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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파공작원의 증언]주사파와 북한의 대남공작

2017-01-28 09:20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주사파와 북한의 대남공작

내가 한국에서 생활한 지도 22년이 흘렀다. 강산이 변해도 두 번은 변했을 긴 시간이다. 그 사이 한국사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많이 변했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20여 년 동안 독재자가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바뀌었다는 것 말고는 거의 변한 것이 없다. 아니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지금도 남한을 김정은 세습독재 체제로, 우리 국민을 김정은 노예로 만들려는 대남전략 목표를 변함없이 고수하면서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대남공작을 끊임없이 전개하고 있다. 오늘 얘기하게 될 주사파에 대한 북한 대남공작조직의 포섭공작 역시 과거에는 물론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끈질기게 지속될 것이다.

1980년대 초중반 남한정세와 대남공작

대남공작은 남한을 상대로 하는 공작이기 때문에 남한내부 정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198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의 시기는 한마디로 남한에서 광주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계속해서 1987년 6월 민주화투쟁에 이르기까지 본격적으로 사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대남공작부서 입장에서 보면 전두환 대통령이 ‘폭압기구’라 불리는 검찰과 안기부, 경찰 등 공안기관 강화조치로 대남공작이 상당히 고전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대남공작은 한편으로는 기존부터 해왔던 연고선(緣故線) 공작을 계속 진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토대구축을 위주로 하는 공작전술을 구사하였다. 연고선 공작은 말 그대로 남한에 연고가 있는 월북자들을 공작원으로 선발해 훈련시킨 다음 남파해 연고자들을 포섭하는 공작이다. 대표적인 연고선 공작 성공사례가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 면장이었던 최영도라고 할 수 있다. 최영도는 월북했던 그의 조카 김송무에 의해 포섭되었다. 토대구축 공작은 남한에 연고가 없는 공작원들이 침투이후 합법적인 신분을 획득하고 장기적으로 생활하면서 대남혁명이 승리할 경우 노동당에 입당시킬만한 인물을 점찍어 놓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과제는 호적취적을 통해 ‘법적 합법’을 취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법적인 호적취적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비롯해 많은 자료들을 가져다보았다. 물론 ‘사회적 합법’이라고 해서 호적취적까지는 못하더라도 오랫동안 한 곳에서 생활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도 토대구축 공작의 일환이었다. 이와 병행하여 여러 가지 목적의 특수공작도 전개하였다.

무엇보다 청년학생들의 반정부 투쟁을 반미투쟁에로 전환시키기 위한 특수공작을 전개하였다.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공작이 바로 1983년 9월 22일에 발생한 대구미문화원폭파사건이다. 이 사건은 1982년 김현장, 문부식 등에 의해 감행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계기로 남한 내에서 고양되고 있던 반미의식과 반미투쟁을 더욱 확산 고조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북한이 남파공작원들을 침투시켜 감행한 사건이다.

또한 전두환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특수공작도 전개하였다. 북한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것이라는 판단과, ‘독재자’인 전두환 대통령만 제거하면 남한정권이 곧바로 붕괴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기로 하고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묘소 폭파 공작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88서울올림픽을 파탄시키기 위한 특수공작도 감행하였다. 1987년 11월 당시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이었던 김현희 등에 의한 KAL기 폭파사건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북한 노동당 연락부에서는 공작원들을 남파해 올림픽 주경기장이나 서울역, 김포공항 등 다중이용 시설들을 폭파해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88서울올림픽을 파탄시키겠다는 계획 하에 침투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KAL기 폭파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국제적 비난이 고조되자 김정일 지시로 공작을 중단한 바 있다.

1980년대 중반 주사파는 북한과 손을 잡는데 대해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북한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다./자료사진=연합뉴스



주사파를 알기까지

위와 같이 대남공작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고 있던 시기에 공작원으로 선발된 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1981.2~1985.5)하고 당시의 노동당 중앙위원회 연락부 1과(대남공작과)에 배치되었다.

