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7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총리의 서거 1주기를 기념해 <지금 왜 우리에게 마거릿 대처가 필요한가>를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 박지향 서울대교수(왼쪽)가 7일 자유경제원 주최로 열린 대처서거 1주년 기념 정책토론회에서 <다시 대처를 생각한다>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이날 토론회에서 대처리즘의 의미와 치적, 유산 등에 대해서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학과)가 주제발표를 했다. 박교수는 ‘영국병’을 앓는 중환자로 추락하고 통치 불가능한 나라로 간주되던 영국이 마거릿 대처의 등장과 함께 부활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박지향교수는 "요즘 우리 사회에도 경제가 다시 한 번 도약하기 위해서는 규제철폐와 같은 근본적 해결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면서 "이 시점에서 대처를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다음은 박지향 교수의 주제발표 전문이다. 여성대통령인 박근혜대통령이 대처처럼 많은 업적을 이룩하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편집자주)
대처등장으로 이류국가 영국, 부활의 길 걸어
1970년대에 이르러 ‘영국병’을 앓는 중환자로 추락하고 통치 불가능한 나라로 간주되던 영국은 마거릿 대처의 등장과 함께 부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처는 정치인이 임기 동안 정부를 ‘경영’하고 물러가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대처 이전의 영국과 이후의 영국은 그처럼 달랐다. 대처는 자신의 이름 뒤에 ‘주의(ism)'라는 이념을 남긴 유일한 영국 정치인이다.
‘대처주의’란 경제적으로는 통화안정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치유하고, 재정지출을 삭감하고 작은 정부를 실현하며, 시장경제를 활성화하여 개인과 기업의 진취적 기상을 도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처주의의 다른 축인 도덕적·사회적 보수주의는 엄격한 자기절제와 도덕률로 무장한 개인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되살리고 법과 질서를 존중하며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치국책을 포함하였다.
대처주의, 인플레 치유, 재정지출 삭감, 작은정부, 시장경제활성화
요즘 우리 사회에도 경제가 다시 한 번 도약하기 위해서는 규제철폐와 같은 근본적 해결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겪고 난 후 소위 ‘고삐 풀린 시장’을 제어하기 위하여 강력한 정부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한 때 강했지만 이제 정부 규제를 철폐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마거릿 대처의 서거 1주기가 가까워오는 오늘, 대처정부의 업적에서 어떤 교훈을 찾을 수 있을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대처정부가 행한 민영화를 중심으로 대처의 치적을 살펴본 후 대처가 남긴 유산을 평가해보기로 한다.
▲ 자유경제원이 7일 개최한 대처 전 총리 서거 1주년 기념 정책 토론회에선 대처의 공기업개혁과 민영화, 사회주의적 정책의 폐기와 시장경제 복원, 의존적 국민성의 개조 등이 집중 부각됐다. 박근혜대통령도 대처의 일관성과 원칙의 정치, 시장경제 중시, 작은 정부 등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
대처의 치적
‘영국병’의 원인은 정부가 경제를 좌지우지한 케인즈식 경제정책과 방만한 복지국가, 그리고 강성 노동조합이었다. 대처는 ‘영국병’의 가장 심각한 증세인 파업열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강성 노조의 대표 격인 광부노조를 상대로 치열한 투쟁을 벌인 끝에 법과 질서를 회복시켰다. 파업을 분쇄한 후 대처정부는 후속조치로 더욱 강경한 법을 제정하였다. 파업 전 조합원 비밀투표가 의무가 되었고 분규 작업장이 아닌 곳의 동조파업은 불법이 되었다. 또한 노조원의 불법행위에 따른 민사상의 책임이 부과되었으며 클로즈드숍(폐쇄적 조합주의)이 점진적으로 철폐되어 노조 가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 결과 노조의 세력은 대처정부 시절에 극도로 위축되었고 그와 더불어 사회주의 세력도 치명타를 입었다.
자애로운 정부 지향하는 케인즈식 경제정책 걷어치워
‘영국병’의 두 번째 치유는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고 시장과 개인을 경제행위의 주체로 회복시키는 과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모든 집권당들은 ‘시대정신’이라고 간주된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추종하였다. 그 결과 기간산업이 국유화되었고 공기업들은 적자경영을 하면서 뻔뻔스레 정부에 손을 내밀었으며 정부는 적자재정을 편성하여 위기를 넘기곤 하였다. 1970년대 중반 인플레는 20%를 넘어섰고 최고세율은 80%에 육박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는 일자리도, 일하려는 의욕도 생겨날 수 없었다. 대처는 영국이 필요로 하는 급회전의 원칙을 시장경제에서 찾았다. 시장경제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국유화된 기업들을 민간부문으로 되돌려야 했다.
