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저물었다. 2016년은 ‘병신년’이라는 상서롭지 못한 이름으로 시작하여, 공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경제는 침체되고, 안보와 외교가 위태롭게 되었고, 정치 스캔들로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되었다. 그런데 ‘위기’란 무엇인가? ‘위기’의 사전적 정의는 ‘위험한 때나 고비’이다. 경제 위기ㆍ안보 위기ㆍ정치 위기란 경제ㆍ정치ㆍ안보가 위험에 처했다는 의미이다. 경제 위기는 국민들을 경제적 위험에 빠트려 고통을 준다.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기업이 어려워지면,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이 가중된다.
정치 위기는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오작동하여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고통을 주는 것이다. 안보 위기는 경제 위기 및 정치 위기와 밀접하게 연관을 갖는 것으로 가장 심각한 위기다. 단순히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재산을 몽땅 잃을 수도 있다. 모든 위기 가운데 가장 심각한 위기가 안보 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가장 둔하게 반응하는 것이 안보 위기다.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지만,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직접 가해지는 위협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기 가운데서도 한 해는 가고 새해는 온다. 내일도 해는 계속 떠오르고, 새날이 온다. 이럴 때일수록 희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을 ‘전략적 낙관주의’라 부를 수 있다. 철학자 포퍼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계에 대해 낙관주의자입니다. 낙관주의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오로지 낙관적인 입장에서만 우리는 적극적일 수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비관주의자가 된다면, 당신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낙관주의자로 남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계가 대단히 아름답다는 관점에서 세상을 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라고 권고한다.
어떠한 어려움에 봉착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위기의 시기를 맞이했다는 것은 우리의 문제점이 노출되었다는 것이고, 그 문제점을 수정하면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본다.
정부는 관치경제의 유혹을 뿌리치고 기업에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사진=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페이스북 공식페이지
정부에 대한 신뢰와 투명성 확보
이런 상황에서 책임 있는 정부가 할 일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정직하게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다. 정부가 투명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정책 수행에 공적인 이익이 아니라 사적인 이익이 끼어들 때 정부는 신뢰를 상실한다. 정부 정책이 공적인 이익이 아니라 특수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기업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것으로 국민들에게 각인되어 정부가 정직과 신뢰라는 도덕적 자산을 상실하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도 위기에 봉착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위기는 곧 국가의 총체적 위기와 직결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국가와 국가 권력,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신을 불러와 정치가 붕괴된다. 뿐만 아니라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사라지면 거래 비용이 증가하고, 기업에 투자하려는 사람도 줄어든다. 시장경제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산이 튼실해야 제대로 운영된다. 불신이 유발하는 경제적 비용은 경제를 넘어 사회 자체를 위기로 몰고 간다. 더구나 고위 정치인과 관료, 거대 기업에 대한 시민들의 강도 높은 불신은 나라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 불신은 정치 위기, 경제 위기, 국가 위기라는 총체적 위기를 몰고 온다.
국가라는 거대 공동체가 그 구성원인 시민들이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국가의 규모와 권력을 축소 조정함으로써 민간의 자율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국가는 관치경제의 유혹을 뿌리치고 기업에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기업이 국가 권력에 대해 자율성을 가질 때 기업가 정신이 발현되어 윤리적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 관치경제가 청산되어 기업이 국가의 보호막에서 벗어나면, 기업도 ‘법의 지배’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국가와 경제의 분리는 근대 자유주의의 핵심이며, 민주주의의 토대였다. 우리와 같이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해,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 원리’가 확산되어야 한다.
국가 공동체는 국가가 불의를 행하거나 불의를 허용할 때 공동체로서 기능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지지나 충성을 이끌어낼 수 없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공동체가 공적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 공동체가 가장 중요한 공동체이며, 시민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자부심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이지만, 국가 자체의 부정의와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무능으로 오히려 부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국가가 봉착하고 있는 문제이며, 우리 사회도 여기에 포함된다.
지난 해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주문처럼 외웠다./사진=연합뉴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와의 관계의 재정립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민주적’은 신성불가침의 언어가 되었다. ‘비민주적’이라는 말은 강한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민주적’이라는 말은 ‘과학적’이라는 말과 같은 권위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불화를 일으킬수록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은 증폭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이 요구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자유주의와 함께 근대에 재등장하였으나,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의 동반관계를 청산하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갔다. 그러나 지나친 확장으로 말미암아,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거의 의미 없는 말이 되었다. 공산주의 국가까지도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주의ㆍ사회주의ㆍ보수주의ㆍ공산주의ㆍ환경주의 등과는 다른 범주의 언어가 된 것이다. 정치 체제로서 민주정은 ‘주의’와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이런 구분 없이 사용되어 혼란스럽다.
