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간의 조용한 화제가 <전두환 회고록>과 <당신은 외롭지 않다:이순자 자서전>(자작나무숲 펴냄) 두 종이다. 고정관념 없이 이 증언을 살펴본 사람이라면 10.26과 12.12에서 광주5.18에 이르는 1980년대 현대사의 새로운 진실이 담겼다고 말한다. 이게 전두환 전 대통령 재평가로 이어질지 관심인데, 언론은 백안시-곡해로 일관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 5.18특별법에 따라 그를 내란 수괴(首魁)로 규정한 인식에서 멈춘 채 요지부동이다. 그런 태도야말로 우리현대사는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실패해왔다는 오래된 편견을 반영할 뿐이다. 누군가는 퇴임 30년만에 나온 이 역사적 회고록에 합당한 자리매김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에 미디어펜 주필 조우석은 두 책에 대한 연속 서평을 내보낸다. 상처투성이 전직 대통령 문화와, 이 나라 불구의 정치풍토에 관한 성찰의 일환임은 물론이다. [편집자 주]
<전두환 회고록>, <이순자 자서전> 연속 서평 <2>
우리현대사에서 퍼스트레이디 증언은 그리 많지 않다.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으로 <6.25와 이승만,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등을 펴낸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 <동행>을 쓴 김대중 부인 이희호 여사 정도가 떠오르는 정도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하 전두환) 영부인 이순자 여사의 <당신은 외롭지 않다:이순자 자서전>은 이 반열에 속한다.
이들 대부분은 내조의 기록을 떠나 남편과의 정치적 동반자 차원의 증언인데, <당신은 외롭지 않다>의 경우 좀더 특별하다. 지난 서평에서 <전두환 회고록>이 갖는 설득력의 절반 이상은 이 여사의 자서전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그건 덕담이나 과장이 아니다.
그래보니 남편 회고록의 부록(附錄)이겠지 하고 가늠하는 분도 있겠지만, 그것도 예단에 불과하다. 궁금할 것이다. 직접 썼을까? 1988년 백담사 유폐 생활 때 골방의 밥상에서 했던 메모가 시작이었다. 그게 쌓여 지난 한 세대 동안 200자 원고지 2만 장을 넘겼다. 그걸 추리고 추린 게 이번 기록인데, <전두환 회고록> 집필에 민정기 전 공보비서관이 참여한데 비해 이 기록은 온전히 그의 작품이다.
자신이 잘 모르는 현안 대목은 남편 증언을 청하고 그걸 녹음한 뒤 집필에 참조했다는데, 왜 그렇게 매달렸을까? 세상이 남편과 가족을 죽이려고 대들었던 지난 30년, 온전하게 버티려면 글 밖에 없었다. 눈 씻고 볼 건 그게 부부애-가족애의 차원을 벗어난 점이다. 정확하게 말해 증언록은 현대사 진실 추구의 과정이었고, 어떤 보편적 성격을 확보하고 있다. 책 뒷부분,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는 성찰이 등장한다.
"내가 이 글을 직접 쓰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분의 삶이 우리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해석해내지 못한 채 분노의 포로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718쪽)
이게 이 여사 삶에서 차지하는 무게는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다. 글 솜씨도 만만찮은데, 경기여고-이화여대 출신답다고나 할까? 출판업을 하는 장남 재국(58.시공사 회장)씨가 모친의 재주를 물려받은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문학-비문학의 구분을 떠나 가장 절절한 글쓰기의 사례가 이 책이다. 다음 대목을 보라.
"어느 해 갑자기 대동맥 혈관에 이상이 생겨 쓰러졌다. 응급실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겨우 한 뼘 크기로 열린 채 쏟아져 들어오는 암청색 밤하늘을 보았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아니었다. 써놓은 나의 삶의 진실마저 사라질 게 두려웠다. 일을 끝내기 전엔 죽어도 죽을 수 없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글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 나는 어려운 수술을 이겨낼 수 있었다."(머리말)
이순자 여사의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는 "내가 이 글을 직접 쓰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분의 삶이 우리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해석해내지 못한 채 분노의 포로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속에서 쓰여졌다. 세상이 그들을 향해 분노를 손가락질을 해댈때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끌쓰기였다.