국유화기업 민간매각, 공공임대주택 150만호 매각 대성공
1980년대를 통해 대규모 민영화가 실현되었다. 대처정부가 추진한 민영화 사업 가운데 가장 인기 있고 성공적인 것은 공영 임대주택의 매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영국정부는 막대한 양의 임대주택을 짓고 운영해 왔는데 대처정부가 이것을 민간부문으로 돌렸던 것이다. 1990년 대처가 물러날 때까지 총 150만 호가 팔렸는데 혜택은 주로 숙련공들에게 돌아갔고 그 결과 중산층이 두터워졌으며 이들이 대처정부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었다.
한편 공기업 주식을 매각하는 민영화는 대처의 두 번째, 세 번째 임기에 집중적으로 실행되었다. British Telecom의 매각(1984)을 시작으로 British Steel, British Petroleum, British Airways 등의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최대 규모는 영국에서 가장 큰 기업이며 세상에서 세 번째로 큰 석유회사인 British Petroleum의 주식 매각(1987)이었다. 결과적으로 대처정부가 들어선 1979년부터 1992년까지 총 415억 파운드어치의 국가소유 주식이 민간으로 넘어갔으며 성인 인구의 25%인 1,100~1,300만 명이 주식을 소유하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체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소유권 이전”이라고 불린 민영화는 결과적으로 성공이었고 그 규모에서 혁명적이었다.
415억파운드 주식 매각, 혜택받은 중산층 대처의 지지자로
민영화는 그때까지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던 공공부문에 혁신을 주입시키는 대 변혁을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민영화의 마력은 ‘파산할 수 없던 것을 파산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대중은 처음에는 오랫동안 익숙해 있던 공기업이 해체되는 것에 불안해했지만 다양한 서비스의 선택권을 누리게 되고 가격이 인하됨에 따라 만족하게 되었다.
▲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인해 심화한 만성적인 노조병과 재정위기, 인플레, 큰 정부와 방만한 규제를 혁파하고, 자유주의 시장경제원리 회복과 나태하고 의존적인 국민성을 자율과 자조 자기책임으로 무장한 국민성으로 바꾸었다. 대처 총리가 82년 아르헨티나가 불법점령한 영국령 포클랜드섬을 탈환하기위한 대책을 논의한후 다우닝가 총리관저를 나서고 있다. |
그러나 중요한 예외가 있는데 대처정부가 추진한 민영화 가운데 상수도와 전기는 반대가 심했고 대중적 인기도 없었다. 물론 수도및 전기 민영화에 대한 높은 반대율이 막상 민영화 후에는 낮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민의 과반수는 수도와 같은 기본적 공공재는 사적 부문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럼에도 1987년 선거에서 보수당은 수도와 전기의 민영화를 공식 선거강령에 포함시키고 3기 정부에서 실천에 옮겼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인기 없는 수도 민영화 후에 치른 1992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4번 째 연속해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20세기 영국에서 행해진 정책들 가운데 민영화만큼 다른 나라에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없었다. 대처 임기 중에 민영화라는 단어는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개념이 되었다. 가장 빠른 속도로 민간 기업이 늘어난 곳은 러시아를 비롯한 과거 공산권 국가들이었다. 아이러니는 대처와 각료들이 처음에는 민영화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대처정부의 가장 성공적인 치적으로 평가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대처는 자서전에서, 1970년대 후반에는 민영화라는 개념이 너무나 혁명적이어서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러나 일단 결과가 좋게 나타나자 그 성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고 자신이 민영화를 사회주의의 폐단을 해소하는 핵심 수단으로 간주했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국민 주식소유하는 '대중자본주의' 로 친기업태도 조성
성공적 민영화에서 힘을 얻은 대처정부는 모든 사람들이 주식을 소유하고 자본주의의 이익을 향유한다는 ‘대중 자본주의(popular capitalism)’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대처는 민영화를 추진할 때 국민들로 하여금 좀더 ‘친기업적’ 태도를 취하게 만들고 기업가 정신을 함양하겠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그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는지를 살펴보자. 1980~90년대에 실시된 사회조사에 의하면 대처가 원한 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자본주의가 더 인기 있는 것이 되고 국민들이 시장경제의 원리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중의 의식변화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정부가 임금 및 물가를 통제해야 하고 일자리를 제공하고 실업자의 생활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의식이 급격히 감소했는데[Roger Jowell et al., British Social Attitudes, the 6th Report(1989); the 15th report(1998)], 이러한 태도 변화는 압도적으로 사회민주적 국가통제가 관행이던 1970년대의 분위기와 비교해 볼 때 실로 놀라운 것이다.
