 내놨다.
따라서 박 대통령이 이날 직접 해명한 것처럼 “순수한 마음에서 최순실 씨에게 일부 연설문의 표현 등에서 도움을 받았다”면 더욱 처벌은 쉽지 않아 보인다.
노무현 정부에서 벌어진 이지원 회의록 파기 사건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삭제한 것으로 어차피 언론을 통해 공개될 박 대통령 연설문이 완성되기 전 측근에 유출돼 수정된 사건이 주는 무게감은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은 연설문 유출 논란과 관련해 25일 직접 대국민 사과로 입장을 밝혔다./청와대
지난 이지원 회의록 파기 사건은 2012년 8월 정문헌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NLL포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한 데서 시작됐다. 여야 공방 끝에 이듬해 7월 대통령기록관에서 열람하기로 합의했지만 회의록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자 새누리당이 검찰에 고발했다.
수사 결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삭제한 혐의로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73)과 조명균 전 통일외교안보정책 비서관(59)은 2013년 11월 불구속 기소됐다.
이후 검찰에 의해 상고된 이 사건의 최종 대법원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대법원 2부는 지난 6월9일 상고심 선고를 할 예정이었으나 사건기록에 대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선고기일을 추후 지정한다고 밝혔다.
이번 박 대통령의 연설문 유출 사건도 쟁점은 ‘작성 중 연설문을 대통령기록물로 봐야 할지’ 여부이다. 무엇보다 어차피 언론을 통해 공개될 대통령 연설문이 공무상 비밀·기밀에 해당하는 지도 판단해야 한다.
2007년 제정된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은 대통령기록물을 ‘대통령(대통령 권한 대행 및 당선인 포함)의 직무 수행과 관련해 대통령 본인이나 보좌·자문·경호기관이 생산·접수·보유하는 기록물 및 물품’으로 정의한다. 이를 무단으로 유출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최진녕 변호사는 “최종 완성되지 않은 대통령 연설문이 작성되던 도중 사인에게 유출된 경우가 대통령기록물 무단 유출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되고 있다”며 “지난 노무현 정부 때 이지원 기록물 삭제 여부에 대한 법원의 최종 판단이 없는 상태여서 이번 사건의 유무죄를 가리려면 법리 검토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대통령 측근 비리와 권력남용은 문제가 되고 사법체계 안에서 처벌해야 하지만 대통령이 연설문을 작성할 때 외부 자문을 구할 수도 있는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영작 서경대학교 석좌교수는 이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순실 씨는 박 대통령의 비선측근으로 볼 수 있다”며 “최씨가 권력남용을 했다면 문제가 되지만 대통령이 외부 자문을 구한 정도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석좌교수는 이날 박 대통령이 전반적인 ‘최순실 의혹’에 대한 해명없이 연설문에 국한해 사과한 것에 대해서도 “미르재단 의혹 등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이미 검찰수사 지시를 내렸으니 수사결과를 지켜봐야 한다”며 “그때 가서 특검도 제기할 수 있는 것이고, 지금으로서는 대통령이 재삼 말할 필요가 없다. 괜히 수사 가이드라인 주게 된다”고 평가했다.
지금 여야 할 것 없이 연설문 유출 의혹에 대해 특검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역대 대통령 친인척이 다 비리에 연루되는 사건이 발생했다”며 “그때마다 검찰이 나서서 수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측근이라서 특검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덧붙였다.
이날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이후 청와대도 “유출 경위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지 않겠나 생각한다. 좀 더 엄정히 수사해서 밝혀질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성우 홍보수석은 기자들에게 “대통령께서 이 사안이 굉장히 국민들한테 놀랍게 비춰지고 있는 것에 대해 직접 해명드린 것”이라며 “그래서 법을 위반한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 가려져야 될거라는 시각들이 있지 않나. 그런 것들은 어차피 수사를 통해서 밝혀지지 않겠나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앞서 박 대통령은 연설문 유출 사실을 시인하고 해명하는 기자회견에서 “아시다시피 선거 때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듣는다. 최순실 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은 일부 자료들에 대해 의견 물은 적은 있으나 청와대 보좌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해명했다.
박 대통령은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맘으로 한 일인데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 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