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50)-로마에 전수된 그리스 철학의 파노라마
플루타르코스(BC 46?~120?) 『모랄리아』
서양 문명의 성취를 온전하게 흡수하고 우리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선조들이 남긴 고전을 모두 우리말로 옮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제대로 된 번역물들이 나오고, 이를 읽고 소화하는 가운데 창조적 비판과 지혜의 전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헬라어로 쓰인 숱한 그리스 고전과 라틴어로 쓰인 로마 시대에 창작된 고전들을 중역(重譯)이 아닌 원전 번역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헬라어 원전의 플라톤 전집 43권을 우리말로 완역하지 못했다. 또 플루타르코스의 대표작 『영웅전(비교열전)』의 헬라어 원전과 『모랄리아 Ethika, Moralia』78편의 헬라어 원전 역시 아직 완역해 내지 못한 상황이다. 오래 전부터 시중에 나와 있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아쉽게도 영역본 또는 일역본을 거듭 번역한 책들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마지막 그리스인'이라 일컬어질 만큼 플라톤 철학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등 고대 그리스의 각종 철학 이론을 폭넓게 배운 석학이었다. 또한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의 극단적 이론을 탈피하여 '절충주의' 철학을 완성한 로마 전성기의 대중 철학의 기수였다.
그는 1세기 로마 제정기에 철학자, 연설가, 문필가, 델포이 신전의 사제 등 다양한 직분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 그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오늘날의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제 분야에서 해박하고 달통한 지식을 갖춘 전인적 지식인이었다. 자연히 그가 남긴 저작에 다양한 학문 영역을 넘나드는 통섭적 지식과 지혜가 담겨있음은 물론이다. 유럽의 각국에서는 이미 1500년대 중엽부터 자국어로 완역되어 널리 읽혔던 『모랄리아』가 우리나라에서는 이제서야 78편 가운데 5편의 발췌 번역이 이루어졌다. 만시지탄이지만 반갑기 그지없다.
이 책은 헬라어 원전과 라틴어 원전을 주된 텍스트로 삼아 번역된 책이다. 그동안 헬라어와 라틴어 번역에 탁월한 성취를 보여준 허승일 교수의 노고의 결실이다. 역자는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78편 가운데 교육과 윤리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를 선별해서 실었다. 따라서 이 부분적 발췌본으로 플루타르코스의 철학을 온전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의 교육론과 윤리도덕관의 일단을 살필 수는 있을 듯싶다.
먼저 '자유인의 자식은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편을 살펴보자. 이 에세이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몽테뉴의 『수상록』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로마로 건너가 그리스 철학과 제 학문을 전수하는 탁월한 교사 역할을 했다.
그러니 이 교육론에서 우리는 그가 가르치고자 했던 그리스의 교육철학과 당시 로마인들의 자녀 교육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자녀 교육은 아들 교육을 의미했다. 즉 2000년 전의 자녀 교육에서 여자아이는 제외되었던 것이다. 동양에서는 19세기까지도 여성들이 교육에서 소외되었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시대적 한계로 이해하면 될 듯싶다.
아무튼 당시 참정권을 갖는 아들을 탁월한 시민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의 중요성은 매우 컸다. 플루타르코스는 탁월한 인재로 키우기 위한 3가지 요소로 천성과 학습, 그리고 부단한 연습을 들었다. 또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선 덕성을 갖춘 최고의 교사를 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건전한 성품과 교양을 갖춘 그리스인을 추천했듯, 당시에는 그리스 출신 학자들이 명문가 자제의 가정교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플루타르코스는 플라톤 학파의 계승자답게 자유인인 아동들에게 철학교육을 제일 중요시 할 것을 요구했다. 철학은 "모든 교육의 머리이자 간판"이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실천적 삶과 명상적인 삶, 그리고 향락적인 삶으로 나누고 철학과 연관 지은 실천적 삶을 최고의 모델로 삼았다.
아이들을 구타나 가혹 행위로 교육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고대적 환경을 감안하면 매우 탁월한 관점이다. 그런 거친 교육은 노예에게나 적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유인에게는 꾸지람과 칭찬을 번갈아 가며 함으로써 사기를 북돋우고 스스로 수치스러운 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교육자들이 그대로 실천해도 될 훌륭한 교육지침이다.
'젊은이는 시가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편에서는 헬레니즘 시대에 고대 그리스 비극과 시가들이 청년들의 교육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비극과 희극, 그리고 시가들이 허구적이며 때론 비윤리적이고 잔혹한 대목들이 많아 청년들의 교육에 유해하다고 여겼었다. 이런 문학작품들은 결국 현실 세계의 모방 예술인데 신이나 영웅들의 복수극과 외설 등 나쁜 이미지들을 많이 모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극을 일종의 사기극'이라고 한 고르기아스의 말도 이런 관점과 맥이 닿는다.
