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7) - 유성룡(1542~1607)의 <징비록(懲毖錄)>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편집자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
◇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 조선의 무능
공자는 곤경에 처하여도 배우지 않는 사람, 즉 ‘곤이불학(困而不學)’의 인간들을 제일 하등으로 취급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조정, 사대부와 무인들에게 적확하게 어울리는 말인 듯싶다.
서애 유성룡이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에 근심이 있을까 삼가”기 위해 임진왜란(1592~1598)의 참혹한 체험을 토대로 징비록(懲毖錄)을 지었지만 한 세대도 못가서 북방의 오랑캐에게 또다시 짓밟혔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려 300년도 못가 일본제국주의의 총칼 앞에 조선왕조는 완전하게 멸망했다. 이만 하면 조선왕실과 사대부의 ‘곤이불학(困而不學)’은 정말 어쩔 수가 없는 수준이 아니었던가?
<징비록>은 임진왜란이라는 유사 이래 가장 길고 참혹했던 전화(戰禍)속에서 나라를 되살려낸 국난극복의 생생한 기록물이다. 유성룡의 탄식과 울분, 충정과 신고(辛苦), 통찰과 지략이 절절이 담겨있다. 당시 조선 조정의 무능함과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군대, 무기력한 장졸들의 행태를 읽는 독자들이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죄 없는 백성들의 무고한 죽음과 굶주림에 시달린 비참한 생활상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책에는 비겁하고 어리석은 벼슬아치와 장수들의 부끄러운 행태들이 많이 적시되었다. 그 가운데 국가를 구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목숨을 초개(草芥) 같이 버린 관군과 의병, 선비, 승려, 이름 모를 백성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충무공 이순신의 충정과 전공은 모든 면에서 으뜸으로 빛난다.
◇ 왜의 침략 야욕에 눈감은 당쟁의 폐해
<징비록>은 전란 직전과 전란 중의 전황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책 말미에 녹후잡기(錄後雜記)로 전란 발생의 전조, 전시 중의 각종 대비책과 명․일 양국의 강화 협상 전말까지 부기하고 있다. 유성룡이 선조를 보필하면서 직접 겪은 일들과 주변의 관인들이 보고 들은 내용을 전해 듣고 기술하여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을 살필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문헌이다.
이 책에 투영된 조선 통치자들의 인식과 행태, 정치, 경제, 군사, 사회의 단면을 통해 조선의 뼈아픈 실책을 확인할 수 있고, 저자가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징계의 목소리를 여러 대목에서 들을 수 있다. 시대 순의 구분 없이 통합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보자.
먼저 임진왜란을 초래하고, 전시의 여러 시행착오와 오판에 따른 큰 실패를 불러온 가장 큰 요인은 당쟁을 일삼던 통치 권력의 무능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년 전인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대규모 숙청이 있었던 것도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당쟁의 연속에서 빚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왜의 요청에 따라 1590년 일본에 다녀온 조선통신사들의 엇갈린 보고는 전란을 체계적으로 대비하지 못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 또한 당쟁의 영향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서인인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했고, 동인인 부사 김성일은 “그러한 정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복명했다. 물론 인심의 동요를 우려해 해명한 것이라 변명하긴 했다. 하지만, 국가의 중대한 정책결정 사안을 두고 정확한 정황보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조정의 분란을 야기한 점은 뼈아픈 대목이다.
당쟁의 그림자는 전쟁 수행과정에서의 군직의 임명이나 승진, 전공의 판정 등에도 은밀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피난 중에 유성룡이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모함으로 당일 파직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당쟁에 대해, 또는 당파적 관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런 정황을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다.
당시 정파적 이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순신이 파직과 백의종군을 거듭한 것도 정쟁의 산물과 무관하지 않다. 유성룡, 이산해 등이 중심이던 동인 계열의 이순신이 윤두수, 정철 등이 중심이던 서인 계열에 속한 원균의 끊임없는 견제와 모함으로 고초를 겪었던 것이 이를 반증해준다.
