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6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만 7561달러다. 우리 돈으로 3000만 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심정적으로 힘겨운 것은 11년 째 3만 달러의 고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이긴 하는데 도달하지 못하는 신기루인 셈이다. 2015년에 비해 한 해 동안 고작 390달러 더 버는데 그쳤다는 것도 씁쓸하다.
한국은행의 자료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IMF의 2015년 세계 각국 GNI 집계에 따르면 룩셈부르크가 10만 1994달러로 1위였다. 그 뒤를 이어 스위스(8만 675 달러), 카타르(7만 6576 달러), 노르웨이(7만 4822 달러), 미국(5만 5805 달러)이 2위~5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싱가포르와 덴마크, 아일랜드와 호주, 아이슬란드가 5만 달러 이상으로 10위까지 이름을 올렸다.
스웨덴이 5만 달러에 채 못 미치며 11위에 오른 가운데 당시 한국은 29위에 이름이 있었다. 상위 30개국 중 유럽의 17개국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역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대륙이 유럽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돈을 쓰는 방식에 있어서 유럽은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 '진짜' 잘 사는 북유럽 국가는 물론이거니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또한 진짜' 잘 사는 베네룩스 3국, 그리고 독일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그래도' 잘 사는 유럽 국가의 국민들 사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게 바로 '명품'이라고 불리는 고가의 패션 브랜드다.
프랑스 최대 백화점이면서 프랑스 패션의 상징이기도 한 라파예트 백화점에 대해 파리 시민들은 '중국인에게 점령당했다'고 얘기한다. 식료품 매장이나 생활용품 매장이 아닌 화장품이나 의류, 잡화 매장들은 중국인들로 넘쳐난다.
세계 명품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GNI 3만 7000 달러의 프랑스와 3만 달러에 육박하는 이탈리아. 언뜻 생각하면 어지간한 그곳 사람들은 샤넬이니 에르메스, 알마니나 구찌 같은 명품으로 치장을 하고 다닐 것 같다. 실제 파리와 로마에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거리가 상젤리제 주변과 콘도티라는 것은 그런 생각의 반증이다.
하지만 거기 가보면 의외로 그 나라 사람들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곳의 주 고객은 중국과 한국의 관광객들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주요 도시들의 대표 세일 기간이 7월과 8월이라는 것도 그 증거다. 그 기간 파리와 로마는 물론 런던이나 밀라노, 마드리드 같은 곳은 휴가로 인해 자국민들이 자취를 감춘다고 할 정도다. 그 자리를 외국의 관광객들이 채우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백화점으로 통하는 프랑스 파리의 라파예트 백화점은 1년 내내 중국의 쇼핑객들이 점령한다. 그 와중에 간간히 눈에 띄는 것이 한국의 쇼핑객들이다. 모든 명품 매장의 직원들은 중국말 몇 마디쯤은 다 한다. 중국말을 못알아 듣는 아시안에게는 한국말로 인사를 할 지경이다.
스웨덴에서 가장 비싼 물건들이 판매되는 NK백화점도 마찬가지다. 스웨덴을 스위스나 스페인으로 헷갈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아직은 생소함을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은 스웨덴인데도 매년 12월 말부터 2월말까지 빅 세일 기간에 NK 백화점을 찾는 관광객의 대부분은 중국 사람들이다. 스웨덴 관광이 낯선 우리나라 사람들도 NK 백화점에 가면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휴가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는 명품을 구매 대행해주는 아르바이트가 한국 유학생 사이에서 유행한 적이 있다. 파리 상젤리제 거리에 있는 루이비통 본사 매장이 외국인에 대해서는 여권 1개 당 1개 품목만을 판매하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치의 이유는 중국과 한국 관광객들의 싹쓸이 신상 구매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 유학생들이 용돈 벌이로 관광객들의 물건을 대신 사주고 수수료를 받았던 거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호하다.
스톡홀름 NK 백화점은 스톡홀름 리치 마케팅의 상징이다. 백화점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는 스웨덴이지만 이 백화점에는 로드숍 외의 유럽 명품들 매장은 거의 다 있다. 하지만 이곳의 주 고객도 스웨덴 사람들은 아니다. 심지어 2, 30대 젊은이들 중 NK 백화점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오스트리아 빈의 가장 번화한 거리인 게른트너 거리도 길 양옆으로 명품 매장이 즐비하다. 이 길에는 모차르트 복장을 하고 공연 티켓을 파는 호객꾼들이 많기로도 유명한데, 이들 중 몇 사람에게 물어보면 "한국과 중국의 관광객들은 공연에 대해 물어보는 일은 거의 없고 주로 매장 위치를 물어보는 사람이 많다"고 얘기해 얼굴을 뜨겁게 한 기억도 있다.
1인당 국민총소득이 1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억 원이 넘는 룩셈부르크 사람들에게 루이비통이나 샤넬, 구찌나 버버리는 "엄마 아빠에게 물려받는 것"이다. 2, 30대 젊은 사람이 신상품을 가지고 다니면 이상하다는 것이다. 50대 이상 6, 70대는 신상품을 입고 들고 다닐지언정 젊은 사람들은 낡고 오래된 '명품'을 지니고 다니는 게 일반적인 모습니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의 젊은이들의 옷을 우리 시각으로 보면 촌스럽다. 전혀 '유럽'답지 않다. 깔끔하고 감각적이라고 해도 상표를 보고는 어떤 제품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강남역이나 청담동은 물론 명동이나 심지어는 삼청동을 걸어 다니는 젊은이들의 옷이나 신발을 보면 그게 프랑스의 어떤 건지, 이탈리아의 어떤 건지 어지간하면 아는 사람은 안다. 심지어는 똑같은 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건 분명 돈을 잘못 쓰는 거다. 그건 한국에 있을 때 느끼는 것과 유럽의 어떤 나라에 살면서 느끼는 것 사이에 현격한 정서적 차이를 준다. 한국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 자기 능력이 된다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유럽에 오면 다소 과장된 감정으로 '부끄럽다'.
11년 째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지 못하는 게 '분에 넘치는 명품 구매' 때문은 아니다. 그건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경제적인 문제다. 그리고 2만 7000 달러와 3만 달러 사이에 국민 개개인이 체감하는 차이는 별로 없을 수도 있다.
위의 IMF 자료에서 중국은 GNI가 7990 달러로 세계 72위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이 느끼는 중국은 중동의 석유 국가들보다 더 부자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명품 산업을 먹여 살리는 게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인들에 대해 존경심을 보이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
라파예트 백화점 한 명품 매장의 파리지앵 종업원은 조금 전 가방 3개와 옷 3벌, 그리고 구두 2개를 사간 통큰 중국 손님을 "Portefeuille pas cher"이라고 부른다. '싸구려 내 지갑'이라는 뜻이다. 적어도 우리는 '유럽 사람 따위'에게 그런 소리는 듣지 않고 살고 싶다. /이석원 언론인
[이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