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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정치의 끝…분배 포퓰리즘이라는 절벽

2017-01-04 11:40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현실 경제의 막장이 정치의 막장을 부른다

오늘 한국의 정치현실은 ‘막장’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막장’이란 석탄을 캐는 광부들이 갱안을 채굴하며 전진할 때 몸을 낮추다 못해 엎드려서 들어가게 되는 비좁고 낮은 갱도의 마지막 끝을 말한다. 막장은 후진성을 의미하며 세계의 끝을 의미한다.

오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치도 한때는 막장정치였다. 산업혁명이 비교적 늦게 도달했던 근대의 독일은 서유럽에서 막장정치를 유감없이 보여준 후진 국가였다. 그런 독일이 법치의 모범국이 되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독일경제의 부흥 외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링컨의 미국이 노예해방을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가 의회에서 대립하는 과정, 그리고 그 경계에 있던 주들의 기회주의 역시 막장정치의 전형이었다. 링컨은 미국 대법원이 합헌으로 결정한 노예제도를 폐지하며 헌법을 둘러엎었고, 자신에 반대하는 언론사들을 폐간시켰다. 막장의 끝은 남북전쟁으로 해결되어야만 했다. 링컨은 케티즈버그에서 승리를 자축하며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치’를 민주주의로 내세우는 교활함과 뻔뻔함을 보였다. 하지만 링컨은 위대한 지도자로 미국인들에게 추앙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노예해방을 통해 미국 경제가 이전에 비해 월등하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들은 자유를 얻으면서 임노동이나 자영업으로 전환했고, 노예해방 10년차에 미국의 총생산에서 이들 자유로워진 노예출신들의 생산은 추가로 약 20%를 차지했다. 

국가와 기업은 망하려는 것이 속성

어느 나라든 정치의 막장성은 그 정치의 규범과 현실이 갈등을 빚고 있기에 발생한다.

이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국가와 기업이라는 질서체가 한번 성립하는 것으로 자연히 계속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쓰러지려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즉 기업에 경영이라는 매니지먼트가 없다면 기업은 쓰러지기 마련이고, 자연적 상태를 극복하자고 수립한 국가는 통치가 없다면 다시 자연상태로 돌아가려 한다. 

인위적으로 세운 질서는 언제나 자연상태로 돌아가려는 엔트로피를 갖는다. 정치철학자이자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국가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자연상태를 ‘주권의 예외적 상황’이라고 부르며, 공화제에서 주권의 최고 위임결정권자는 이러한 주권의 예외적 상황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헌법을 초월하는 비상적 결단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정치철학을 우리는 ‘결단주의’라고 부른다. 

링컨의 노예제 폐지는 합헌이었던 노예제가 정치적 공동체를 위협하고 국가를 자연상태로 돌아가게 하려는 예외적 상황에 대한 ‘결단’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다. 미국의 노예제라는 규범이 미국의 현실과 충돌하면서 그러한 주권의 예외적 상황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야당의 정치적 존재감이라는 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을 하게 되는 상황에서 한국 야당의 인적, 정치적 수준이 크게 퇴보할 수밖에 없었다./사진=연합뉴스



결국 정치적 막장이라 할 수 있는 사태들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지 그 나라 국민들이 수용하고 있는 규범들이 현실과 모순을 빚으면서 등장한다. 대한민국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압축성장을 하면서 현실과 규범이 지속적으로 충돌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거칠게 정리한다면 한국인의 내면에 보편적 규범으로 존재해 온 ‘아시아적 공산주의’를 자본주의 산업화라는 현실이 부단하게 깨버리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내면 풍경은 끊임없이 익숙한 것들과 이별하는 모습이었고, 새롭게 등장하는 가치나 질서에 순응하기에는 ‘개인’,'자유‘, ’법치‘라는 근대적 가치들을 이해할 수 있는 성찰력은 빈곤했다. 그러한 관습적 규약이나 코드가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던 배경에는 믿고 따를 수 있는 정치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정희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당시 야당에는 탁월한 성찰적 리더들이 없지 않았다.

비록 이승만 정권과 정적의 위치에 있었지만 신익희, 조병옥, 윤보선, 유진산, 허정, 장면, 현석호, 박순천, 이철승, 정일형 등과 같은 민주당 인사들은 지사(志士)이자 사상가의 면모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야당인사들이었으나 한국 정치사에 빛나는 스승이자 별들이었고 지성(知性)이며 양심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들이 대한민국을 사랑한 애국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한국 야당의 변질이 3金정치가 등장하면서부터라는 해석은 지지할 만한 이유들이 많다. 특히 한국에서 고질적인 지역감정의 시작은 3김정치가 원인이었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야당 정치세력의 퇴보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대를 주도했던 우파 정치세력의 헤게모니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역사적 반공의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며, 현실문제에서 가난을 탈출하는 경제적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당의 정치적 존재감이라는 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을 하게 되는 상황에서 한국 야당의 인적, 정치적 수준이 크게 퇴보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야당의 견제력에서 자유로워진 보수 여당 엘리트들의 권력남용과 방종 또한 부패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퇴보의 잔재적 관성이 80년대 종북세력들을 만나면서 야권의 주도권은 이념적으로 무장한 주사파와 노동계로 넘어갔고 제도권 정치는 제도권 밖의 힘들에 휘둘리는 상황이 한국 정치의 막장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 할 수 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던 배경에는 믿고 따를 수 있는 정치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정희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당시 야당에는 탁월한 성찰적 리더들이 없지 않았다.


경제 성장을 결단할 수 있는 힘이 정치 선진화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토크빌은 ‘한 나라의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고 했다. 이때 정부란 행정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질서로서 존재하는 국가의 전반적 기능과 기구를 의미한다. 즉 입법부와 사법부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권력의 제4부라고 일컬어지는 언론까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토크빌의 성찰은 한 국가의 제도로서 정치는 그 나라 국민이 경험적으로 축적해 온 관습과 현실의 제한 속에 놓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 한국 정치의 실패를 논한다면, 한국인이 경험적으로 축적해 온 관습적 질서의 세계관과 현실적 상황이 불일치하며 실패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현실이 기존의 규범과 충돌하는 한국의 주소는 역시 ‘저성장’이다. ‘성장신화는 끝났다’라는 말은 경제원리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장이며, 시장에 포화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듯이, 저성장의 일반화라는 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과거와 같이 경제가 다시 활력을 되찾고 양질의 일자리들이 늘어나는 것만이 한국정치의 막장을 국민의 고양된 의식과 희망을 통해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다.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보수 정치세력이 잘못 인도해 온 경제관을 버려야 한다.분배 표퓰리즘으로는 성장할 수 없으며, 성장은 오로지 자유에 의해 견인된다는 경제자유화의 혁신을 반드시 실천에 옮길 때, 비로소 막장 정치도 해소될 수 있다.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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