대학졸업 당시 나는 대남침투 전술이나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남한에 대한 구체적인 표상이나 대남공작에 대해 거의 모르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내가 4년 동안 대학에서 배우고 훈련한 것은 대남침투와 관련된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한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고 남한에 들어가서는 공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얼마나 몰랐느냐 하는 것을 증명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공작원으로 임명된 초기에 나를 찾아온 연락부 부부장(차관)이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라고 질문한 적 있다. 이 질문에 나는 곧바로 “남조선에 내보내주십시오. 저는 당장이라도 남조선에 침투한다면 충분히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부부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 “그래, 남조선에 갔다 오라고 하면 갔다 올 수는 있겠지. 그런데 남조선에 갔다 오기만 해서는 뭘 하겠소? 가서 무슨 일이든 일을 해야지. 선생은 지금 공작원이지 전투원이 아니란 말이요. 공작원은 남조선에 들어가 공작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거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선생이 당에서 준 공작임무를 남조선에 들어가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를 배우고 준비해야 하오.”라며 남파공작원으로서 준비해야 할 사항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특히 김정일이 공작원들을 지도핵심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한마디로 공작원들을 중앙당 부장(장관) 또는 도당 책임비서(도지사)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고 해야 할 일이 대단히 많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단순한 생각에도 앞으로 10년 이내에는 남조선에 침투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절망감이 들 정도였다.

물론 대남공작과에 배치 받은 지 얼마 안 된 내 입장에서는 당시 남한 내에서 주사파가 생겨났는지, 운동권이 어떻게 투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도 없었고 관심을 가질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이렇게 6개월 동안 대남공작 관련 강의와 각종 훈련, 혹독한 사상검토를 거친 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1989.7) 준비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던 광복거리 건설장에 건설노동자로 투입돼 노동현장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평안남도 평성시에 있는 도시건설사업소 사로청위원장으로 배치돼 간부현실체험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들을 마치고 보니 벌써 2년이 지나 1987년 봄이 되었다.

이렇게 간부현실체험까지 마치고 초대소에 돌아와 보니 이전과는 분위기가 상당히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초대소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된 책자들이 배포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국내 운동권에 배포된 여러 가지 문건들이 편집되어 있었다. 그리고 ‘투쟁패’, ‘운동권 인물’, ‘의식화’, ‘조직화’ 등의 생소한 용어와 함께 ‘주사파’라는 새로운 표현이 등장하고, 이들을 어떻게 하면 지하당조직에 끌어들이겠느냐 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에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주사파’가 있다는 정도였을 뿐 그 실체에 대해서는 물론 구체적으로 그들을 어떻게 공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적구화’ 교육과정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대남공작원 세대교체와 적구화 교육

남한에서 주사파가 대거 등장하던 시기 북한 내부에서는 대남공작원들에 대한 세대교체와 함께 강력한 대남공작 역량이 준비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대남공작원들에 대한 세대교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대남공작원들의 세대교체는 1980년대 초반까지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이미 남파되어 활동하고 있던 공작원들을 제외하면 북한에서 훈련받던 공작원들 대부분은 북한출신들이었다. 특히 북한 노동당 연락부에서는 대남공작과에 나이도 젊고 최고의 실력과 자질을 갖춘 능력 있는 공작원들을 많이 배치하고 이들에 대한 사상교육과 훈련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함으로써 그들을 임의의 시각에 남파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시켰다.

대남공작원 대부분이 북한출신들인 것으로 인해 특별히 도입된 것이 바로 ‘적구화’ 교육과정이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국인화’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의 말과 문화를 배워 한국인과 똑같이 행동할 수 있도록 말 그대로 북한사람을 남한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이었다. 이러한 교육과정이 도입된 것은 대남공작원 대부분이 북한출신이었고, 이들 역시 일반 북한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당국으로부터 교육받은 대로 남한은 판자로 된 집과 거지들만 득실거리고 썩고 병든 사회라는 정도밖에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한의 말과 문화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에서 공작원들이 남한에 침투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신분이 노출되어 체포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관련된다. 저 역시 1987년부터 적구화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저는 서울사람으로부터 서울말을 배웠다.

