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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스·히트텍…유니클로, 혁신으로 옷의 상식을 깨다

2017-02-04 11:30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송영출 광운대 경영학부 교수

일본 최고 갑부,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2016년 10월 포브스 세계부호 순위에서 일본인 1위는 야나이 다다시(146억 달러)이고 2위는 손정의(117억 달러)이다. 소프트뱅크 회장 손정의(손마사요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지만 야나이 다다시는 생소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야나이는 유니클로 상표로 유명한 의류업체 패스트리테일링(Fast Retailing; FR)의 회장이며 2009년부터 일본의 최고 갑부로 등극했다. 

2014년 알리바바의 상장으로 큰 수익을 낸 손정의 회장에게 1위 자리를 잠시 내줬다가 2015년부터 다시 1위에 올랐다. 의류는 사양 산업이 아니었다. 세계부호 1위 자리를 놓고 빌 게이츠와 다투는 아만시오 오르테가도 역시 의류업체 ZARA를 경영하고 있다. 옷을 얼마나 많이 팔았길래 저렇게 부자가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유니클로는 일본이 만든 세계적 브랜드로서 경쟁이 치열한 의류업계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세계 일류 기업으로 위상을 굳혀가고 있다. 유니클로의 2016년 8월 결산 매출은 1조7864억 엔으로 세계 의류업계에서 ZARA와 H&M에 이어 3위 수준이다. 비록 최근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지만 지난 40년간 유니클로가 위기를 극복하고 이룩한 성과는 실로 대단하다.
 
유니클로를 창업하고 아직도 현업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야나이 회장의 도전과 성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다. 유니클로는 어떻게 이런 성장을 이루었고 야나이 회장은 경영철학은 무엇일까?
 
의류업계를 바꿔라
 
◆ 브랜드
 
상품의 브랜드는 유통경로에서 누가 결정하느냐에 따라 NB(national brand; 제조업체 브랜드)와 PB(private brand; 소매업체 브랜드)로 구분한다. 산업화 초기에는 제품을 생산하는 제조업자가 주도하는 NB가 많았지만 유통업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PB 비중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통업체는 NB 상품을 구매해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의류업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가격과 품질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에 생산과 유통을 한 업체가 주도적으로 통합 관리하는 모델로 진화하고 있다.
 
유니클로 매출에서 NB 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5년 17.6%에서 점점 하락하여 2000년에 0%가 되었다. 2000년부터 유니클로는 자신들이 만든 PB 제품만 취급하게 되었으며  이는 유니클로가 제조 공장부터 판매 매장까지 모든 과정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 SPA
 
의류는 고가의 가전제품이나 저가의 잡화품과 소비특성이 전혀 다른 패션상품이다. 단돈 1만 원짜리 티셔츠일지라도 소비자의 기호, 감성, 개성 등에 부합되어야 판매가 된다. 의류업체는 유행에 즉각 대응하면서 제조와 마케팅을 전개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즉 어떤 제품보다도 '생산에 의한 소비’가 아니라 '소비를 위한 생산’이 절실한 분야이다.
 
SPA(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는 의류업계에서 한 업체가 상품기획에서부터 조달, 생산, 물류, 판매까지 모두 관리하는 수직적 통합 시스템이다. SPA 장점은 유행을 제품기획에 신속하게 반영하여, 대량주문과 엄격한 품질관리로 생산하고, 유통단계를 축소하여 고품질 의류를 저가격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기존에 의류업계에서 제조업체와 유통업체가 분리되어 운영되던 방식에 비하면 경영효율성이 높지만 그만큼 사업리스크가 크다. 그동안 세계 의류업계에서 수많은 SPA 브랜드가 명멸하였으며 지금은 ZARA, H&M, UNIQLO, GAP 등이 선두그룹를 차지하고 있다. ZARA는 제조업에서 출발하여 소매업까지 진출한 SPA이고 유니클로는 소매업에서 출발하여 제조업까지 포괄하는 SPA이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고 현상이 나타났지만 수입의류 가격은 하락하지 않았다. 야나이는 그 원인을 알아보기 위하여 1986년 홍콩을 방문하여 지오다노 설립자 지미 라이(Jimmy Lai)를 만나고 SPA 사업모델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1987년부터 시작된 SPA 전환작업은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디자인 능력은 부족하고, 중국 위탁제조업체에 대한 생산관리가 부실하여 계속 문제가 발생하였다. 유니클로의 SPA 사업모델은 10여년에 걸친 조정 끝에 2000년에 들어서서야 겨우 정착단계에 이른다.

