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원양해운업의 시초이자 40여년간 국내 1위, 세계 7위 선사로 군림하던 한진해운이 17일 결국 파산 선고를 받으면서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한진해운은 1977년 조중훈 창업주가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선사로 세워졌다. 출범 이듬해인 1978년 중동항로를 개척한 데 이어 1979년 북미서안 항로, 1983년 북미동안항로 등을 연달아 개설하는 등 한국 컨테이너 해운업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러나 1986년에는 불황에 따른 적자 누적을 이기지 못하고 첫 경영 위기를 맞았으나 조중훈 회장이 경영 혁신과 구조조정을 통해 정상화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조중훈 회장이 2002년 11월 타계한 이후에는 셋째 아들인 조수호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섰고 해운업이 호황이던 2000년대 중반까지도 5750TEU급의 컨테이너선을 잇달아 인수하며 순항을 거듭했다.
본격적인 위기는 조수호 회장이 지병으로 별세한 2006년부터 시작됐다. 이듬해 부인인 최은영 전 회장(현 유수홀딩스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했으나 임기 내내 글로벌 해운업 불황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2008년 리먼사태 이후 지속한 글로벌 해운업 불황 속에 운임이 호황기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호황기 때 비싸게 장기 계약한 용선료로 인한 누적 손실로 회사 경영 상태는 계속 악화했다.
최 전 회장은 결국 2014년 시숙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회사 지분과 경영권을 넘기고 완전히 손을 뗐다. 하지만 부실 경영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책임을 이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율협약을 신청하겠다고 발표하기 전 한진해운 잔여 보유 주식을 모두 팔아 약 10억원의 손실을 피한 혐의로 기소돼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직후 열린 국회 청문회와 국정감사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최 전 회장은 바닥에 엎드려 사과하면서 "도의적 책임을 다하겠다"며 사재 100억원을 내놓았지만 회사를 살려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지난해 4월 25일 한진해운의 운명이 채권단에 넘어간 뒤에도 손 쓸 방법은 많지 않았다.
한진해운은 용선료 협상, 얼라이언스(해운동맹) 가입 등 채권단이 내건 자율협약 조건을 이행했으나 부족 자금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요구는 끝내 충족하지 못했다.
결국 채권단은 8월 30일 자금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고 한진해운은 이틀 뒤인 9월 1일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후 선박 가압류 등으로 영업망이 사실상 와해되고 인력과 주요 자산을 매각한 한진해운은 세계 해운시장의 장기 불황과 선사들 간 치킨게임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파산 선고를 받게 됐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 신청 후 청산 수순을 밟는 동안 이 회사뿐만 아니라 항만조업 등 관련 업종에서 대규모 실직 사태가 벌어졌다.
앞서 법정관리 시 선박이 억류돼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한 해운업의 특성상 한진해운과 협력업체의 직원 대다수는 일찌감치 일터를 떠났다.
일부는 다른 해운사에서 새 출발을 했지만, 남은 업무 때문에 회사를 끝까지 지켜야 하는 직원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 실직 상태인 이들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디어펜=김세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