하지만 왜란의 최고책임자는 역시 임금 선조다. 그는 정파적 분쟁을 조정하고 일사분란하게 전쟁을 치를 만큼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력을 갖추지 못했다. 선조는 서울 도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기약 없는 피난길에 올랐다. 이에 백성들은 궁궐을 불사르고 임금의 피난행렬이 가는 곳마다 통곡의 원성이 자자했다. 임금의 피난길 인근의 지방 수령들은 달아나기 바빴다. 수행 신하들이 굶주리는 등 거처나 음식 조달의 초라함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서애 유성룡 영정, 출처: NEWSIS |
가장 지리멸렬한 것은 국방태세와 허수아비 같았던 전력이었다. 1592년 4월 13일(음력)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부산포를 함락시킨 후 파죽지세로 국토를 유린했다. 5월 3일에 한양을, 6월 13일에 평양을 점령한다. 조정이 철석같이 믿던 당대의 명장 이일과 신립은 각각 상주와 충주에서 대패했고 그 후로 변변한 전투 한번 없었다.
다만 무인지경과 같았던 육전과 달리 해전에서는 이순신이 연전연승하며 왜군의 수륙병진 전략을 봉쇄했다. 수군의 활약은 남해와 서해를 보존함으로써 그마나 명군의 도움을 얻어 전세를 뒤집고 왜군을 몰아낼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활과 창이 주력무기였던 조선 관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정신력 자체가 해이했다. 장수들의 방어 전략과 전술 체계 또한 너무나 허술하여 패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진관지법(鎭管之法)을 썼다. 각 도의 군병이 모두 주요 도시의 진관에 나누어 소속되어 한 진이 무너져도 다른 진이 지킬 수 있는 체제였다. 왜란 당시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이라 하여 도내의 여러 고을을 나누어 순변사, 병사, 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켜 서로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분군법에 의하면, 여러 고을의 병사를 거느리고 일정한 장소에 주둔한 후 서울에서 장수가 내려오길 기다려야 했다. 지역 병사들과 파견 지휘관이 서로 알지 못하니 일체화된 전력이 나올 리 없다. 게다가 임명된 장수가 내려오다 도망가고 오지 않으면 기다리던 병사들이 동요하여 흩어지기 일쑤였다. 왜란 전에 유성룡이 이런 폐단을 들어 진관제도를 수복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수렴되지 않았다. 가슴을 치게 하는 대목이다.
장수들의 오만과 무능 또한 패전의 요인이다. 천혜의 요충지인 험준한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진 신립의 작전이 대표적인 예다. 후에 명나라 원군으로 온 이여송이 조령을 지나면서 “이렇게 험준한 곳이 있는데도 지킬 줄 몰랐다”며 탄식했던 건 당연하다.
물론 신립이 오합지졸인 관군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강물 사이에 진을 친 것이라는 옹호론도 있다. 하지만 병법을 오판한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왜란 발발 전부터 유성룡이 신립에게 왜란에 대비토록 몇 번이나 조언을 했다. 하지만 그는 오만한 태도로 이를 무시했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가 용맹하긴 했지만 지략이 없는 장수였던 것 같다. 오만과 무능이 부른 예견된 패배였던 셈이다.
<징비록>에는 조선 장수와 병졸의 무능과 비겁한 사례가 넘친다. 엄정한 군기와 상무정신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쟁 초기에 바다에서 왜적과 제일 먼저 접전했어야 할 경상좌수사 박홍은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났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동래성에서 달아나 부사 송상현 홀로 분투하다 전멸하게 만들었다.
이일이 서울에서 군사를 모집하니 유생들은 군사로 뽑히지 않으려고 관복을 입고 과거 시험 종이 꾸러미를 들고 나왔다. 백면서생이니 군대에 갈 수 없다는 무언의 시위나 마찬가지다. 한심한 일이다. 군직을 맡은 장수나 백성들 모두 자신의 안위에만 골몰했던 것이다.
◇ 명군의 횡포와 전략적 협력 체계의 부재
유성룡의 기술을 보면, 전쟁 수행과정에서 유기적인 협력체계가 부족했던 다양한 사례도 발견할 수 있다. 조선 관군과 명나라 원군 사이, 관군과 의병 사이, 조선 및 명나라 육군과 수군 간에 협공 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전세를 역전시키거나 전쟁 승패를 좌우할 수 있었던 몇 번의 결정적 시점에서 실기(失機)한 적이 적지 않았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대목이다.
