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53)-위선의 역사? 혹은 원망과 왜곡의 역사?
프로코피우스(500~565) 『비잔틴제국 비사』
오늘날 우리가 흔히 비잔틴 제국으로 부르는 나라만큼 역사가들로부터 많은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킨 나라도 드물다. 제국의 이름부터 당대의 정식 국명으로 불리지 못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런 결과로 볼 수 있다. 당대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로마제국’이었다. 후세의 역사가들이 로마를 수도로 한 서쪽의 로마제국과 구분 짓기 위해 동로마제국으로 불렀고, 17세기 유럽의 역사가들이 비잔틴제국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아무튼 비잔틴제국은 동서로 양분된 동쪽의 로마제국이었다. 서구 역사가들은 라틴족들이 중심이 된 서쪽의 로마를 정통으로 보고, 그리스인들이 주류를 형성한 동쪽의 로마제국을 더 열등한 제국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은 그렇게 가벼이 보아선 안 될 나라다. 서로마는 476년에 게르만 용병대장 출신의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지만, 오히려 동로마는 그 이후에도 천년 가까이 더 번성하여 1453년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될 때까지 제국이 유지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비잔틴 제국이 서로마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되지 못한 이유는 당대 역사가들의 부족에 기인한 측면도 있다. 서로마의 뿌리가 되는 공화정 시기와 제정 초기의 역사는 타키투스와 같은 탁월한 역사가가 저술한 『역사』와 『연대기』에 의해 전해졌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에 대한 당대의 역사 저술은 부족했다. 다행히 프로코피우스(500~565)가 동로마 제국의 고토 회복 및 영토 확장의 전쟁과정을 담은 『전쟁기』와 『비사(秘史)』가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흥망사』는 프로코피우스의 이런 저작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프로코피우스가 쓴 비잔틴 제국의 비밀스런 이야기는 비잔틴 제국의 어두운 면을 들춰냄으로써 부정적 편견을 만들어내는데 일정 부분 기여한 측면을 부인하기 어렵다.
프로코피우스의 『비사』는 비잔틴 제국의 최고의 업적을 남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Justinianus Ⅰ, 재위 527~565) 시대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자연스럽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Theodora, 497?~548), 그리고 휘하 장군 벨리사리우스(elisarius, 505?~565)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노라면 독자들은 십중팔구 프로코피우스가 과연 냉정한 기록자로서의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역사를 서술한 것인지 혼란스러운 느낌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 전해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치적은 화려하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후 이민족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는데 힘썼다. 그는 황제 재위 기간에 서로마 제국 멸망이후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있던 동고트족을 몰아냈다. 또 반달족이 지배하던 북아프리카를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동쪽 변경을 넘보는 사산조 페르시아 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로마법을 집대성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했다. 또 현재까지 비잔틴 최고의 건축물로 명성이 높은 성 소피아 성당을 당시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건축했다. 이 외에도 아름다운 교회와 공공 건축물을 숱하게 건설했다. 당시에 화려한 건축물들이 대대적으로 건축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제국에 축적된 부와 건축기술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프로코피우스가 황제의 이런 건축의 위업을 기려 『건축론』을 저술한 것도 단순히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아무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이러한 위대한 업적에서 느끼는 경외감을 이 책은 단박에 깬다. 프로코피우스가 이 책을 통해 황제의 추한 이면을 전달하고 있어 우리는 당혹감과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프로코피우스는 이 책을 저술하고도 황제의 보복이 두려워 당대에 출간하지 않고 은닉해 놓았다. 그 뒤로 바티칸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1623년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적으로 묘사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우선 프로코피우스가 황제의 캐릭터를 묘사한 대목을 보자. 황제는 "부정직하고, 기만적이며, 거짓되고, 위선적이며, 이중인격자에, 잔인하고, 자기 생각을 감추는 데 능하고, 기쁘거나 슬프거나 절대 울지 않고, 다만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거짓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였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황제는 "신용할 수 없는 친구이자 모략을 일삼는 그는 살인과 약탈, 불화와 도발을 좋아했고, 무엇이든 악한 일에 쉽게 끌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황제는 형언하기 어려운 악마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또 유스티니아누스는 "단순 무지한데다가 어떤 대화나 연설도 할 수 없는 촌놈에 불과"하단다. 