"글의 힘으로 30년 광풍 견뎠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건 그가 못 말리는 남편바보라는 점이다. 제목 자체가 <당신은 외롭지 않다>가 아니던가? TV 화면으로 이 책 표지를 본 뒤 대중을 위로해주는 차원의 수필집일 것으로 나는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그건 남편에 대한 든든한 동지애-연대감의 표현이었다.
700쪽 넘은 책에서 남편에 대한 표기는 '그이'도, '그'도 아닌 '그분'으로 일관하는데, 그게 수 천 번이나 반복된다. 책망-아쉬움의 표현 등은 거의 없는데, 그게 어색하거나 작위적이지 않다. 남편의 대통령 임기 중 국가에 대한 충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봤다는 술회, 때문에 당시 그가 흘린 땀에 경의를 표한다는 고백이다. 마지막 문장이 이렇다.
"지금 나는 남편과 아내라는 부부의 인연을 뛰어넘어 한국현대사라는 역사의 거대한 무대를 함께 관통한 동시대인으로 그 분 곁에 서있다. 그 분과 동행한 지 58년. 우리의 환희와 절규로 적은 이 책을 86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나의 신랑인 그 분에게 헌정하려 한다."
그 페이지 바로 위에 두 손을 잡고 남편 등에 기댄 채 함께 산보하는 두 부부의 사진이 있는데, 나의 경우 이걸 보고 또 봤다. 논란의 여지없이 아름다운 커플이 맞다. <전두환 회고록>과 <당신은 외롭지 않다:이순자 자서전>은 그래서 더욱 문제적 증언인데, 둘 중 하나다. 저들 부부가 지금도 자기변명 내지 위증을 반복하고 있거나, 아니면 80년대를 악마의 시대로 규정해온 우리가 거대한 인식의 오류를 범해왔거나….
분명한 건 풍상을 함께 해온 대통령 부부의 이 증언록이 순도 높다는 점이다. 고정관념 없는 이라면 바로 무장해제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전두환 회고록>과 달리 <당신은 외롭지 않다>는 인간적 약점과 애환까지 두루 털어놓아 두 종이 서로 보완적이다.
<전두환 회고록>에서도 비중있게 다뤄진 12.12 대목이 그렇다. 쉽게 말해 별 두 개짜리 장성이 별 넷인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어떻게 체포-조사한단 말인가? 목숨 내놓은 당시 상황에서 이 여사는 신념-용기가 없었고, 때문에 남편에게 현실과의 타협을 권유했다고 이 자서전에서 실토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가 두 손을 잡고 남편 등에 기댄 채 산보를 하고 있다.
지독한 '남편바보' 이순자 여사
남편도 그게 "계란으로 바위치기"임을 인정했지만, 소신이 분명했다. 거사 직전 아들 딸 4명을 모아놓고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대학생 재국 외에는 모두 10대이던 무렵이었다.
"자칫 내 목숨과 명예, 우리의 모든 것까지도 잃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까지도 대통령 시해현장의 그 비겁한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면, 금수만도 못하다. 너희들은 아버지가 비겁한 기회주의자가 되길 원해선 안 된다.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끝까지 소신을 지킨 아버지를 제대로 기억해라."(190쪽 요약)
삼엄한 분위기에서 맏아들이 이렇게 말을 받았다. "소신을 가지고 해나가십시요." 대통령 퇴임 이후 박해-불이익을 견뎌낸 견고한 가족애는 40년 전 그때 벌써 형성됐던 게 아닐까? <당신은 외롭지 않다>에는 솔직한 고백도 등장한다. 느닷없이 영부인이 된 초창기 자신은 준비 안된 퍼스트레이디였다는 게 대표적이다.
취임 초기 TV에 비춰진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사치 좋아하는 스타일의 권력지향형 여자로 보인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자신감이 뚝 떨어져 몸무게까지 크게 줄었을 정도였는데, 나중 조금씩 회복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말도 전하고 있다.
유혹에 흔들리는 친인척 문제가 터질 때마다 가슴앓이를 했던 사정도 등장한다. 자신에 대한 박해에 동참했던 김영삼 등 역대 대통령과 김옥숙 여사 등에 대한 서운함의 표시도 이해 못할 건 아니다. 그러다가 이른바 전두환특별법이 만들어진 2013년이 또 한 번 고비였다. 정치자금 2205억 원을 추징한다며 차압 딱지가 나붙고 재산몰수가 이뤄지는 등 집안이 다시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가 그때다.