물론 적구화 교육 과정에 많은 자료를 보고 또 한국사회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지만, 주사파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대남공작원들에 대한 강도 높은 훈련과 각종 공작실무 교육, 적구화 교육 등을 통해 많은 공작원들이 언제든지 남파되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되어 있었다. 당시 내가 알고 있었던 바에 의하면 언제든 남파공작 명령을 내리면 당장이라도 남한에 침투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된 대남공작원들이 약 20여명 가량 있었다. 아마도 역대 가장 막강한 역량이었다고 생각된다.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운동권 인사나 주사파라고 해서 똑같이 취급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등급을 A급, B급, C급 등으로 매겨놓고 관리했다./자료사진=연합뉴스


주사파의 등장과 공작전술 변화

주사파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의 공작은 단순한 인간관계가 형성된 여건에서 그에 대한 파악을 충분히 한 상태에서 친분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정치적 관계로 만들고 이어서 조직적 관계로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대상을 포섭하는 전술이었다. 이는 사실 공작원들이 호적취적 후 남한에 살거나 장기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경우에나 활용 가능한 전술이었다. 말하자면 단기적으로 남파된 공작원들은 구사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도입했던 전술이 앞서 언급한 장기토대구축 공작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남한 내에 주사파가 존재한다는 사실, 특히 주사파가 북한과 손을 잡는데 대해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북한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게 된 북한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은 상당히 고무되었다. 물론 당시 주사파에 대한 북한의 기본적인 인식은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매체를 통해 북한이 투쟁지침 및 방향을 제시하면 그것을 받아 그대로 수행하는 충실한 집행자, 북한 노동당이 지도해야 할 대상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사파가 실체도 없는 한국민족민주전선(약칭 한민전)을 추종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인식 하에 주사파를 포섭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는 등 대책마련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주사파를 비롯한 운동권 인사들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사파를 포섭하자면 그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한의 신문과 잡지, 방송 등을 열심히 보면서 자료를 축적하고 분석하였다. 당시 자료 수집을 위해 많이 보았던 것이 주사파 등 운동권 인사들의 이름이 나오는 청년학생운동사, 노동운동사 등 각 분야의 운동역사 관련 서적과 운동권출신들이 만들었던 월간 ‘말’과 같은 잡지였다.

한편,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운동권 인사나 주사파라고 해서 똑같이 취급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등급을 A급, B급, C급 등으로 매겨놓고 관리하면서 일정한 평가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적합한 인물들을 포섭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운동권 인사들 가운데 포섭대상 유무를 선정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해당 인물이 갖고 있는 이념적인 성향이었다. 말하자면 주체사상을 신봉하느냐 즉 주사파냐, 아니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종하느냐 하는 것인데 당연히 주사파를 포섭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두 번째로 중요한 기준은 총학생회나 비밀조직 등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였느냐 여부 즉 투쟁 및 조직 지도 능력이었다. 이는 조직이나 단체를 만들어 지도해본 경험이 있느냐, 그리고 데모를 비롯한 각종 투쟁을 주도해본 경험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준으로 삼은 것은 해당 인물이 도덕적으로 청렴하고 인성이 괜찮은 사람이냐 여부였다.

이와 함께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공작대상으로 선정된 주사파를 포섭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을 연구해 공작에 도입하였다. 당시 북한 공작지도부가 주사파 포섭을 위해 구사한 전술이 포섭대상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설득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포섭대상을 접촉해 자신이 북한 김일성ㆍ김정일의 특명을 받고 파견된 사람(특사, 당대표, 연락대표 등)이라는 것을 밝히고 북한과 협력해 변혁운동과 통일운동을 함께 하자고 설득하는 방식이었다. 기존의 전술에서 변화를 준 것이다.

북한의 주사파 공작

1) 조직화 공작

북한이 위와 같은 준비 작업을 거쳐 주사파에 대한 공작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것은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주사파에 대한 공작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주사파를 조직화하기 위한 포섭공작, 다른 하나는 비주사파는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 주사파로 만들기 위한 의식화공작이었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준비시켰던 공작원들을 본격적으로 주사파 포섭을 위한 남파공작에 투입하였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난 후 2개의 공작조를 남한에 침투시켰는데, 이들은 이선실 접선 및 대동 복귀시키기 위해 모자(母子)로 위장하고 침투했던 공작조와 남자 2명으로 구성된 공작조였다.

