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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을 정의로 착각…거꾸로 가는 법치

2017-03-15 16:30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대표

평등에 동원되는 정의, 정의에 밀려나는 법치

1.

사람마다 내세우는 정의는 다 다르다. 어린 시절 만화책을 보면 “천하의 악당 놈, 정의의 칼을 받아라.” 따위의 대사가 나온다. 알고 보면 그는 단지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있을 뿐인데 태연하게 정의를 외친다. 삼국지에서 촉의 유비는 대부분 정의롭게 그려진다. 반면 조조의 행동은 대체로 야비하거나 교활하다. 유비의 한 왕실의 직계이고 조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비가 내세운 것도 정의이고 조조가 내세운 것도 정의다. 이렇게 사람마다 상황마다 정의는 정의定議가 다르다. 이유는 그것이 어떤 근거나 기준이 아니라 다만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부유浮遊하는 말言이다. 

정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떤 정의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가이다. 우리 사회에서 부와 소득의 격차가 확대되는 것을 보고 우리 사회가 더 정의롭지 않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평등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입장에서 정의를 판단하는 것이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정부가 재분배 정책을 통해 이 격차를 줄이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평등을 교정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믿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가 많은 사회에서는 부와 소득의 평등한 분배를 정의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지선주의자들은 소득 재분배를 위해 정부가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것은 개인의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의에는 감성적 정의가 있고 이성적 정의가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 둘의 조화가 쉽지 않다. 이 경우 정의는 감성으로 쏠리기 십상이다. 이성은 정밀하게 판단하고 스스로를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하지만 감성은 희로애락이라는 본능적인 감정에만 충실해도 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마음 가는대로가 감성적 정의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있다. 둘이 어떤 문제로 분쟁을 벌이면 대부분 가난한 사람의 주장을 좀 더 관심 있게 들어주게 된다. 우리 안의 오래된 언더도그마다. 논리적으로, 정황상 부자가 옳아도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있는 놈들이 더 해.” 혹은 “돈도 있으면서.” 돈의 많고 적음과 시비를 가리는 일은 별개인데도 사안은 그냥 뭉뚱그려진다.

문제는 이 정의가 사회현상을 설명하거나 어떤 사안에 판정을 내릴 때다. 분명히 이성적인 정의라는 기준으로 판단을 해야 하는데 이때도 감성이 앞서게 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철거민들이 무단으로 건물을 점거하고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현수막을 내 건 뒤 현장에 소품으로 불쌍한 표정 잘 짓는 아이 하나 둘 정도를 세워두면 게임은 거의 끝이다. 정당한 법 집행이라도 설 자리가 없다. 동정표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권력의 사사화(私事化)를 엄단하고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공공부분’과 권력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사진=연합뉴스



2.

이 정의가 가장 많이 동원되는 것이 평등이다. 이성은 빠져있고 있는 것은 다만 주장하는 개인의 세계관뿐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결국 정치의 문제다. 자신이 가진 세계관을 관철시키기 위한 싸움이 정치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거의 동일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평등한 존재다.  태어난 곳이 다르고 가지고 나온 머리가 다르고 체력이 다르다.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게 살아간다. 그렇다고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불만이 있다. 이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평등이라는 단어다. 당연히 유리한 조건을 가진 사람보다 불리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 더 많다. 이들은 이 평등이라는 단어(이 역시 떠돌아다니기는 마찬가지의 말이다)를 위해 정의라는 세계관을 가져다 붙인다.

모든 인간의 삶은 소중하기 때문에 하면서 휴머니즘이 동원된다. 그리고 자주 잊는다. 만인은 다만 법 앞에 평등할 뿐이라는 사실을. 법 앞의 평등은 인간의 이기심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양보다. 그러나 주관적인 것은 절대 아니다. 법 앞의 평등은 차별받지 않을 권리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것처럼 돈이 있다고 차별받지 않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는 법치라는 테두리 안에서 대접받고 다루어져야 한다. 그런데도 자꾸 개인적인 세계관이 이성적 법치를 밀고 들어온다. 감성적 정의가 근거는 없는 대신 정서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세계관이 이성을 타고 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불평등의 해소는 또 다른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3. 

공정이나 정의에 대한 논의는 철학적으로 복잡하다. 또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공정하고 정의로운 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은 대체로 사람들의 주관적인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사회는 불공정하다”거나 “우리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와 같은 표현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불공정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심리적 사실’과 ‘객관적 사실’은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기 때문에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불공정한 것’과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명백하게 구별된다. 공정성에 대한 기준을 높이 잡으면 높이 잡을수록 불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은 많아진다. 

역시 주관적인 세계관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라는 사실은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다.”라는 단정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정의롭지 안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순식간에 정의롭지 못한 사회로 확정된다. 공정성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그것 역시 법치다. 법이라고 하면 차갑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법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최소한의 도덕이다.

혹은 최소한의 상식이다. 그래서 자신의 세계관을 부당하게 관철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게 부당한 법의 제정이다. 법으로 만들어놨으니까 따르라는 폭력이다. 이 부당한 법은 보통 감성적 정의관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법치가 아니다. 감성적 정의를 다수의 이름으로 법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공정이나 정의에 대한 논의는 철학적으로 복잡하다. 또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공정하고 정의로운 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사진=미디어펜


4. 

법정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기대하던 판결이 나오자 “정의가 승리했다.”며 환호하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정의가 승리한 게 아니다. 법치가 작동했을 뿐이다. 정의는 그들이 가졌던 기대치의 다른 말일 뿐이다. 한동안 우리가 앓던 의리 병도 그렇다. 사전적 정의는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감성적 정의의 부산물이다. 그러다보니 ‘정의로운 의리’라는 식으로 토톨로지 수식어가 붙는다. 역시 세계관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권력의 사사화(私事化)를 엄단하고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공공부분’과 권력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법치는 법을 늘이는 게 아니라 줄이는 게 포인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다.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대표


(이 글은 자유경제원이 15일 주최한 ‘생각의 틀 깨기 연속세미나 제19차 - 내가 하면 정의, 남이 하면 부정? 정의를 정의하자’에서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대표가 발표한 토론문 전문이다.)

[남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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