2016년 10월 포브스 세계부호 순위에서 일본인 1위는 야나이 다다시(146억 달러)이고 2위는 손정의(117억 달러)이다. 야나이 다다시는 유니클로의 창업자이자 회장이다./사진=유니클로 로고


 
◆ 위험과 수익
 
일본 의류업계는 시대 흐름에 따라 사업모델에 변화를 보여왔다. 1960년대 백화점, 1970-80년대 양판점(GMS), 1990년대 전문점을 거쳐 2000년대부터 SPA가 주도하고 있다. SPA가 도입되기 전에 의류업계는 '부정확한 수요예측 → 과잉재고 발생 → 상품가격 상승 → 소비자 부담 증가’ 형태의 악순환 고리에 빠져 있었다. 의류업계는 주로 위탁판매 제도를 실시하고 있었다. 소매업자는 팔린 상품에 대한 값만 지불하고 남은 상품은 얼마든지 반품할 수 있다. 그러나 도매업자와 생산업자에게 전가된 재고비용은 제품원가를 상승시키고 결국 소비자가 부담하게 된다.
 
일본 의류업계는 유통합리화와 경영효율화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상품에 브랜드와 패션성을 덧입혀 고가격으로 판매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을 사용해왔다. 야나이는 기존 방식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개혁의 선봉에 나선다.
 
● 위탁판매를 이용하면 재고위험이 줄어들지만 그만큼 이익도 줄어든다.
● 유통단계가 복잡해질수록 판매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 소매업체에 가격주도권이 없으므로 탄력적인 가격설정이 불가능하다. 
● 고객, 점원, 거래처 등에서 수집한 정보를 상품개발에 이용하지 못한다. 
 
유니클로를 세계적 브랜드로
 
◆ 지방 양복가게에서 출발
 
야마구치현 우베시의 사업가 야나이 히토시는 1949년 신사복을 소매하는 '오고리상사(小郡商事)’를 설립했고 아들 야나이 다다시(柳井正)가 태어났다. 야나이 다다시는 1남 2녀 집안에서 평범하게 자랐고 1971년 와세다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종합상사에 취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아버지 뜻에 따라 유통업체(JUSCO)에 취직하여 8 개월 정도 근무했다. 퇴사 후 야나이는 도쿄에 체류하면서 미국 MBA 유학을 준비하던 중에 결혼 상대를 만났다. 부친은 결혼과 유학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고 야나이는 결혼을 선택하고 1972년 8월 고향에 돌아와서 오고리상사에 입사했다. 와세다 졸업생치고는 변변치 않은 출발이었다.
 
오고리상사는 우베시에서 제법 큰 규모였으며 위탁판매를 하지 않고 선불매입 방식을 사용했다. 당시 대부분 의류소매상이 사용하던 위탁판매 방식은 팔린 물건에 대하여만 대금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반품하는 형태이다. 오고리상사는 선불매입 방식에 따라 구매한 모든 제품에 대금을 지불하므로 재고부담의 리스크가 크지만 상품을 보다 유리한 조건을 구매를 할 수 있었고 재고는 얼마든지 할인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 결국 부친이 고집한 이러한 운영방식이 유니클로의 기본방침이 된다.
 
◆ 베이직 캐주얼을 중심으로
 
야나이는 1980년대 미국에서 GAP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고 의류도 일반 공산품처럼 부담 없는 가격으로 편안하게 쇼핑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야나이는 1984년 히로시마 후쿠로초 뒷골목에 유니클로 1호점을 개설하였고 전무에서 사장으로 승진했다. 유니클로는 셀프서비스 방식의 캐주얼 패션숍으로서 기존의 의류판매점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기존 의류업계는 고객을 연령, 성, 기호 등에 따라 세분화하여 판매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유니클로는 소비자 집단 전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아 'nonage, unisex’를 제품 콘셉트로 설정하였다. 기존 상품들이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반하여 유니클로는 베이직 캐주얼이라는 기본상품 중심으로 판매하였다. 이러한 운영방식에 대하여 부친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마찰을 자주 빚었지만 야나이는 자신을 생각을 밀어붙였다.
 
원래는 매장 이름을 'UNICLO(unique clothing warehouse)’로 정했는데 '남다른 의류를 판매하는 창고형 점포’라는 의미이다. 1988년 물품 구매를 위하여 홍콩에 사무소를 개설하게 되었는데 이때 담당자가 'C’를 'Q’로 잘못 쓰는 바람에 'UNIQLO’로 등록이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상호가 독창적이고 멋져 보여 아예 로고를 변경했다.
 