이 여사는 당시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고 털어놓았다. 남편도 "단기간 심각한 기억상실을 앓았다"(692쪽). 그만큼 충격이었다. 결국 남편과 끝까지 동행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판단으로 당시 마음을 돌렸다는 것이다. 좋다. 그런 걸 촘촘히 확인해보고 싶다면 책을 직접 읽어보실 일이고, 이 서평에서 중요한 건 따로 있다.
5공 죽이기, 전두환 공격의 지난 30년 세월 동안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한국사회는 그래도 이 기록물을 얻었다는 게 다행이다. 지난 30년, 즉 민주화의 87년 체제의 수립이란 반체제세력-민중민주주의세력이 득세하고 건국 이후 대한민국 정통세력이 일패도지해온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저들이 만들어낸 불쏘시개가 광주5,18이었고, 타격목표의 하나가 전두환 타도였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그러나 증언록 출간이란 현대사의 진실을 찾는 계기일 뿐 곧 상황 종료를 뜻하는 건 아니다. 저번 서평에서 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다음 말을 인용했다. "이 글이 세월의 힘을 빌어 진실을 밝힌다 해도 신화처럼 굳어진 편견과 오해가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신화처럼 굳어진 편견과 오해가 전두환 죽이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를 멍들게 하는 '지식-정보의 총체적 오염'을 낳았다는데, 어찌 일조일석에 바뀌겠는가? 그리고 그게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서 보듯 헌법 4조가 명문화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뒤흔드는 국가위기 상황을 초래했는데, 극적인 반전이 없이는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진다. 이 엄중한 상황 역시 손쉬운 해법이 없다.
회고록 출간 이후 필요한 것 세 가지
단 "신화처럼 굳어진 편견과 오해"를 풀지 않고선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는 건 분명하다. 과거사와의 올바른 만남, 역대 대통령의 공과(功過)에 대한 제대로 된 자리매김, 그걸 통한 대한민국의 정체성 재확인 없이 밝은 앞날은 기대하긴 어렵다. 그걸 염두에 두고 기회에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전두환 회고록>의 축약본 출간이다. 총3권 모두 2000쪽 가까운 분량이란 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걸 정본으로 놔두고 축약본을 별도로 출간하는 걸 검토해보라. 만화책 버전 출간도 검토해볼만하다. 지식-정보의 총체적 오염 현상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인 출판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 크다는 걸 염두에 두고 대응할 일이다.
둘째 전두환대통령기념재단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 김대중 관련 시설물을 10개 가까이나 헤아리고 있고, 여기에 과다한 국고지원을 받고 있다는 걸 세상이 다 아는데 왜 5공, 6공 대통령에는 이렇게 차별이 심한가? 현재 전두환-노태우 대통령기념 시설이 단 한 곳도 없다. 더욱이 재단 설립은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으로 보장 받는데도 이러한 형편이다.
특히 지난 한 세대 이른바 국민정서를 등에 업은 정치보복과 인격살인이 춤췄고, 한국사회는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졌다. 1980년대 이후 대세가 된 반체제 운동권의 뒤틀린 현대사 인식 앞에 전두환은 표적이자 먹잇감이었다. 재단 설립은 나라 말아먹는 이 미친 바람을 차단하는 중요한 초석 놓기가 아닐 수 없다.
셋째 허위의식에 찌든 지식인들의 각성이 요구된다. 특히 386세대 지식인 그룹이 문제인데 1980년대 이른바 사회과학시대 성장한 그들은 광주 5.18문제 등 잘못된 현대사 인식을 토대로 반(反)대한민국 정서를 내면화해왔다. 그런 게 국민정서로 고착된 지금 상황에서 아닌 건 아니라고 용기있게 발언하는 게 요청된다.
특히 전두환 집권 7년은 현대사의 핵심이다. 박정희 18년, 노태우 5년과 함께 대한민국 발전의 핵심기간 30년의 중간이며, 군인 출신 최고지도자의 시대를 열었다. 이걸 백안시하는 건 역사를 보는 균형 잡힌 시선이 아님은 물론이다. <전두환 회고록>, <당신은 외롭지 않다:이순자 자서전> 출간이 일회용 항변을 떠나 현대사의 진실 찾는 여정의 계기가 되려면 지식인, 당신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조우석 주필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