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최주영 기자]"나는 기본적으로 파이터다. 욕을 먹더라도 우리 기업, 국가 경제를 위해 해야 할 말은 해야 한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조석래 전 효성그룹 회장을 떠올리면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말이라고 한다. 배 부원장은 조 전 회장의 산수를 기념하기 위해 효성그룹이 발간한 ‘내가 만난 그 사람, 조석래’라는 기고문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조석래 전 효성 회장 팔순 기념 문집 <내가 만난 그 사람, 조석래>/자료=효성 제공
그는 조 전 회장에 대해 “현재를 살고 있지만 생각은 늘 한 걸음 앞서 미래를 사셨던 이타적인 기업가인 조 회장님이 재계의 원로로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겐 대단한 선물이자 축복“이라고 존경을 표했다.
3일 재계와 효성에 따르면 효성그룹은 최근 조 전 회장의 팔순문집에 실린 약 400쪽 분량의 기고글을 발간하고 임직원들에게 조 전 회장의 기업가 정신과 리더십을 소개했다.
효성그룹 관계자는 “당초 조 전 회장의 팔순에 맞춰 2014년에 발간하려던 문집을 최근 조현준 회장의 취임을 계기로 펴내게 됐다”고 설명했다. 기고에는 사회 각 분야 저명인사와 지인, 전임임원 등 80여명이 참여했다.
편하고 쉬운 길 마다한 ‘열정적 선각자’
조 전 회장을 옆에서 지켜봐 온 지인들은 그가 열정적이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선각자'라고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조석래 전 효성 회장이 2007년 제20차 한미재계회의 사전 결단간담회에서 한미 양국간 투자보장협정과 FTA를 적극 추진할 것을 촉구하는 모습 /사진=효성 제공
지난 1974년 은행원 출신으로 효성에 입사해 조 전 회장과 처음 만난 공정곤 전 효성물산 부회장은 첫대면에서 "은행원이 싫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은행원들이 대체로 지시만 받고 자발적으로 일하는 것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조 전 회장은 "효성에 들어오게 되면 창의적이고 자발적으로 일해 보라"고 조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공 전 부회장은 "조 회장님은 노력하지 않고 늘 편하게만 일을 풀어가려는 사람, 남의 인심만 얻으려는 사람을 경계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효성과 바스프가 50대 50으로 출자해 만든 '효성바스프'의 수출 문제도 언급하면서 "회장님은 좋은 물건을 만들면 이걸 해외에 팔거나 해외에서 수입하는 물건을 대체해서 국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고 말했다.
홍영철 고려제강 회장은 조 전 회장이 새로운 기술에 대한 남다른 집념과 끈기를 가지고 있다고 썼다. 그는 효성이 폴리케톤이라는 신소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점도 조석래 회장의 공이 컸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또 조 전 회장은 평소 "안 되는 이유 백 가지보다 되는 이유 한 가지가 더 중요하다"고 주변 지인들에게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창남 전 동양나이론 회장은 조 전 회장과 함께 폴리프로필렌 사업을 시작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폴리프로필렌은 기술적 기반이 약해 뛰어들이 어려운 분야였지만 조 전 회장은 탈수소공법이라는 기술을 들여와 이를 자체 사업에 적용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설명이다.
구창남 전 회장은 "많은 회사들이 사업 초기 외국으로부터 기술을 전부 사오는 것을 당연시하지만 효성은 자체 기술을 개발하거나 외국 기술을 도입하더라도 이를 우리 기술진이 완벽히 소화해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글로벌 스탠더드 준용’ 강조한 기업가
조 전 회장의 이 같은 결단력과 도전정신은 한국 경제 활성화와 산업계 발전으로도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허창수 회장은 조 전 회장이 ‘글로벌 스탠더드의 준용’이라는 개념을 통해 한미 FTA를 추진시켜 우리 경제의 글로벌화를 가속화하자고 제안한 일화를 소개했다.
조석래 효성 전 회장과 허창수 전경련 현 회장(왼쪽) /사진=효성 제공
당시에는 시위와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사회에서 기업들이 투자촉진과 일자리 늘리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 전 회장은 “야구의 룰이 어떤 나라에서는 스트라이크 3개로, 또 다른 나라에서는 2개로 아웃이 되는 등 여러 가지가 된다면 야구가 국경을 넘어 활성화되기 힘들 것입니다.”라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허 회장은 “조 회장님의 글로벌 리더십과 선견에 공감한다”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비즈니스맨으로서 새삼 책임감과 함께 경의를 표한다”고 썼다.
이영관 도레이첨단소재·도레이케미칼 회장은 조 전 회장이 글로벌 기업인들과 교류를 넓힐 수 있었던 이유로 활발한 ‘민간외교활동’을 꼽았다. 수 십여 년간 효성그룹을 이끌면서도 전경련 회장, 한일경제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한·일 관계에 윤활유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2007년 체결한 한미 FTA는 2000년 당시 조 회장이 처음 주재한 한미재계회의에서 처음으로 논의됐다. 당시 조 회장은 “외환위기로 빚어진 국가위기 극복을 위해 통상적인 방법만으로는 안된다”며 FTA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후 7년만에 결실이 이루어졌다.
그는 또 2005년 한일경제협회 한국측 회장으로서 “양국이 FTA를 맺어 하나의 경제권이 된다면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은 조 전 회장을 ‘작은 거인’이라고 소개했다. 한일 양국의 우호증진과 바람직한 경제협력 관계를 위해 민간외교관으로 앞장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조 회장님은 전경련과 한일경제협회에서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았다”며 “소명감과 열정으로 이끌어주신 작은 거인”이라며 존경했다.
시게이에 도시노리 전 주한 일본대사도 조 전 회장이 양국 관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시게이에 대사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조 전 회장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 한일 비즈니스 서밋 라운드테이블과 같은 양국 재계 지도자들이 모이는 기회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화려함 뒤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미 돋보여
조 전 회장은 화려한 겉모습 속에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미가 넘쳤던 일화들도 있다. 보통 '재벌 회장님' 하면 연상되는 독특한 이미지가 있지만 조석래 회장은 이와 달리 매우 소탈하고 친화적이며 학구적인 이미지로 지인들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다.
2012년 효성 이사회에서 조석래 효성 전 회장(왼쪽)과 김상희 변호사 /사진=효성 제공
이동건 부방 회장은 2013년 국제로타리 재단이사장을 역임할 당시 조 전 회장의 미국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모임을 제의했으나 조 전 회장이 정중하게 사양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조 회장님은 별나게 축하할 일도 아니라면서 홀연히 귀국하셨다. 그때 나는 조 회장님의 높은 품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고 전했다.
손경식 CJ 회장은 2005년 대한상의 회장에 취임한 당시 일본 홋카이도에서 열린 경제포럼에서 주제발표자로 나선 경험을 소개했다.
손 회장은 “일본의 재계 인사들이 참석한 곳에서 내가 생각하는 바를 강연하는 기회이기도 해지만 신임회장으로서 인사할 수 있는 기회였다”며 “조 회장님의 속 깊은 배려에 무척 감사했다”고 존경의 뜻을 표했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조 전 회장을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봤다.
그는 "김 회장은 2008년 당시 국내의 반(反)재벌 정서 때문에 전경련 활동이 적잖이 위축되어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상황에서도 조 전 회장이 당시의 세론에 반할지라도 소신있는 발언으로 정론을 펴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고 소회했다.
[미디어펜=최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