유니클로는 제품가격을 낮추기 위해 중국에서 저렴한 원자재를 수입해 옷을 제작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그러나 1980년대는 일본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거품이 크게 발생하던 시기였다. 당시 일본 소비자들의 관심은 온통 유명 브랜드에 쏠려 있었다. 그러다보니 '값은 싸지만 패션 감이 떨어지는’ 유니클로의 존재감은 미미했고 시대에 맞지 않는 사업방식으로 인하여 시장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 거품붕괴를 기회로
 
유니클로가 급성장하는 계기는 일본경제의 거품붕괴에서 왔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호황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소비심리는 최악으로 위축됐을 때 저가 정책을 펼친 유니클로가 소비자의 호응을 받았다. 야나이는 1991년 회사명을 'Fast Retailing(FR)’으로 변경했다. 이는 '빠른 소매’라는 뜻으로 고객의 요구를 빨리 파악해서 빨리 상품화하고 빨리 진열해서 판매하는 업체라는 의미이다. 패스트푸드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야나이는 옷도 햄버거나 콜라처럼 고민하지 않고 편리하게 구매하도록 하겠다는 발상을 한 것이다.
 
야나이는 1년에 30개 점포씩 개설하여 3년 후에 100개 점포가 개설되면 상장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공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한다. 그러나 1990년대는 버블이 붕괴되기 시작한 시점이어서 은행들이 확장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는데 주저하고 야나이에게도 사 업확장 보다는 안정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난관을 뚫고 야나이는 1994년 7월 히로시마 증권거래소에 상장하여 성장에 필요한 자금 130억 엔을 확보하였으며 이 자금을 바탕으로 전국적으로 점포를 개설하였다. 거품붕괴로 의류업 전체 시장규모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과정에서 유니클로는 오히려 실적을 높이는 눈부신 성과를 이룩해갔다. FR 회사는 2016년 8월 현재 전 세계에서 점포 3,160개, 직원 수 43,639명, 브랜드 7개 규모로 운영하고 있다.

유니클로를 창업하고 아직도 현업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야나이 회장의 도전과 성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다. 유니클로는 어떻게 이런 성장을 이루었고 야나이 회장은 경영철학은 무엇일까?/사진=홈플러스 제공

 
◆ 연속되는 히트상품
 
야나이는 1998년 도쿄 번화가 하라주쿠에 매장을 개설하였다. 지방의 촌뜨기 회사가 젊은이들의 패션 메카에 진출한 것이다. 이때는 아직 SPA 사업방식이 정착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비능률적이고 원가낭비적 요소가 많이 있었다. 야나이는 경영혁신을 위하여 'ABC(all better change)개혁’을 시작한다. 중국 내 위탁 제조공장을 140개에서 40개로 축소하고 상품번호를 계절별로 400여개 부여하던 것을 200개 이하로 줄였다. 영업전략도 '만든 것을 어떻게 팔까?’라는 판매지향적 관점에서 '팔릴만한 것을 어떻게 만들까?’라는 고객지향적 관점으로 바꾸었다.
 
이때 기획된 상품이 '플리스(fleece)’ 소재를 사용한 제품이다. 야나이는 돈이 없는 소비자들이 난방비를 아낄 것으로 판단해 보온용 의류를 기획했다. 플리스는 이미 등산복이나 방한복 내피에 사용되고 있던 폴리에틸렌 소재인데 이를 부드럽게 개량하여 원단으로 사용하였다. 

유니클로 플리스 제품은 1998년 200만장, 1999년 850만장, 2000년에 2600만장이 팔리면서 유니클로 성장의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기는 금세 꺼졌고 제품의 차별성이 없는 유니클로는 그저 '싸구려’ 제품이라는 이미지가 붙었다. '유니클로 입는 것이 창피하다’는 뜻의 '유니바레(ユニ+バレ)’라는 신조어까지 나돌 정도로 브랜드 가치가 추락했다.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게 만든 힘은 저가격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 품질을 혁명적으로 개선하는 데 있었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유니클로는 얼어붙은 소비심리를 파고들어 '히트텍(heat tech)’을 선보이면서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로 삼는다. 소재 개발을 중시한 야나이는 일본 최대 섬유화학업체 도레이를 직접 찾아가 소재 공동개발을 제안한다. 1만 벌이 넘는 샘플을 만들고 찢기를 반복한 결과, 인체에서 발생하는 수증기를 열에너지로 변환해 발열하는 원리를 적용한 초경량 신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히트텍이 전 세계에서 1억장 넘게 팔리면서 유니클로는 세계적 브랜드 반열에 올랐다. 유니클로는 소재를 히트텍, 에어리즘, 울트라라이트다운 등 소수의 카테고리로 단순화하는 게 경쟁력의 핵심이다. 유니클로의 한 시즌 평균 아이템 수는 400개 정도인데 이는 H&M에 비해 10분의 1 수준이다.
 
