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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파공작원의 증언]"운동권 포섭" 지령…북한주민은 김정은의 노예

2017-03-09 10:00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김동식 前 남파간첩

남파간첩이 말하는 좌파이야기

1. 서론

내가 충남 부여 정각사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검거된 지도 22년 세월이 흘렀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사상이나 옳다고 믿어왔던 신념을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나의 경우에는 북한에서 태어나 3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워왔고, 그렇게 해서 신념으로 간직하고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실현하고자 했던 사회주의 사상을 부정하고 버리고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좌파였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좌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살았던 북한이 결코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며, 사회주의 이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은 내가 남파공작원으로서 수행했던 임무가 무엇이었고, 내가 왜 오랫동안 간직하고 지키려 했던 사상과 신념을 바꾸었는지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2. 북한의 지령과 남한에서의 활동

나는 1981.3~1995.10월 간 대남공작원으로 활동하면서 2회에 걸쳐 한국에 침투하여 공작임무를 수행하였다. 1990.5월 1차 남파 시 부여받은 임무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기존에 남파되어 활동하고 있던 이선실을 접선해 안전하게 북한까지 대동 복귀하는 것이었다.1)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운동권 인사들을 포섭(노동당에 가입)한 다음 그들을 중심으로 지하당조직을 구축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임무를 받고 조장 권중현과 함께 1990. 5월 말경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동 해안으로 침투해 같은 해 10.17일 강화도를 통해 북한으로 복귀할 때까지 약 6개월 동안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서 생활하면서 두 가지 공작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당시 나와 조장 권중현, 이선실 등은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대외협력위원장 겸 조국통일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손병선과 1980년 사북사태를 주도한 바 있는 황인오를 노동당에 가입(포섭)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북한으로 복귀할 때는 이선실과 함께 황인오도 대동해 복귀하였다.2)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나와 조장 권중현은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물론 이선실도 같은 해 12월 묘향산에서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95.9월 2차로 남파되었는데, 당시 부여받았던 임무역시 1차 침투 시와 대동소이하다. 첫 번째 임무는 이선실과 같이 기존부터 남한에 침투해 활동하고 있던 남파공작원 ‘봉화 1호’를 접선해 안전하게 대동 복귀하는 것이었다.3)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주사파 운동권인사들을 포섭해 지하당조직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임무를 받고 조원 박광남을 대동하고 1995. 9월 초 제주도로 침투하였는데, 구체적인 위치는 제주도 성산읍 온평리 해안으로 1차 침투 시와 좀 다르다. 남한에 침투한 후 서울과 광주, 안성 등을 오가며 북한에서 포섭대상으로 선정해가지고 왔던 운동권인사들인 허인회, 이인영, 우상호, 함운경, 정동년, 고은, 황광우 등 7명을 접촉해 포섭을 시도하였으나 노동당에 가입시키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10.24일 ‘봉화 1호’를 접선하기 위해 충남 부여의 작은 절인 정각사에 갔다가 거기에서 잠복하고 있던 경찰 및 국정원 수사관들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검거되었다.

이렇게 해서 15년간의 남파공작원 생활이 끝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대한민국에서 살게 된 것이다.

인민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상화작업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붓고 대를 이어 초호화생활을 일삼는 김정일-김정은 일가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집단이다./사진=연합뉴스



3. 어떻게 사회주의 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나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사상이나 신념을 버리고 마음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로는 내 가족에 대한 북한당국의 숙청, 그러한 북한정권과 공작지도부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북한이 더는 내가 신념으로 삼고 지키려고 했던 인민의 나라, 지상낙원도 아니며 사회주의는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전부터 알고 있었고 북한주민들이 처참하게 굶어죽는 현실을 보면서 신념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1) 내 가족에 대한 숙청과 북한정권에 대한 배신감