명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후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지 않을 때 계속해서 추격토록 이여송을 재촉하던 유성룡의 노력이 명군의 소극적 태도로 결실을 보지 못한 점도 안타까운 예다.
또한 왜군이 한양을 점령하고 있을 때, 유성룡은 명의 남방 군사 1만 명을 선발하여 강화에서 한강 남쪽으로 상륙하여 왜군의 퇴로를 끊어야 한다고 강력히 요청했다. 하지만 북방장수인 이여송은 남방 군사가 공을 세우는 것을 꺼려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의 승기를 확실하게 잡을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다. 서애의 전략적 안목의 빛이 바래버린 순간이다.
이렇듯 <징비록>에는 원군인 명나라 군사들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전쟁이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하던 정황이 자주 발생했다. 그때마다 안타까워하던 유성룡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명나라에 의지해야 만했던 나라를 빼앗긴 약소국의 설움을 톡톡히 느껴야 했다. 게다가 우리 백성이 굶주리는 상황에서도 명군의 군량미 조달과 온갖 비굴한 시중을 들어주어야 했다. 속국인 조선이 신민들의 겪은 고충을 보면 처량하고 분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쳐 전투할 이유가 없는 명나라 군사에게 죽음을 무릅쓴 용맹한 전투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남의 나라 군대에 의지하던 자주력을 갖추지 못한 힘없는 속국의 입장에서 굴종을 감수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 <징비록> 표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그나마 육상에서의 진주대첩과 행주대첩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김시민 장군과 권율 장군의 승전은 조선 백성의 사기를 드높인 쾌거였다. 역시 왜란을 종식시키고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이순신의 불패의 신화였다. 왜란 이전 이순신은 뛰어난 장수의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변변치 못한 직책을 전전해야 했다.
전쟁 발발 불과 1년 2개월여 전에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로 임명되면서 전쟁을 미리 예견한 이순신은 거북선을 창제하는 등 치밀하게 전란에 대비했다. 왜란 중에는 지략과 용맹으로 연승을 거두어 왜군의 수군과 육군의 병진 전략을 차단할 수 있었다. 유성룡이 역사에 남긴 최고의 공적은 이순신 발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징비록>이 이순신의 활약상을 상당한 분량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은 당연하다. <난중일기>와 더불어 왜란 당시의 이순신의 일대기를 보충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 이유다.
<징비록>에 비친 유성룡은 백성과 나라를 생각하는 충직한 신하를 넘어, 열악한 환경 하에서 전시 조정을 이끈 탁월한 지도자다. 문신이면서도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저술하여 이순신에게 보내 실전에 활용하게 할 만큼 군사 작전에 능한 군사전략가의 역량도 보여준다.
그는 수많은 지방 수령이나 지휘관에게 군사작전을 지시하고 조율하는 사령관이었다. 또, 이여송과의 돈독한 신뢰관계를 통해 명군과의 원활한 소통을 만들어내는 외교관이기도 했다. 나아가 전란 중에 동요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휼하는 목민관으로 자신의 소임을 무한정 확대하고 최선을 다했다.
조정에서의 그의 위치와 애국적 충심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일화도 있다. 그가 전쟁 수행 중에 치질(痔疾)을 앓아 고통이 심해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명나라 군대의 군량미 조달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선조는 그의 지혜를 구했다. 걸을 수도 없었던 유성룡이 선조에게 “엉금엉금 기어들어가서” 식량 대비책을 아뢴다.
이에 감동한 선조가 그의 비책을 조정이 시행토록하면서 웅담과 납약을 내리고, 내의원 용운이란 사람이 “성문 밖 5리까지 나와 전송하며 통곡했다”는 것이다. 그가 거동조차 할 수 없는 병중에도 국가의 긴급 현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선조 또한 그의 경륜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 알 게 해주는 대목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국민은 언제든지 쓰라린 대가를 치른다. 자주 국방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국론이 분열되고, 국록을 먹는 공인들이 국가의 안위를 대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예기치 않은 치욕을 겪게 되는 게 엄중한 역사의 가르침이다. 지금도 한반도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긴 휴전(休戰)’이 지속되고 있을 뿐이다. <징비록>의 징계의 뜻을 오늘날에 다시 되새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추천도서 : 징비록(懲毖錄)> 유성룡 지음, 이재호 옮김, 역사의아침(2012, 8쇄). 41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