특히 1989년에는 단독으로 남한에 침투해 김영환을 포섭한 윤택림과 2인조로 침투해 김낙중 등을 포섭한 윤동철 공작조가 상당한 공작성과를 거두고 복귀하였다. 이 시기에는 단독으로 남한에 침투해 1주일동안 여러 지역에 무전기와 공작금 등을 무인포스트에 묻어주고 복귀한 공작원도 있었다. 그 뒤로 내가 속한 공작조가 1990년 5월 이선실 접선 및 대동 복귀, 운동권 인사 포섭 등의 임무를 받고 남파된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윤동철 공작조가 김낙중 및 민중당 창당 지도 등의 임무를 한 차례 침투하고 1991년 가을에는 민중당의 14대 총선(1992.4) 전략을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임모씨를 조장으로 하는 공작조가 남파되었다. 어떤 공작조는 5개의 간첩망을 검열하거나 새로 구축하고 복귀한 경우도 있었으며 대부분의 공작조들이 상당한 공작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위에서 얘기한 내용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 될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당시 연락부 간부들은 공작성과가 너무 커서 자부심과 자신감도 대단했고 항상 싱글벙글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포섭공작 성공으로 연락부 공작원들 가운데 공화국영웅만 12명이 배출되었고, 그 가운데 윤동철과 임모는 공화국 2중 영웅칭호를 받았다. 이와 같은 공작성공에는 1985년 부산 다대포를 통해 남한에 침투해 2년 동안 활동하다 1987년에 북한으로 복귀한 공작조의 역할이 컸다.

이와 같이 1980년대 후반~1990년 초반 사이에 주사파에 대한 북한의 포섭공작이 ‘대성공’을 거둔 것은 남한에서의 주사파 등장과 함께 북한 대남공작원들의 성공적인 세대교체 및 공작역량 강화, 공격적인 대남공작 전술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주사파 포섭을 위한 북한의 대남공작은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이는 북한 김정은 체제가 붕괴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특히 기존에 북한과 연계되어 활동하다 파괴된 간첩망에 몸담았던 잔여세력들이 다시 북한과 연계를 맺고 활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자료사진=연합뉴스


2) 의식화 공작과 5.24문헌

의식화공작도 보다 공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의식화 작업을 담당한 부서는 원래 노동당 통일전선부(통전부)이다. 그러나 연락부도 의식화공작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가장 중요한 의식화 방법은 평양방송의 ‘김일성방송대학 강의’ 프로그램을 통해 주체사상과 변혁운동 이론에 대한 선전선동을 강화함으로써 의식화 작업을 하는 동시에 투쟁지침을 하달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대남전용 라디오인 ‘통일혁명당 목소리방송(후에 구국의 소리)’을 통한 지령 하달 및 대남선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중요하게 추진했던 의식화 방식은 이념서적을 제작해 배포하는 방식이었다. 사실 1970년대 이전에는 침투요원들이 배낭에 북한원전을 넣어가지고 들어와 대학 강의실에 몰래 들어가 책상서랍에 넣어놓고 나오는 방식으로 원전보급을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주사파가 생겨나고 이념논쟁이 본격화되자 북한은 이를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식을 활용하였다.

그 가운데 선호했던 방식이 북한원전을 남한 내에서 비밀리에 출판해 배포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북한이 제3국을 통해 주체사상총서 등 북한원전을 국내로 들여보낸 후 운동권 인물들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인쇄해 운동권 내에 배포하는 방식이다.

또한 북한이 이념서적을 제작한 다음 이를 남한에 들여보내 운동권 내에 대량 확산시키도록 한 것이다. 북한이 한국의 청년학생들과 지식인들을 의식화하는 동시에 NL-PD 간의 이념논쟁을 NL의 승리로 이끌기 위해 제작했던 대표적인 서적이 “한국사회성격 논의의 재조명”(1989)이라는 책자이다. 이 책자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남파되기 전인 1989년 겨울 “한국 사회성격 논의의 재조명”을 저술한 유명한 학자들을 초빙해 특별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시는 손바닥 정도의 소책자로 출판되어 있었다. 동 책자를 저술한 학자들이 책자를 직접 가지고 와서 강의를 하는데 막상 책자의 표현이나 문장형식은 모두 한국식으로 되어 있어서 상당히 신기했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일단 북한의 저명한 학자들이 북한식 표현으로 글을 쓴 다음 그것을 남한에서 월북한 학자들이 남한식 표현이나 문장형식으로 고쳐서 출판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특강을 했던 학자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북한 사회민주당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영대이다. 김영대는 당시 ‘김영호’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는데,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엘리트로서 “한국 사회성격 논의의 재조명” 책자의 한국사회 성격 규정 및 대남혁명이론 부분을 담당했다고 언급한 바 있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북한에 있을 때 특별강의까지 받은 “한국 사회성격 논의의 재조명”을 남파된 후 서울에서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에게 책자를 전달했던 주사파 운동권 출신은 “한국 사회성격 논의의 재조명” 책자가 지하에서 돌아가고 있는데, 부수가 부족해 구하기 어렵다며 겨우 1부를 구해다 주어 기념으로 북한에 돌아갈 때 가지고 갔던 적이 있다. 나중에 북한에 들어가 간부들로부터 얘기를 들으니 “한국 사회성격 논의의 재조명”은 일본을 거쳐 남한에 들여보낸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북한에서 제작된 이념서적이 주사파의 의식화교재로 활용된 것이다.