원래 북한은 남파공작원들에게 사상교육을 하면서 최악의 경우 자폭하거나 자살하라고 항상 강조한다. 사실 남파공작원들은 군인들이 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침투해야 하기 때문에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대남침투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적지 않은 공작원들이 10년 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았더라도 실제로 남파준비에 돌입하면 이제는 죽을 수도 있는 길을 가야 한다는 심적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니까 남한에 침투했다면 그 공작원은 이미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고 그것을 현장에서 검증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사상교육과 훈련을 15년 동안 받았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각오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두 번씩이나 사선을 뚫고 남한에 침투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북한정권의 요구대로 내가 죽지 못하고 잡힌 것이다.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던 중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두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내 안주머니에 있던 독약 앰풀을 꺼내 깨물고 자살했을 텐데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을 때 죽기를 각오하지 않았으면 총을 쏠 수 없다. 손을 들고 나오면 되는데도 충분히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경찰을 향해 총을 쐈다는 것은 잡힐 마음이 없고 죽기를 각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있다면 당연히 북한으로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살아있는 상태에서 총에 맞아 잡힐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결과 즉 총에 맞았는데 죽지 않고 살아서 붙잡히는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내가 그렇게 마지막까지 북한정권에 충성하다 총에 맞아 어쩔 수 없이 붙잡혔음에도 불구하고 내 부모형제 모두를 숙청했다는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히는 일이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나는 물론 그에 대해 그냥 상식적으로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동료를 통해 내가 짐작하고 있던 것을 확인하였다. 북한정권은 바로 그런 정권이다. 공작원들이 아무리 목숨을 바쳐서 충성을 했더라도 마지막에 죽지 못하고 잡히면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숙청을 하는 것이 북한이다.

나의 부친도 30여년을 노동당 간부로 활동하면서 평생을 북한정권에 충성했지만 아들이 잡히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숙청되었다. 도대체 내 부모님이 북한정권에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아들 잘 낳아서 건강하게 잘 키워서, 공부 잘 시켜서 노동당에 헌납한 게 죄인가? 노동당에서 아무도 모르게 데려다가 대남침투 및 공작과 관련한 훈련을 시키고 임무를 주어 남한에 침투시켰는데 자신들은 책임을 지지 않고 그 책임을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런 죄도 없는 부모형제에게 뒤집어씌우는 나라가 바로 북한이다.

사실 내가 검거되도록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은 북한 공작지도부인데도 말이다. 다시 말하면 현장의 의견을 듣지 않고 ‘봉화 1호’와의 접선을 강행토록 지시한 북한공작지도부 때문에 내가 총격전을 벌이게 되었고 그 결과 검거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하나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런 죄도 없는 나의 부모형제를 숙청한 것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지금 북한주민들은 아무런 자유도 없다. 그냥 김정은의 노예일 뿐이다. 그들은 생존의 자유는 물론 마음대로 죽을 자유마저 없다./사진=연합뉴스


2) 북한은 인민의 지상낙원도, 사회주의 나라도 아니다

나는 북한에서 태어나서 30여년 동안 북한당국이 가르쳐주는 내용을 티끌만큼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적어도 1993년 가을 노동당 간부로 현장체험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노동당간부를 하면서 북한이 인민의 나라, 지상낙원이 아니며 사회주의는 더더욱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김씨 일가는 인민의 수령이 아니라 인민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인 권력집단이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므로 긴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된다. 특히 인민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상화작업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붓고 그것도 모자라 대를 이어 초호화생활과 사치를 일삼고 있는 김씨 일가는 이성적으로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집단이었다.

