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때 무솔리니를 몰아낸 미군이 이탈리아에 들어갔을 때 일이다. 파시스트 독재자에게서 벗어난 이탈리아 사람들은 '위대한 미국'을 외치면서 미군을 환영했다. 당연히 미군이 오기만하면 동네에서는 와인을 퍼주었고, 이탈리아의 풍성한 음식으로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런데 이탈리아 사람들 눈에 미군이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군들은 커피에 뜨거운 물을 잔뜩 타서 큰 컵에 마시거나 심지어는 수통에 담아 마시기까지 했다. 세상에서 커피를 가장 사랑한다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저게 뭐하는 짓인가? 하고 의아해 했다.
로마에 진주한 미군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함께 마시라고 가져다 준 물에 에스프레소를 부어서 마셨다. 일부 미군들은 아예 큰 컵에 에스프레소와 물을 섞어서 달라고 주문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커피를 '아메리카노(Americano)'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냥 미국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정서적으로는 '미국 놈'이라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고, 그들이 마시는 커피에도 그 이름을 붙인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마신다는 '아메리카노'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미국의 커피 문화를 폄훼한 결과물인 셈이다.
뉴요커의 상징 중 하나는 스타벅스에서 산 크림치즈 잔뜩 바른 베이글을 오른손에, 벤티 사이즈의 아메리카노를 왼손에 들고 아침 출근하는 것이라고 한다. 스타벅스 직원이 써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테이크 아웃 잔을 소중히 모으는 사람도 있다. '뉴요커'스럽게. 이 풍경은 비단 뉴욕 뿐 아니라 이제는 세계 어느 대도시에 가도 볼 수 있다. 적어도 스타벅스가 지배하는 도시라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인 것이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쇠데르홀름 지역에 있는 스타벅스. /사진=이석원
북유럽 국가들은 세계에서 커피를 가장 많이 마시는 사람들의 나라다. 핀란드는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이 12kg로 이 분야 세계 1위다. 미국의 커피 문화를 조롱하며 '아메리카노'라고 부르는 이탈리아가 5.9kg임을 감안하면 두 배에 이르는 수치다. 핀란드에 이어 노르웨이는 9.9kg으로 2위, 그리고 이들과 함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또 다른 나라인 스웨덴은 8.2kg으로 4위다.
그럼 세계에서 커피를 가장 많이 마시는 국민들에게 세계에서 커피를 가장 많이 파는 커피 브랜드 스타벅스의 존재는 어떨까? 세계에서 가장 커피를 많이 마시는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국민들에게 스타벅스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친근하지도 않은 존재다. 이들 국가에 진출한 스타벅스 매장의 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 국가 중 인구나 경제 규모 면에서 가장 큰 나라인 스웨덴에는 2013년 처음으로 스타벅스 매장이 문을 열었다. 2009년 얼란다 국제공항에 첫 매장이 생기긴 했지만 그건 외국인이 워낙 많은 공항이라는 특성 때문이고. 그리고 현재 스웨덴 전체에는 스타벅스 매장 9개, 수도인 스톡홀름에 6개의 매장만이 있다. 제2 도시인 예테보리를 비롯해 인구로 3, 4위인 웁살라와 말뫼에 각각 1개 씩이 더 있을 뿐이다.
세계에서 커피를 가장 마시는 핀란드는 더 심하다. 이곳에도 2013년 헬싱키에 스타벅스 매장이 처음 문을 열었는데 지금까지 3개의 매장만이 존재한다. 핀란드에서 스타벅스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인 셈. 그나마 세계 커피 소비량 2위인 노르웨이가 가장 많다. 전체 13개 매장이 있는데 그중 4개만 수도인 오슬로에 있다.
스웨덴 사람들의 커피 사랑은 '피카(Fika)'라는 문화로 압축된다. 커피라는 뜻의 스웨덴어 Kaffe를 뒤집어 발음한 것이다. 19세기 공장주들의 눈을 피해 커피를 마시던 노동자들에게서 유래했다. 말 그대로 커피 마시는 자리, 시간, 모임 등을 일컫는 말이다.
스톡홀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인 드로트닝가탄에 있는 웨인스 커피. 스웨덴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카페 브랜드이다. /사진=이석원
스웨덴 사람들에게 피카는 일상의 즐거움을 넘어서 삶 자체로까지 인식된다. 회사에서나 학교에서나 또는 동네에서도 스웨덴 사람들은 마치 피카를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피카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피카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행위적 의미가 아니라 일의 집중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그들에게는 소중한 쉼표 같은 존재다.
물론 대개의 피카는 회사든 집이든 자신의 일상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외부 카페에서도 활발하다. 그래서 대도시는 물론 지방의 작은 소도시에도 가장 많은 게 카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스타벅스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의 스타벅스만큼이나 스웨덴에서 많이 눈에 띄는 카페 브랜드가 에스프레소 하우스(Espresso House)와 웨인스 커피(WAYNE’S COFFEE)다. 스웨덴에서는 '국민 카페'라고 불리는 두 개의 브랜드 카페다. 스톡홀름에는 '발에 밟힐' 정도로 많고, 인구가 5000명 남짓인 '벽촌'에도 이 두 카페는 꼭 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다른 브랜드 카페는 없다.
처음 스타벅스가 생겼을 때 스웨덴 젊은이들은 살짝 열광했다. 와이파이(Wi-Fi)를 무료로 제공했고, 유럽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는 '아이스 커피'가 있고, 또 화장실을 가기 위해 10 크로나(우리 돈 1300원 정도)짜리 동전도 필요 없었다. 그래서 스타벅스 매장이 급격히 늘어날 듯도 했다.
하지만 에스프레소 하우스나 웨인스 커피가 같은 환경을 만들어 놓자 스타벅스 빈 테이블은 늘어났고, 매장은 늘어나지 않았다. 굳이 애플 노트북을 가지고 스타벅스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카페에서 피카를 즐기는 스웨덴 젊은이들. /사진=이석원
스웨덴이나 핀란드 사람들은 이탈리아나 프랑스처럼 미국식 아메리카노를 천대하고 에스프레소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미국의 커피를 무시한다. 에스프레소를 즐기면서 아메리카노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만 스타벅스가 아닌 자기들 토종 브랜드 카페에서 마시는 것이다.
즉 세계 최대 커피 기업인 스타벅스의 자존심에 강한 스크래치를 내는 것이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다. 스웨덴에는 ‘반미’ 정서 따위는 없다. 오히려 영국을 무시하면서 미국에 애착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독 먹는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의 자본을 쫓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 명확히 얘기해주는 스웨덴 사람들은 없다. "왜 스타벅스보다 에스프레소 하우스를 선호하느냐?"고 물으면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분명한 이유가 없는 것은 스타벅스로서는 가장 난감한 문제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개선하거나 극복하는 대안을 만들면 되지만 이유가 분명하지 않으니 개선도 극복의 여지도 없는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커피를 많이 마시는 국민들에게 커피를 팔지 못하는 세계 최대 커피 회사의 아이러니다. /이석원 언론인
[이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