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원우 기자]"정치테마주나 인맥주가 위험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막상 경험해보니까 눈앞이 캄캄합니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조금도 예상 못했어요. 이 손해를 다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자연재해라도 당한 기분입니다."
40대 직장인 A씨는 어제 '생애 가장 긴 밤'을 보냈다. 저금리 상황이 길어지면서 조금씩 주식투자에 관심을 가진지 어느덧 7년. 말로만 듣던 '정치테마주'의 무서움을 경험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2일 오전 회사에 출근했어도 마음은 하루 종일 HTS에 가 있었다. 그러나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이 곧 바른정당에 입당할 거라 생각하고 매수했던 '반기문 테마주'는 하한가에서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반기문 불출마' 여파가 개미들을 습격했다. 모두의 허를 찌른 사퇴 타이밍에 피해자가 속출했다. 금융당국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치테마주로 단기수익을 추구하려다 역습을 당한 셈이다.
2일 증권가에 따르면, 반기문 UN 전 사무총장은 지난 1일 오후 3시 30분경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대선 불출마를 전격 선언했다. 마침 기자회견 시간이 주식시장 폐장 시간인 3시 30분이었던 터라 투자자들은 반 전 총장의 '변심'에 실시간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다음날인 2일 오전부터 반 전 총장과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분류됐던 소위 '정치테마주'들의 하한가 러시가 시작됐다. 지엔코 광림 성문전자 씨씨에스 파인디앤씨 한창 등의 종목은 9시 정각 주식거래가 시작하자마자 하한가로 직행하는 기세하한가, 이른바 '쩜하' 상태에서 이날 내내 벗어나지 못했다. 이외에도 반기문 테마주는 수십 종에 달해 이들 종목을 매수한 투자자들의 손해가 불가피해 보인다.
개미들은 물론 일부 외인과 기관들도 손해를 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1월 한 달간 그간의 상승분을 상당폭 반납한 이들 종목에 대한 매집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 약간 시들해졌던 반 전 총장의 인기는 바른정당 입당을 전후로 다시 탄력을 받을 거라는 게 증권가의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반 전 총장이 3시 10분경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바른정당 입당' 사인으로 받아들이고 테마주 막차에 탑승한 투자자도 적지 않았다. 허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용은 불출마 선언이었다. 측근들조차 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상황이 전개된 것.
불출마 직전 반 전 총장과 가장 마지막에 회동한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 역시 지난 1일 SNS에 글을 남겨 반 전 총장의 회심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반 전 총장이 불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각에도 여의도 선거사무실은 공사 중이었다. 마음이 바뀐 시점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반 전 총장은 "혼자 결정했다"고 짧게 답변했다.
대선 출마 선언 약 3주 만에 '반기문 대세론'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됐다.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이던 테마주였던 반기문 관련주들의 롤러코스터 행렬도 종언을 고할 것으로 보인다.
개미들에게 수익을 줬던 기간은 짧았지만 막대한 손실을 복구하는 시간은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한 애널리스트는 "이번 주까지는 극도의 패닉 상태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면서 "일부 과폭락 종목들도 나올 것으로 예상되지만 투자를 권유하기엔 너무 조심스러운 상황"이라며 말을 아꼈다.
금융당국 또한 심각한 표정으로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이미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9일 '정치테마주 특별조사반'을 운영하다고 발표했다. 강전 특별조사국장은 "근거 없는 루머의 확산과 '묻지마 투자' 같은 뇌동매매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정치테마주에 대한 모니터링을 지속적으로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