또한 처참하게 붕괴된 북한의 경제상황을 목격하면서 도대체 말끝마다 인민의 지도자라는 김씨 일가가 인민들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북한경제는 1970년대 이후부터 붕괴되기 시작하여 이제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1993년 가을 노동당 간부 현실체험을 위해 배치된 업체가 1200여명의 종업원이 근무하는 신발제조업체였는데, 설비투자 상황을 점검해 보니 그로부터 21년 전인 1972년에 설치한 사출기를 끝으로 단 한 건의 설비투자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절반 이상의 설비가 고장 나 가동을 중지하였고 돌아가는 설비마저도 자재가 없어 신발생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 일가 동상 건립, 혁명사상 연구실 운영 등 우상화 작업에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었고, 특히 주민들은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는 마당에 사망한 김일성의 시신을 방부처리해 보관한다고 수 억 달러의 외화를 탕진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1960년대까지는 북한이 그나마 사회주의랍시고 흉내를 내려고 했던 것 같다.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는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강도가 약했으니까 말이다. 그러한 북한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김정일이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에서 일을 시작한 1960년대 중반부터 이며 후계자로 내정된 19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때부터 김정일은 김일성으로부터 후계자로 확실하게 인정받기 위해 김일성 동상과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 박물관 등을 비롯한 우상화물을 대대적으로 건설하는데 막대한 자금을 탕진하였다. 김정일의 우상화작업은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평양에 170m의 주체사상탑과 세계 최대 규모의 개선문을 건설하고 경제적으로 이득이 없는 남포갑문 건설에 수십 억 달러를 투자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모여 결국 북한경제가 붕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말끝마다 말했다. 아니 김일성이 직접 말했다. ‘인민정권은 인민들의 생활을 책임지는 호주’라고... 그리고 북한당국은 강조한다. 북한 노동당과 인민정권을 대표하는 최고지도자, 인민들에게 생명을 주고 지켜주는 이가 바로 김일성, 김정일이라고... 그러면 나라의 경제가 붕괴되고 특히 1990년대 중반 소위 ‘고난의 행군’ 시절 수십만 명의 인민들이 굶어죽을 때까지 김일성, 김정일은 호의호식하면서 과연 무엇을 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들은 책임을 지지 않고 애꿎은 노동당 농업담당비서를 총살하느냐 하는 것이다.

결국 북한이라는 나라는 인민의 나라도, 지상낙원도, 사회주의도 아니고 김씨 일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가 혈육이라도 가차 없이 제거하는 세습독재국가, 봉건왕조에 불과하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북한은 인민의 나라가 아니라 김씨 일가의 나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아이러니하게도 1년 동안 노동당 간부 현실체험을 하면서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사실은 당시 그러한 체제, 그러한 집단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려고 했다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고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여기에다 1990년대 중반 수십만 명의 주민들이 굶어죽는 모습을 보면서 신념으로 굳어지게 되면서 내가 믿어왔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마음을 바꾸었다.

3) 사회주의 이론에 세습은 없다

1990년대 초반 내가 소속되어 있던 공작부서에서는 남한 운동권 내에서 벌어지고 있던 주사파와 비주사파 간의 이념논쟁과 함께 주체사상과 수령 및 후계자론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를 놓고 상당히 많은 연구를 하고 관련 조치를 취했다.

당시 북한은 남한 운동권 내에서 주사파가 주도권을 잡도록 하기 위해 저명한 학자들을 동원해 주체사상과 변혁운동 이념 관련 서적들을 제작해 제3국을 통해 남한 운동권 내에 배포하였다. 북한이 제작해 남한 운동권 내에 배포한 대표적인 이념서적이 “한국사회성격논의의 재조명”과 “주체의 변혁운동론”이다.

이와 함께 북한 공작부서에서는 남한 운동권 인사들을 직접 포섭해야 하는 남파공작원들이 주체사상과 혁명이론을 잘 알아야 한다며 2년제 대학원 과정을 개설하고 주체사상과 혁명론, 수령론과 후계자론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나도 1991~1993년까지 2년 동안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2년간의 대학원 과정을 거치면서 남한 운동권 내에서 수령의 절대적 지위와 역할, 그리고 후계자론과 관련해 제기했던 비판이 옳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나 역시 수령이 인민대중의 뇌수이며 혁명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수령 결정론, 그리고 북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권력세습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특히 김정일이 김일성의 아들이라서 후계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정말 위대하고 특출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지도자가 된 것이라는 억지주장에 할 말을 잃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 부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바로 정치범으로 몰려 처형당하기 때문에 외부로 표현은 하지 못했다.

수령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잘못된 이론, 사회주의 이론에도 없는 권력세습을 정당화하는 억지논리 등이 사회주의 사상을 버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 스스로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김정은의 노예가 될 수 있다./사진=연합뉴스


4. 좌파사상에 빠져있는 한국청년들에게 주는 메시지

첫 번째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고 얘기하고 싶다. 특히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잘 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는 국제적으로 이미 실천을 통해 실패한 이념이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는 것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사회주의의 기초는 평등이다. 누구나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잘사는 평등한 사회가 바로 사회주의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 북한은 과연 평등한 사회인가?