▲ 박지향 교수가 쓴 <대처스타일>. |
좌편향 영국사회 이념, 중간지점 수렴하게 만들어
나아가 대처는 좌편향되었던 영국사회의 이념을 흔들어 중간 지점으로 수렴하게 만든 데 기여하였다. 물론 대처가 만들어놓은 영국사회는 단기적으로는 빈부의 격차가 더 심화된 사회였고 그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블레어의 노동당정부가 대처의 유산을 대부분 흡수하면서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많이’ 우측으로 이동하였고 대처 후의 보수당도 ‘따뜻한 보수’를 내세우며 중간으로 움직인 결과 오늘날 영국사회는 이념적으로 많이 수렴되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1970~80년대에 극심한 이념갈등을 경험했던 영국사회가 오늘날 이런 정도의 수렴현상을 보이는 데 대처가 기여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 국가의존 의식 개혁, 개인의 책임 강조
근본적으로 대처가 원했던 사회는 사회주의가 조장하는 국가에 대한 의존을 근절하여 개인이 스스로의 운명을 다스리는 사회였다. 대처가 1945년 이후의 ‘케인즈-베버리지 식’ 합의를 그처럼 비난한 이유도 그것이 도덕적 해이를 낳고 사람들로 하여금 남에게 의지하려는 의존문화를 낳기 때문이었다. 그의 악명 높은 유명한 발언, 즉 “사회 같은 건 없습니다”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민영화 정책과 대중 자본주의의 목표도 일차적으로는 재정적이고 정치적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문화적이며 정신적인 것이었다.
정부실패가 시장실패보다 더 큰 재앙 강조
무엇보다도 대처는 정부가 개인보다 더 나은 판단력을 가졌다고 간주하는 사회주의의 대전제를 공격하였고 정부의 실패는 시장의 실패보다 훨씬 더 큰 재앙임을 확신하였다. ‘더 큰 정부가 주도하는 더 많은 평등이 곧 정의이며 진보’라고 믿는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던 영국사회에서 대처의 주장은 대단히 혁명적이고 충격적이었다.
대처는 또한 자본주의에 품위를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 1970년대까지도 영국에서는 부의 축적을 죄악시하거나 개인의 노력으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천박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대처는 부의 추구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존경받을 일임을 지적하면서 꾸준히 자본주의의 미덕을 찬양하였다. 좌파는 그것이 탐욕을 조장할 뿐이라며 비난했지만, 재산은 ‘이기적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관용과 베푸는 사회’를 가져다준다고 확신한 대처는 열심히 일하고 벌어 ‘너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그 돈을 쓰라고 충고하였다. 대처의 지지자들은 그가 이기심이라는 인간 본능을 정당화하고 미덕으로 보이게 하면서 동시에 관용/공유와 공존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을 그의 큰 업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해했다.
부의 축적은 존경받을 일, "더 많은 관용과 베푸는 사회가져온다"
많은 정치지도자들과 달리 대처에게는 비전이 있었고, 역사적 사명감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그것을 실천할 결단력이 있었다. 대처의 리더십은 그의 용기와 끈질김에서 찾을 수 있다. 대처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합의에 매달리느니 정책을 결정하고 그것을 밀고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아무리 인기가 없어도 그것이 옳은 정책이라고 생각하면 끈질기게 추진하였던 것이다. 제왕적 총리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국민에게 비전과 강력한 추진력을 제시하여 자신을 따르게 만들었다.
그는 삶의 불가피한 현실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한 것이 영국의 쇠퇴에 책임이 있다고 믿었고 국민에게 번번이 ‘직시하시오’라고 주문하고 꾸짖기도 하였다. 투표에 생명을 거는 정치가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필자가 아는 어떤 영국인은 ‘용감했다’는 한마디로 대처를 정의하였다. 그러기에 대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처 극단 엇갈려, 마녀 VS ,엘리자베스1세 같다
대처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일부 사람들에게 마치 “마녀”와 같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시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로 보였다. 1년 전 대처가 서거했을 때 일부 영국인들이 파티를 열고 ‘마녀가 죽었다’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그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극단적이다. 확실히 대처가 만든 영국사회는 이전보다 빈부 차가 더 심화되어 있고 대처는 불평등을 당연시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대처는 ‘하나의 국민(One Nation)’이라는 보수당의 전통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궁극적 목표라고 주장하였다. 노동당이 계급에 의해 구분되는 사회를 당연시했다면 대처가 제시한 ‘대중 자본주의’는 영국국민 모두를 ‘가진 사람들’로 만들어 하나의 국민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분열과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파생하지만 대처는 궁극적으로는 ‘One Nation’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최대업적, 영국민에게 "조국은 다시 위대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 심어줘
아마도 대처의 가장 큰 업적은 절망에 빠져있던 영국국민에게 그들의 조국이 다시 위대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일 것이다. 대처가 보여준 가장 위대한 지도자적 자질은 그가 단기적인 정치적 이익에 좌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도자를 평가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평소와는 다른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는지 이다. 마거릿 대처는 영국 국민과 제도로 하여금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을 하거나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를 만들어간 지도자였다. 그가 보여준 리더십은 우리에게도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박근혜대통령도 대처와 같은 업적을 남길 수 있기를 바란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학과)
(이 글은 자유경제원이 7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대처 서거1주년 기념 정책토론회에서 박지향 교수가 주제발표한 것을 정리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