이와 함께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에서의 NL-PD 논쟁의 중요한 산물이 바로 김정일의 5.24문헌이라는 것이다. 5.24문헌은 “주체사상의 기치를 들고 남조선혁명을 더욱 힘있게 다그칠데 대하여”(1991년 5월 24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대남사업부서 책임일꾼들 앞에서 한 연설)이라는 김정일의 비밀노작이다. 물론 나중에 5.24문헌을 구체적으로 보니 여러 가지 측면에서 김정일의 대남공작 관련 연설내용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대남공작부서에서 만들어 김정일의 결제를 받은 문건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 문헌에는 당시의 한국사회 성격에 대해 ‘식민지 반자본주의사회’라는 평가와 함께 그에 기초해 남조선혁명의 성격과 임무, 목표와 수단 및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앞부분은 “한국 사회성격 논의의 재조명” 내용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아 그것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 같았다. 5.24문헌 뒷부분에는 대남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지하당 조직과 합법적 진보정당 및 진보적 대중단체를 어떻게 구축하고 운영할 것이냐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나 이 부분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김정일의 5.24 문헌 앞부분에 서술된 내용들을 해설하는 책자 형식으로 펴낸 것이 바로 “주체의 한국사회변혁운동론”(1992) 등이다. “주체의 한국사회변혁운동론”은 처음에 “주체의 변혁운동론”으로 출판된 바 있는데 나중에 제목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석기의 RO 및 내란음모 사건 수사 당시 통진당 간부들이 “주체의 한국사회변혁운동론”을 책자 또는 파일형식으로 가지고 있다가 압수당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운동가를 위한 실전운동론”으로 표지제목을 또다시 바꾸고 내용도 일부 수정하여 운동권 내에 배포된 바 있다.

한국 NL-PD 논쟁의 중요한 산물은 김정일의 5.24문헌이었다./자료사진=연합뉴스


나가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까지 약 5년 동안 주사파에 대한 북한 공작지도부의 포섭공작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1992년 봄 김일성이 당시 주사파 포섭공작을 주도하고 있던 노동당 대남공작부서인 사회문화부 이창선부장에게 ‘너희들이 최근 4~5년간 거둔 공작성과가 과거 40여 년간 대남공작에서 거둔 성과보다 크다.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북한이 1995년을 소위 ‘통일 회년(回年)’으로 선포했던 것도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 후 북한의 대남공작이 지속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점이다. 1992년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인해 3개의 북한연계 간첩망이 동시에 파괴된 이후 구국전위(1994), 민족민주혁명당(1998), 일심회(2006), 왕재산(2011) 등 북한과 연계된 지하당조직(간첩망)들이 연이어 수사기관에 검거되어 파괴된 것이다. 2016년에는 목사 간첩사건, PC방 검거 간첩사건 등을 통해 북한과 연계된 2개의 간첩조직이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사파 포섭을 위한 북한의 대남공작은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이는 북한 김정은 체제가 붕괴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특히 기존에 북한과 연계되어 활동하다 파괴된 간첩망에 몸담았던 잔여세력들이 다시 북한과 연계를 맺고 활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아직도 우리사회 곳곳에는 북한과 연계된 간첩조직들이 적지 않게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동식 전 남파공작원


(이 글은 25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북한의 대남공작을 알면 종북이 보인다-남파공작원이 주사파와 이야기하다’ 세미나에서 김동식 전 남파공작원이 발표한 발제문 전문이다.)

[김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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