시가들이 적정한 운율과 고상한 문체로 우아하게 표현될 때도 많지만, 창작된 신화의 조작이나 천박하거나 수치스럽거나 사악한 행위를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교육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무튼 플루타르코스는 청년들이 시가를 배울 때, 등장인물들이나 신들이 늘 덕이 있거나 번영하는 것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주의시키고 있다. 특히 시가를 배울 때는 시인이 선택한 주제와 언급된 내용들의 타당성을 검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악하고 불합리한 시가를 읽음으로써 받을 수 있는 악영향을 회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철학자들의 강의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편을 살펴보자. 플루타르코스는 철학 강의에서 많이 듣고 적게 말하는 연습을 할 것을 권고한다. 특히 강의자의 담론에 시샘하지 말라거나, 강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되 지나친 열광은 자제하고, 강의 내용이 잘못이 있는 곳에서는 잘못의 이유와 근원을 찾아 엄격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강의 스타일을 비판하기 보다는 담론의 주제를 중시하라고 조언한다. 강의자의 말투나 연설의 전달 방법만 중시할 것이 아니라 강의자의 삶과 행동, 그리고 공적인 행위에 주목해 보라는 것이다. 좋은 강의는 좋은 강의자 못지않게 좋은 청강자의 자세에 달려 있음을 주지시키고 있다.
탁월한 강의를 하는 강사를 위한 비법과 조언은 요즘에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의 이 작품처럼 강의를 듣는 사람의 자세와 훌륭한 청강자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제시한 글은 매우 드물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폭넓게 실시되던 연설가나 교육자들의 숱한 강의가 실효적이기 위해 수강자들에게도 일정한 조건과 수강 역량이 요구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요즘은 거의 모든 대학에서 교수의 강의를 학생들이 평가하고 이를 교수 평가에 반영한다. 그런데 정작 학생들이 수강자로서의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 수강자로서의 기초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를 점검하기 어렵다. 플루타르코스의 ‘청강론’을 읽노라면 강의자의 자질 못지않게 수강자에게 요구되는 자질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수강자들에게 주는 플루타르코스의 마지막 교훈도 새길 만하다.
"강의를 청취하는데 필요한 다른 어떤 교훈을 덧붙이자면, 그것은 이미 여기서 강의된 내용을 명심하고 우리가 배운 것에 따라 독립적 사고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지. 그래서 우리는 궤변으로 아는 체하거나 단순 지식을 얻는 데 급급하지 말고, 깊이 뿌리박힌 철학적이고 지적인 습관을 지니도록 해야 하네. 올바로 듣는 것이 올바로 사는 것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말이네."
'아첨꾼과 친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에서 플루타르코스는 우정의 탈을 쓰고 덕을 멀리하고 악을 가깝게 만드는 아첨꾼을 멀리하고 생색을 내지 않고 우아한 행동으로 도와주는 진정한 친구를 구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친구가 정도에서 벗어났을 때 엄하고 솔직한 언사로 단호하게 질책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다. 물론 플루타르코스는 친구를 질책할 때는 제삼자의 잘못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은유적으로 하고, 남들이 있는 면전에서가 아니라 둘 만의 사적인 자리에서 하라고 말한다. 상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질책하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또 '덕을 쌓는 사람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편에서는 덕 쌓기에 대한 플루타르코스의 철학관이 전개되고 있다. 그는 완벽한 현자만이 덕인(德人)이고 지혜만 있으면 덕은 자연히 생긴다는 스토아 철학의 견해에 반발하면서 누구라도 조금씩 덕 쌓기를 해나가면 현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만이 덕인이 될 수 있다는 스토아 철학의 입장을 탈피하여 악인이든 미성숙한 사람이든 덕 쌓기의 정진을 통해 덕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플루타르코스에게 덕을 쌓는 최상의 접근법은 철학을 하는 것이다. 철학의 담론에서 벌이 꿀을 만들 듯이 유익함을 얻고, 아무도 모르게 선행을 행하고, 아집과 자만에서 벗어나 이성을 추구해야 한다. 또 자신의 잘못을 질책하는 사람들의 말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덕을 다듬어나가야 한다. 또 존경하는 인물들을 닮으려고 열심히 애써야 한다. 이런 과정들이 덕이 쌓여나가는 징후다. 플루타르코스가 제시하는 덕 쌓기의 방법론은 소박하지만 매우 귀감이 되는 행위들이다. 누구나 의지를 갖고 노력한다면 이룰 수 있는 방법들이다.
플루타르코스 에세이의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다양한 문학작품의 여러 대목이나 역사 속의 사례를 들면서 흥미진진한 에세이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세이 속에 소개된 그런 내용들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현존 문헌인 경우도 일부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오래전에 소실되어 오로지 이 작품들 속에 남은 편린으로만 전해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 까닭에 과거에 멸실된 고대의 문학작품이나 각종 문헌의 공백을 상당부분 메워준다는 점에서 소중한 2차 사료의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신선한 인용 자료들을 통해 고대 작품의 일부를 맛볼 수 있다는 점도 플루타르코스 에세이가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또한 플루타르코스의 에세이는 문체도 쉽게 간결하여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어 오늘날의 수필을 읽듯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플루타르코스의 박학다식과 번뜩이는 예지와 통찰을 느낄 수 있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플루타르코스 지음, 허승일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12), 418쪽.
[박경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