유니클로는 기존 제품의 저가 판매 전략이 한계에 부딪히면 곧 품질향상을 통해 값이 싸면서도 질이 더 좋은 신제품을 다시 만들어 소비자 요구에 부응하였다. 이러한 개선에 대하여 소비자들은 '데코클로(デコクロ)’로 호응하였다. 이는 소비자가 유니클로 옷에 자수나 레이스 등으로 장식(데코레이션)해서 개성을 연출한다는 우호적 뜻이다. 결국 소비자는 값싸고 질 좋은 것을 찾게 된다. 좋은 제품을 싸게 판매하는 것이 사업의 기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
 
◆ 가격과 품질
 
야나이는 2009년 9월 앞으로 10년간 매출을 7배로 키워 글로벌 의류업계 넘버원이 되겠다며 '2020년도 매출 5조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2016년 8월 매출은 1조 7864억 엔이어서 앞으로 4년 내에 매출 5조엔 달성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야나이는 2016년 10월에 목표를 3조 엔으로 수정하였다.
 
유니클로 매출이 둔화된 원인으로 따뜻한 겨울이 거론되지만 더 중요한 요인은 2년 연속 제품가격을 인상한 데 있었다. 유니클로는 아베 정부의 엔화 가치하락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유니클로는 원자재 가격 급등과 환율 변동 등을 이유로 2014년 추동 신상품 가격을 5% 정도 올렸고 2015년에도 10% 정도 가격을 끌어올렸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소비자들이 실망하고 급격하게 이탈했다. 소비자들은 유니클로는 '괜찮은 제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한다고 생각해왔는데 가격인상에 배신감을 느끼고 등을 돌린 것이다. 유니클로가 실적 회복을 위하여 부랴부랴 가격 인하를 실시했지만 한 번 등 돌린 고객의 마음을 되찾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기존상품의 가격 인하와 함께 신상품에 대한 기능과 디자인 등 품질 향상에 대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림. FR 지주회사 주가



  
사업이 재미있다
 
◆ 주인의식을 가져라
 
야나이는 저서 '1승9패’에서 “실패를 두려워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쁘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현명하고 능력 있는 경영자라도 언제나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하려면 실패하는 것도 당연하고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1승을 하기 위해 9패를 감수하는 것은 큰 성공을 위해 9번의 경험과 반성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저서 '성공은 하루 만에 잊어라’에서는 “작은 성공 따위는 오래 담아두지 않고 바로바로 비우는 의지가 필요하다. 성공은 성공이라 불리는 순간부터 그 의미가 퇴색한다”고 말하면서 자만에 빠지지말고 계속 노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직원들의 업무태도와 관련하여 야나이는 “헤엄칠 수 없는 놈은 물에 빠져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말을 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나중에 이 말을 “빠져 죽지 않으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야나이는 성장 밖에 모르는 냉혹한 성격이라는 세간의 혹평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야나이는 '전원(全員) 경영’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점장과 점원은 샐러리맨이 아니라 자신의 사업을 하기 위해 회사에 나온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기계발에 노력하라는 취지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경영을 지나치게 매뉴얼에 의존하는 방식이어서 직원들이 스스로 판단하거나 행동할 수 없게 만든다는 지적을 받는다. 또 경쟁업체에 비하여 매장 직원들의 노동 강도는 높고 대우는 부실하여 이직률이 높다는 문제점도 있다.  
 
◆ 누구 책임인가
 
유니클로는 2001년 가을부터 플리스 붐이 꺼지면서 매출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런 실적부진에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야나이는 사장에서 물러나 회장으로 취임하고 외부에서 영입한 40세의 젊은 다마쓰카를 사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매출이 다소 회복되었지만 영업이익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야나이는 “다마쓰카가 안정만 추구하고 조직이 대기업병에 걸렸다”고 질책하면서 2005년 9월 사장직에 다시 복귀하였다. 

이러한 행보에 대하여 야나이가 실적하락에 대한 비난을 잠시 면하기 위하여 다마쓰카를 이용했다는 비판이 많이 나왔다. 야나이는 “사장에 복귀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게 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했지만 복귀 이유로 삼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언론에서는 유니클로가 과연 '세계적 기업인가? 야나이 상점인가?’라는 회의적인 기사들이 나왔다.
 