북한이 그나마 사회주의를 한다고 하던 시기에도 말로는 평등사회를 외쳤지만 실제적으로 평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일성과 김정일, 현재의 김정은과 그 밑에서 일하는 간부들, 그리고 평범한 백성들이 어떻게 평등한가 생각해보라. 김씨 일가는 북한의 산 좋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마다 별장을 지어놓고 산해진미를 다 먹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이것이 ‘인민의 지도자’가 할 짓인가? 그러고도 평등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북한에는 직급별로 가는 병원도 다르다. 장관급 이상은 김씨 일가의 전용병원인 봉화진료소에 가고 차관급은 남산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그 밑의 간부들은 직급별로 의과대학병원과 같은 대형병원의 특별과에 가서 진료를 받는다. 이들 병원은 시설도 현대적이고 약도 좋은 것을 쓴다. 그러나 평범한 백성들은 아무리 가고 싶어도 봉화진료소와 남산병원 정문을 통과할 수 없고 대형병원의 진료과에 가서 치료받을 수도 없다. 이것이 평등을 외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이것이 북한의 엄연한 현실이다.

두 번째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아마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누려왔고, 그래서 자유는 여러분에게 한 순간도 마시지 않으면 죽게 되는 공기와 같은 것이니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정말 감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다. 지금 북한주민들은 아무런 자유도 없다. 그냥 김정은의 노예일 뿐이다. 그들은 생존의 자유는 물론 마음대로 죽을 자유마저 없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상과 종교, 신앙의 자유니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니 하는 자유와 관련된 명제들은 북한주민들에게 엄청난 사치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누가 선사하거나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여러분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김정은의 노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동식 前 남파간첩


1) 이선실은 1916.11. 4일 제주도의 작은 섬 가파도에서 태어났다. 광복 전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되어 있던 이선실은 광복이후 부산에서 여맹간부로 활동하다 경찰의 수배령이 떨어지자 월북해 공산당학교를 나온 후 빨치산부대에 들어가 태백산을 넘나드는 게릴라로 활동하였다. 6.25전쟁 때는 북한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서울로 내려와 여맹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전후에는 북한에서 간부로 활동하다 1960년대에 대일(對日)공작과 공작원으로 소환되었다. 그 후 이선실은 일본으로 침투해 오사카에 밀입국해 거주하고 있던 동생들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공작활동을 하였으며, 일본에 살던 전북 전주출신 재일교포 ‘신순녀’의 신분으로 세탁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다가 1980. 4월 일본에서 영주 귀국하는 형식으로 남한에 침투한 다음 내가 접선하러 오던 1990년까지 10년 동안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공작활동을 한 베테랑 남파공작원이다. 당시 이선실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이었으며 권력서열이 19위였다.

2) 황인오는 우리와 함께 북한에 갔다가 1주일 후에 동일한 루트를 통해 다시 한국에 돌아와 지하당조직인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조직해 활동하다 1992년 가을 수사당국에 구속되어 법적처벌을 받은 바 있다. 4.19세대인 손병선은 북한노동당에 가입한 후 간첩활동을 하다가 황인오와 같은 시기에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수사당국에 검거되어 법적처벌을 받았다.

3) ‘봉화 1호’는 1980년 봄 남해안을 통해 직접 침투한 남파공작원인데, 그는 6.25전쟁 시기 월북한 충북 옥천출신이다. 그는 1980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남파공작임무를 수행한 경험 많은 베테랑 공작원이었으며, 그런 관계로 1980년 노동당 제6차대회에서 노동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80년 당시 남파될 때 스님으로 위장하고 침투하였으나 6개월 만에 주민신고로 경찰에 검거되어 전향하였다.


(이 글은 7일 자유경제원 주최로 열린 ‘나는 왜 좌파사상을 버렸나 6 - 이 시대 청년에게 주는 고언 김동식 편’에서 김동식 전 남파간첩이 발표한 발제문 전문이다.)

[김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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