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중근 의사 순국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세계적인 성악가들의 목소리로 의사의 삶과 죽음에 관해 되돌아보게 된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심장을 겨냥한 브라우닝 권총의 총구에서 7발이 발사됐다.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이토 히로부미를 노린 7발의 총탄 중 3발은 이토에게 적중하여 현장에서 사망케 했고, 나머지 4발에 의해 이토 주변에 있던 일본인 3명이 부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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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일 오전 서울 중구 남대문로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기 추모식'에서 역사음악어린이 합창단이 태극기를 흔들며 '안중근 노래'를 부르고 있다./뉴시스 |
이토는 당시 일본 추밀원의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지만, 네 차례나 일본총리를 역임한 거물정치인이었고, 을사늑약 체결 직후인 1905년 12월부터 사망하기 3개월 전인 1909년 6월까지 3년 반 동안 조선 통감을 역임했던 한반도 침략의 원흉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왜 이토를 처단했는가? 안중근 의사는 거사 4일 후인 1909년 10월30일, 일제 검찰의 신문과정에서 이토를 처단한 15가지 이유를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나 옥중에서 안중근 의사가 집필한 자전적 기록인 ‘안응칠 역사’를 정독한 독자들은 이토의 15가지 죄목 이외에 일제의 관헌들 앞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차마 발설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 2가지를 더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던 조선 말기. 왕실이나 관리, 가진 자들은 사리사욕만 챙기고 국가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장군은 그런 무리들에게 실망을 넘어 증오감을 가졌고,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으므로 내가 국가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둘째, 장군은 의병장으로서 부하들이 상관에게 복종하지 않고, 군율을 따르지 않는 것을 개탄했다. 1908년 7월 장군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포로들을 잡자, 부하들은 그들의 처형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군이 만국공법에 따라 석방하자, 불만을 품은 의병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그때 장군은 말했다.
“내가 정말 어리석구나. 저 같은 무리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꾀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랴!”
안중근 의사는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음흉한 적의 수괴를 제거한 영웅이다. 그것도 몇 만 대군이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그리고 장군은 국제법을 준수한 정의로운 지휘관, 인류애와 박애정신을 실천했던 이상주의적인 지휘관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언행일치 삶의 전형을 실천한 유별난 분이었다. 권력과 돈 있는 자들에게 큰 소리쳤고, 벼슬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으며, 나라를 구하고 동양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처자식을 굶기며 헌신하다가 가문을 위태롭게 했다.
또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국권이 회복될 때까지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이후 순국할 때까지 그리도 좋아하던 술을 단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던 진정으로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대장부였다.
안중근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와 오페라가 남북한에서 여러 편 제작됐다. 그중에서 꼭 10년 전인 2004년 9월 개봉된 영화가 있다. 바로 서세원(감독)과 유오성(주연)이 호흡을 맞춘 영화 ‘도마 안중근’(도마는 장군의 세례명 ‘Thomas’의 한글 표기)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그런 영화가 있었나?”라고 반문할 정도로 우리에게 생소하니, 그 영화의 주제가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바리톤 김동규가 부른 이 영화주제가 ‘도마 안중근’은 우리가 꼭 한 번 쯤 들어볼 만한 노래이다.
콧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 김동규는 연세대 졸업 후 이탈리아 베르디 국립음악원에 수석 입학한 수재다. 또한 그는 베르디 국제성악콩쿠르에서 1위로 입상하고, 이탈리아 라 스칼라 오디션에 한국인 최초로 합격해 라 스칼라 극장의 주역가수로 활동했던 실력파다.
김동규는 요즈음 클래식과 팝·가요 등 대중음악을 넘나들며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이고 있는데, ‘투우사의 노래’는 그의 빅 히트곡의 하나이다. ‘카르멘’의 제2막에 등장하는 ‘투우사의 노래’는 세계 성악가들의 애창곡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남성미 넘치는 음성의 소유자 김동규의 해석이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김동규의 ‘투우사의 노래’보다는 일제의 심장을 겨눈 안중근 장군의 분노, 그리고 과거를 진솔하게 반성하지 않는 일본인들에 대한 우리 민족의 경각심과 경고의 함성을 표출한 노래 ‘도마 안중근’이 더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으면 한다.
안중근 장군이 1879년 황해도 해주의 대지주 아들로 태어나던 해에 러시아에는 죽음을 2년 앞둔 40세의 저명한 민족음악가 무소르그스키(1839~1881)가 극심한 가난과 병마와 씨름하고 있었다. 러시아 서북부의 작은 마을 카레보에서 귀족이자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안중근처럼 자애로웠고, 분야를 다르지만 조국을 위해서 헌신했던 인물이다.
그가 남긴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 가곡 ‘벼룩의 노래’는 오늘날 세계무대에 자주 오른다. 그러나 안중근 장군을 그리며 꼭 들어볼만한 그의 가곡이 있다. 바로 4곡으로 구성된 연가곡집 ‘죽음의 노래와 춤’의 마지막 곡인 ‘죽음이라는 최고사령관(The Field Marshal, 러시아 원어 Полководец)’이다.
전투가 천둥처럼 사납고, 칼들은 번쩍이며, 대포가 포효하는구나. 군사들이 달리고, 군마는 울며 질주하고, 핏빛으로 물든 강물이 흐르도다. 불타는 한낮의 태양은 전투병들을 비치고, 태양이 지니 전투는 더 격렬해지는구나. 이제 전장에 달빛이 내려앉고 병사들은 한밤의 어둠속에 흩어지도다.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밤안개 속에서 신음소리 바람 타고 하늘로 향하네.
보라, 달빛이 하얀 뼈들을 비추는 저기, 군마를 타고 바로 죽음이 나타났도다! 적막 속에서 죽음은 애절한 울음소리와 기도를 듣고 있도다. 그는 자부심과 만족감에 충만해서 마치 최고사령관처럼 전쟁터를 이리저리 사열한다. 그리고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서 주변을 돌아보고 멈춰서 미소 짓는다. 그 다음 폐허가 된 전쟁터 위로 그의 운명적인 고함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투는 끝났다! 내가 모두를 이겼노라! 군사들이여, 너희 모두 내 앞에 굴복했다! 삶은 그대들을 싸우게 했지만, 나는 여러분을 화해시키노라! 시체들이여, 행군을 위해 한 줄로 서라. 내 앞을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라! 나는 내 장병들의 수를 세고 싶도다. 그리고 이 땅에 그대들의 뼈를 맡겨라. 지상에서의 고된 삶을 누린 후 흙속 안식의 잠은 달콤할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사람들은 그대들이 싸운 기억도 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 위에서 한밤의 연회를 열 것이다! 나는 축축한 대지 위에서 무섭게 춤추고, 그대들 사지가 묻힌 땅을 힘차게 밟으리라. 너무 세게 밟아 그대들 뼈는 못 움직이고, 여러분은 결코 다시 지상으로 못 나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