그동안 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였다. 데비드 헬드는 자유민주주의, 보호민주주의, 발전적 민주주의, 법치적 민주주의, 경쟁적 엘리트 민주주의, 급진주의의 발전적 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우리 사회에서는 ‘촛불 민주주의’, ‘광장 민주주의’라는 말까지 생겼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주문처럼 외치고 있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민주공화국의 핵심은 ‘인민에 의한 지배의 확립’이 아니라 지배자들로부터 인민을 보호하는데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적 해석을 많을 사람들이 받아들인다면 ‘촛불 민주주의’나 ‘광장 민주주의’가 오늘날처럼 힘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의 핵심은 정부 권력이 시민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제한된 민주주의’ 또는 ‘제한된 정부’를 강조한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었듯이 경제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관계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주의 정당이 실질적 정치적 힘을 가진 나라는 없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보수당이 실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에는 자유당(Libertarian Party)이 존재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하다. 그나마 ‘경제적 자유’에 대해 약간의 우호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정당은 ‘보수당’이라 불린다. 이 보수당마저 깨어져, 가짜보수ㆍ사이비보수ㆍ진짜보수ㆍ개혁보수ㆍ따뜻한 보수 등으로 불리면서 이념적으로 혼란스러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자유주의가 우리 현실에서 정치적으로 어떤 입장을 견지할 것인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또 한 해가 저물었다. 2016년은 ‘병신년’이라는 상서롭지 못한 이름으로 시작하여, 공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사진=미디어펜
개인주의의 확산
영화 <천국에 있는 것처럼 (As it is in Heaven)>1)은 천재 마에스트로 다니엘과 고향 마을의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는 어린 시절 거친 동네 아이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홀로된 어머니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음악적 재능을 키워가지만, 어린 나이에 어머니마저 잃고 고아가 된다. 그러나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그의 음악적 재능은 꽃을 피워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다. 앞으로 8년 동안 연주 여행이 잡혀있을 정도로 그는 명성을 얻지만, 심장마비로 고통을 당한다. 그는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모든 것을 그만두고 홀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고향에 살기 위해 폐교가 된 낡은 초등학교 건물을 구입하여 생활한다. 고향 마을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교회 합창단 단장을 맡아 지휘를 하게 된다. 합창단원들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있어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가 쉽지 않다. 오합지졸인 합창단원들에게 그가 처음으로 가르친 것은 ‘너만의 음색을 발견하라(find your own voice)’는 것이었다. 원래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음악을 창조하는 것(creat music that will open a person’s heart)’이 꿈이었던 다니엘은 마을 교회 합창단을 통해 이 꿈을 실현한다.
‘이제 나를 위해 노래할 거예요’라고 다짐하는 영화의 OST인 ‘가브리엘라 송 (Gabriellas Song)’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이 노래의 가사에는 다니엘이 합창단원들에게 강조했던 노래의 기본 ‘너만의 목소리를 발견하라’에 담겨있는 개인주의 철학의 정수가 다른 표현으로 담겨 있다.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1) 2004년 제작된 스웨덴 영화,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에 개봉.
<부록>
가브리엘라 송 Gabriellas Song
이제야 알았어요 내 인생은 나의 것임을
이 세상에서의 삶은 너무 짧아요
내 소망이 날 여기로 데려왔죠
나의 부족함으로 난 모든 걸 얻었어요
이 길은 내가 선택한 길
신념을 잘 표현할 순 없지만
내게 조금만 보여줘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천국을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요
모든 순간들마다
갈망하는 것들로 채울래요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요
충분히 받았음에 감사해하며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래요
만약 잠들어 있었다면
내겐 기회조차 없었을 테죠
삶의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어요
내가 바라는 행복을 위해
솔직한 내가 되어
더 강해지고 자유로워지리
어둠에서 일어나 밝은 날을 보리
나 여기 있어요
내 인생은 오직 나의 것
그리고 내가 찾던 천국을 ……
난 꼭 찾아낼 거예요
느끼고 싶어요
내가 삶을 살아냈음을
(이 글은 지난 달 29일 마포 리버티홀에서 자유경제원 주최로 열린 ‘위기의 2016 무엇이 문제였나’ 2016 평가세미나에서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발표한 토론문 원문이다.)
[신중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