다마쓰카가 경영을 맡고 있는 기간 동안에도 신규매장을 계속 개설하고 M&A도 실시하였으며 히트텍과 같은 신제품도 개발하여서 단순히 안정에 안주했고 개혁에 실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야나이가 추진했다가 실패한 사업이 여러 건 있었다. 2002년 채소판매업을 시작하였다가 큰 손해를 보고 철수하였고 2001년 영국에 21개의 매장을 개설하면서 공격적 경영에 나섰다가 실적부진으로 대부분 매장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패에 대하여 야나이는 “플리스가 지나치게 잘 팔려서 회사 전체가 들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유니클로는 뭘해도 성공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잡다하게 일을 추진하다 실패했다”고 과오를 인정하기도 했다. 자신에 대하여는 이렇게 관대했던 야나이가 다마스카에 대하여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댔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야나이는 매출이 세 배 이상 커지려면 기존 틀을 확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야나이는 회사가 커가면서 창업 초기의 동료들과 결별하고 외부에서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여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새로 들어왔던 인사들로 오래 있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로 교체되는 일이 수시로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단기적인 성과 향상에는 도움이 되었겠지만 장기적인 인재 양성에는 바람직하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니클로는 일본이 만든 세계적 브랜드로서 경쟁이 치열한 의류업계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세계 일류 기업으로 위상을 굳혀가고 있다. 유니클로의 2016년 8월 결산 매출은 1조7864억 엔으로 세계 의류업계에서 ZARA와 H&M에 이어 3위 수준이다./사진=유니클로


◆ 후계자가 있나
 
야나이는 67세인 2016년 현재까지 FR지주회사 회장직과 유니클로 사업부문 사장직을 유지하고 있다. 야나이가 후계자를 기르고 은퇴하는 것과 관련하여서는 수차례 번복이 있었다. 2003년에는 “60-65세 사이에 은퇴하고 그 이후에는 투자자로서 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은퇴시점이 다가오자 2009년에 “몇 년이 지나면 사장직을 다음 사람에게 물려줘야 한다. 하지만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을 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야나이는 두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에 대하여도 “아들들이 주주로서 이사회에 참석하는 것은 괜찮지만 경영을 맡길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2010년에는 “은퇴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회장직을 계속하면서 현장에서 집행하는 사람을 감독하는 경영자를 관리하는 일을 할 것이다”라고 계속 경영을 맡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결국 64세 때인 2013년 10월 '65세때 사장 은퇴' 공약을 철회했다. "글로벌화에 속도를 내는 상황에서 은퇴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야나이는 “아무리 이익을 내더라도 내가 그린 청사진대로 비즈니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는 만족할 수 없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을 파트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과 100% 일치하는 후계자를 찾는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해서도 안될 것이다. FR사는 야나이가 창업자, 대주주, 지주회사 회장, 사업회사 사장 역할을 하면서 모든 권한이 한 사람에 집중되어 있다. 한 사람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것은 유니클로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 천생 사업가
 
야나이는 2008년 9월 기업이념 'FR WAY’를 제정하였다. 선언문은 “옷을 바꾸고, 의식을 바꾸고, 세계를 바꿔나간다”로 정했고, 미션은 “정말 좋은 옷, 새로운 가치를 지닌 옷,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제공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러한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동기부여를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야나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비즈니스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지요. 비즈니스란 매일매일 성적표를 받는 것과 같아요. 매출이라든지 이익이라든지 여러 숫자들이 성적표처럼 날아오죠. 손님에게 좋은 상품을 제공하고, 손님은 기뻐하고, 게다가 돈까지 벌고 이렇게 재미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경영자를 택할 겁니다.”
 
야나이는 평소 좋아하는 글로 “기업은 고객을 위해 존재고, 직원과 함께 성장하며, 사장으로 인해 망한다”를 꼽는다. 야나이의 모든 사고가 비즈니스로 엮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옷은 패션상품이 아니라 생필품이라는 생각의 전환으로 의류업계 강자가 된 유니클로는 세계 1위를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다. 야나이의 경영방식과 언행에 대하여 찬사도 있고 비판도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야나이는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관리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난관을 돌파해가는 '모험가’이다. /송영출 광운대 경영학부 교수
 
<참고문헌>

요코다 마스오, 「유니클로 제국의 빛과 그림자」, 서울문화사, 2011.
나기노 준조, 「옷을 바꾸고 상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연암사, 2010.
김성호, 「1승9패 유니클로처럼」, 위즈덤하우스, 2010.
야나이 다다시, 「성공은 하루 만에 잊어라」, 김영사, 2009.
콘텐츠비즈니스연구회, 「유니클로 신화와 SPA 브랜드 스토리」, 미래를소유한사람들, 2010.
 

(이 글은 자유경제원 자유주의정보 '세상을 바꾼 기업가'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송영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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