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대선 당시 여야 후보들은 경쟁적으로 순환출자 금지 공약을 내놓았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신규 순환출자만 금지’를,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기존 순환출자까지 강제 해소’를 내세워 각론 상의 이견은 있었으나 총론은 동일했다. 결국 대선에선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고, 취임 직후 그녀는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자신의 공약을 관철시킨다.
이처럼 순환출자가 법으로 금지되기까지는 순환출자에 대한 두 가지의 문제 제기가 크게 기여했다. 하나는 순환출자가 보유 지분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해 회사를 쥐고 흔드는 오너의 ‘황제 경영’에 악용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특정 계열사의 부실을 기업 집단 전체로 전이시키기 쉽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후진적’ 지배구조인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선진국형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토록 유도해야 한다는 게 소위 ‘경제 민주화’ 세력들의 주장이었다.
이들의 주장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순환출자는 계열사가 보유한 다른 계열사 지분을 오너가 자신의 지분처럼 활용할 수 있게 한다. A→B→C→D→E→A로 이어지는 출자구조 상에서 오너가 A사를 지배하게 된다면, A사가 보유한 B사 지분을 활용해 B사를 지배할 수 있고, 같은 방법으로 다시 C사를 지배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계속해 나가다 보면 오너는 A사 지분만으로 기업 집단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이를 '회사를 쥐고 흔드는 황제 경영'이라고 본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정부, 정치권이 과거에 정책적으로 순환출자를 유도해놓고, 이제와 지주회사 체제로 출자구조를 바꾸라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행태다./사진=미디어펜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순환출자 구조의 대안으로 여겨지는 지주회사 체제 하에서도 발생한다는 점이다. 지주회사 체제는 정점의 지주회사만 지배하면 그 밑의 수많은 자회사와 손자회사, 증손회사들의 경영권까지 유지할 수 있는 체제다. A→B→C→D→E로 이어지는 지주회사 체제가 A→B→C→D→E→A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와 다른 점은 A사에 대한 E사의 출자 여부뿐이다. A사를 지배하는 데에 E사를 활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지배력 측면에서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순환출자 구조가 한 계열사의 부실을 다른 계열사로 전이시킬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기본적으로 대기업 계열사의 부실은 다른 계열사로 전이될 수 없다. 대기업 계열사 간 채무 보증이 이미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우량 계열사가 부실 계열사에 대한 부당 지원에 동원될 수 있다고 하나, 아무런 출자 관계가 없는 계열사끼리도 부당 지원은 가능하다. 결국 기껏해야 지분법 평가손실 정도인데, 이는 회사의 펀더멘탈과 무관한 손실 아닌가? 게다가 지주회사 체제를 도입하더라도, 지분법 평가 손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좌파들의 논리대로라면 지주회사 체제도 도입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기업은 신사업 진출을 위한 계열사를 절대 설립해선 안 되고, 모든 사업을 사내(社內) 사업부의 형태로만 영위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한 기업이 모든 사업을 다하면 좌파들이 그리도 걱정하는 '부실 전이'의 위험이 커진다. 당장 사업 하나가 망해서 채권은행의 여신 회수가 시작된다고 가정해보자. 순환출자 구조나 지주회사 체제 하에선 해당 사업을 영위하는 계열사만 유동성 위기를 겪는다. 부도 처리를 통한 채무 변제도 쉽다. 반면 단일 기업 형태라면, 특정 사업의 부실에 따른 여신 회수로 우량 사업부까지 타격을 입게 된다. 기업 대출에 적용되는 이자율도 높아져 투자도 어려워진다.
이러한 이유들 탓에 대다수 선진국들은 법으로 특정 출자구조를 강제하지 않는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나 프랑스의 LVMH(루이비통), 독일의 도이체방크 등은 순환출자 구조는 물론, 우리나라에선 금지된 상호출자(A⇄B) 구조까지 가지고 있다. 물론 지주회사 체제를 가진 기업들이 세계적으로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당국이 순환출자 구조를 규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주회사 체제가 순환출자 구조보다 단순하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의 지분 가치는 이미 폭등한 까닭에, 현 시점에서 지주회사 설립 요건(상장 자회사 지분 20%, 비상장 자회사 지분 40% 보유)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 자금이 지분 매입에 소요된다./사진=미디어펜
게다가 우리 재벌들이 지주회사 체제를 놔두고 굳이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를 택하게 된 데에는 정부 정책의 영향이 컸던 게 사실이다. 사채동결 조치와 법인세법 개정이 있었던 1972년, 박정희 정부는 대기업들의 이익이 배당을 통해 국민 경제 전체에 퍼지게 하려는 의도로 오너들의 지분 매각을 유도하는 기업공개촉진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경영권 약화를 우려한 오너들이 지분 매각을 꺼리자, 정부는 1975년 기업공개명령제도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결국 오너들은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지분을, 그것도 ‘액면가’에 매각해야 했다.
그렇게 지분을 잃었지만 오너들은 자신들이 힘들게 일군 기업을 남에게 빼앗길 순 없었다. 경영권을 지키면서도 계열사를 늘려 나가기에 가장 적합한 출자구조는 지주회사 체제였다. 그러나 정부는 대기업의 문어발 경영을 막는다는 명분하에 1986년부터 1999년까지 지주회사 체제를 사실상 금지한다. 결국 재벌들은 순환출자 구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순환출자 구조는 IMF 외환위기 이후 한층 강화된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주요 대기업에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도록 압박했다. 하지만 외환휘기 상황에서 부채를 상환할만한 자금이 없었던 대기업들은 신주를 대거 발행하기에 이른다. 부채비율(=부채/자기자본)은 자기자본이 많아질수록 낮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 기업들의 신인도는 매우 낮았던 까닭에 많은 실권주가 발생했고, 이 물량을 계열사들이 인수하면서 순환출자 구조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처럼 과거에 정책적으로 순환출자를 유도해놓고, 이제와 지주회사 체제로 출자구조를 바꾸라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행태다. 대기업들의 지분 가치는 이미 폭등한 까닭에, 현 시점에서 지주회사 설립 요건(상장 자회사 지분 20%, 비상장 자회사 지분 40% 보유)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 자금이 지분 매입에 소요된다.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투자에 쓰여도 모자랄 계열사 자금을 출자구조 변경에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 술 더 떠 정부는 이제 지주회사 체제에 대해서까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수준의 규제를 가하고 있다. 지주회사가 자회사를 제외한 다른 계열사의 지분을 5% 이상 보유할 수 없게 한 것이나, 손자(증손)회사에 대한 여러 자(손자)회사의 공동출자를 금지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증손회사 밑으로는 아예 계열사를 늘릴 수조차 없도록 했고, 손자회사가 증손회사의 지분을 100% 보유해야 한다는 규정까지 만들었다. 어느 선진국에도 존재하지 않는 '갈라파고스 규제‘들이다. 순환출자를 애써 해소하도록 유도해놓고, 정작 지주회사 체제로 바꾸면 계열사를 만들지 말라는 식의 규제를 가하는 것은 대체 무슨 조화인가? ‘바보들의 행진’이 기업들의 목을 조르며 성장의 동맥을 틀어막고 있다. /박진우 리버럴이코노미스트 편집인
(이 글은 자유경제원 젊은함성 '박진우의 경제논단'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박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