게다가 당시 전차 경주를 둘러싸고 경쟁하던 청색파와 녹색파가 대립하며 살인과 폭력이 횡행할 때에도 시민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이를 비호한 범죄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낙인찍는다. 또 야만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하고, 로마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낭비해버림으로써 온 나라를 가난으로 몰아넣었다고 규탄한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로마의 고토 회복을 위해 리비아와 이탈리아에서 치른 전쟁 역시 그곳에 사는 인민들의 삶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비난한다. 특히 요부(妖婦) 테오도라에 빠져 그녀가 원하는 일이라면 자신에게 충성하던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어떠한 탐욕과 악행이라도 행하는 줏대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심지어 "유스티니아누스의 악행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그것을 다 적기 위해서는 영원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매춘부와 결혼할 수 있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서 테오도라와 결혼한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직후 삼촌과 공동 황제의 이름으로 로마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삼촌 유스티누스가 사망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단독 황제가 되었지만, 테오도라도 황제 못지않은 권력을 행사하면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고 폭로한다. 그 예로 남의 재산 갈취하기, 돈으로 판결을 사고팔기, 고귀한 가문의 과부를 변변찮은 사내들과 강제로 결혼시키기, 매관매직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한마디로 이 두 사람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로 묘사된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 최고의 장군으로 평가받는 벨리사리우스 역시 프로코피우스의 냉혹한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야만족을 물리친 용맹하고 지혜로운 장군의 이미지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음탕한 아내 안토니나에 농락당하는 어리석은 사내로 추락한다.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이 입양한 양아들 테오도시우스를 그녀가 유혹하여 정부(情夫)로 삼아 오랫동안 끼고 사는 것을 알면서도 처치하지 못하는 용렬한 남자로 기술된다. 또 그는 아들 포티우스가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오랫동안 감방에 갇히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었어도 아무런 보복도 하지 못하는 비겁한 아버지로 묘사되고 있다.
저자의 기술처럼 유스티니아누스는 실제로 그렇게 무지하고 비열한 악한이었을까? 또 황비 테오도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악녀였을까? 벨리사리우스는 간교한 아내와 음흉한 황비의 음모와 협잡에 놀아난 '멍청이'가 틀림없었을까?
프로코피우스의 서술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놀랍고 흥미로운 기술이 연속되지만 과장과 억측이 심하다는 느낌도 든다. 그 역시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쓴 내용을 후세 사람들이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저질러진 악행을 알게 되면 후세의 군주들이 똑같은 일탈을 감행하고자 하는 욕망이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한다며 이 역사 기록의 동기를 자못 진지하게 밝히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자신의 노파심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의 집필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 그 배경은 이렇다. 프로코피우스는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비서로 종군하면서 『전쟁사』에서 그의 활약상을 찬양했다. 자연히 이를 읽은 황제의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프로코피우스는 다시 황제의 호의를 받기 위해 황제가 제국 전역에 건설한 위대한 건축물들을 찬양하는 『건축론』를 썼던 것이다. 그가 황제의 총애를 받다가 하루아침에 신임을 잃고 냉대를 받은 것에 대한 개인적 원망 때문에 황제와 그 주변 인사들의 타락상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기술한 것은 아닌지 의심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위압에 눌려 제대로 진실을 쓸 수 없었던 그가 언젠가 후세에 그 진실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이 책을 저술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책이 담고 있는 놀라운 비사들이야말로 겉으로 포장된 위대한 역사 뒤에 숨은 역사적 진실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 또한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이 6세기 비잔틴 제국의 궁정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다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비잔틴제국 비사』, 프로코피우스 지음, 곽동훈 옮김, 들메나무(2015), 247쪽.
[박경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