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세헌기자]"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경제까지 무너지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지난 12일 피의자 신분으로 대치동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출석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 부회장은 비선실세 최순실 일가 지원과 관련한 뇌물공여 혐의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소환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창 청구 가능성이 열리면서 재계 관계자들은 이같은 우려 섞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삼성그룹의 뇌물수수 의혹 수사를 일단락하고 다음 주부터는 SK와 롯데 등 다른 대기업으로 수사를 확대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불안감은 더욱 확대되는 양상이다.
13일 재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전날 뇌물공여 등의 혐의를 받는 피의자 신분으로 특검팀에 출석해 22시간이 넘는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특검이나 검찰에 출석해 이처럼 장시간 조사를 받은 것은 처음이다.
이 부회장은 조사 과정에서 삼성의 최씨 일가 지원이 박 대통령의 강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압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지원했다며 '공갈·강요 피해자'라는 삼성 측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특검팀은 이 부회장 조사 결과를 토대로 금명간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포함한 사법처리 방안을 검토 중이다. 문제는 사정의 칼날이 이제 SK와 롯데 등 다른 대기업 총수로 확대할 조짐을 보이면서 재계의 우려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앞서 특검팀은 수사 확대를 염두에 두고 이 부회장 외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포함한 대기업 총수 여러 명을 출국금지한 상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특검 수사 대상에 오른 한 대기업 관계자는 "올해 투자, 채용 등 주요사업계획도 구체화하지 못한 상황에서 (총수가) 또 한 번 불려가 조사를 받으면 경영에 악영향이 있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여론의 비판과 반기업 정서"라고 토로했다.
이런 가운데 재계의 실질적 대표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정기 회장단 회의를 열고 조직 쇄신 방향 등을 논의하고자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재계의 시름을 더하고 있다.
전경련은 지난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회장단에 속한 주요 그룹 총수들을 대상으로 만찬을 겸한 정기 회장단회의를 진행했지만, 주요 그룹 회장들이 대부분 불참해 행사 취지를 무색케했다.
이날 회의에는 전경련 탈퇴 의사를 밝힌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구본무 LG그룹 회장 등 참석 대상인 18개 그룹 가운데 주요 그룹 총수들이 대거 참석하지 않았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만이 10대 그룹에서 유일하게 참석했다.
회장단 회의는 공식 의사결정 기구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사실상 모든 중요한 결정이 회장단 협의를 통해 이뤄졌던 만큼, 회의 참석률이 이렇게 낮았다는 것은 전경련의 쇄신 작업이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특히 이번 회장단회의에서는 2월 임기가 끝나는 허창수 회장의 후임자 문제가 거론될 것으로 보였지만 논의에 큰 진전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재계 안팎에서는 전경견이 쇄신안 마련보다 차기 회장 선임이 더 급선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쇄신안을 추진할 주체부터 정해져야 쇄신안 논의가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각에서는 그룹 총수 대신 외부의 명망 있는 인사를 영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2010년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사임 이후 7개월간 후임을 찾지 못했던 때처럼 회장직이 한동안 공석으로 남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제각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데 전경련에 신경을 쓸 겨를조차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며 그 배경을 짐작했다.
무엇보다 재계는 최근 잇단 악재에 시달리며 방향마저 잃은 대기업과 총수들의 처지에 대해 말 못할 착잡함을 드러내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특검 수사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에 연루된 총수들의 정상적인 경영활동은 당분간 힘들 것으로 보인다"며 "관련 기업들도 마음의 어느 정도 준비를 단단히 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는 "글로벌 경기침체의 장기화 속에 보호무역주의를 노골적으로 표방해온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을 앞두는 등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데, 주요 대기업 총수들이 특검으로 시간을 보내서야 되겠느냐"며 볼멘소리를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