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착한 사람”이 없는 험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 좌승희 미디어펜 회장,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대한민국은 요즘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국민들끼리 나뉘어 싸우고 화합이 되지 않아 사회가 도통 불안하다. 여야 간의 반목은 물론 같은 정당 안에서도 서로 갈리고 지역 간에도 수도권과 지방으로 나뉘어 다투고 지방간에도 서로 자기이익을 챙기려고 서로 아우성이다. 도통 양보라는 것은 모르고 무얼 요구해도 들어줄 수 없는 황당한 요구를 막 무가네 식으로 한다.
모두가 잘못은 남 탓이다. 자기 잘못을 그냥 시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야가 싸우는 걸 보면 세상에 잘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데 잘못한 편은 하나도 없다. 인터넷상에서의 다툼은 참아 봐주기가 어렵다. 남을 험담하고 폄하하는 일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난다. 오직하면 인터넷에서 해코지당한 여배우들이 자살하는 일까지 일어날까. 도통 요즘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라 불러줄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 한국인은 유난히 사회주의적 평등사상이 강하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병이 심하다. 이런 잘못된 유전자를 바꿔야 한다. '흥하는 이웃이 있으면 나도 흥한다'는 발전친화적이고, 신자본주의적 발전관을 가져야 한다. 경제민주화는 모두가 망해가는 길이다. 선의로 포장됐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일 뿐이다. 안철수 새정치연 공동대표가 반기업적인 평등주의 경제민주화 입법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
2. 국민·사회통합이란 옳은 이념으로 이념을 통합하는 일이다.
그래서 최근 정부에서는 국민통합위원회라는 것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예로 봐서 잘 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보고서나 몇 권내고 넘어 갈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국민 통합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말과 좋은 의도로, 서로의 다른 이념들을 조금씩 모아 소위 중도이념을 만들면 모두가 조금씩 기분이 좋아져 국민통합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국민통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념이란 세계관이다. 세상의 이치에 대한 믿음이다.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믿음이다. 이러한 이념은 모든 국민들 개개인마다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다 옳을 수는 없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옳지 않은 이념은 옳지 않은 생각, 행동, 나아가 이 이념이 집단화되면 정치과정을 통해 옳지 않은 법과 규칙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잘못된 이념은 경제, 사회, 나아가 국가를 어렵게 한다. 어떤 이념들은 그냥 좋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옳고 그름에 대한 고민 없이, 많은 사람들의 믿음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세상은 그 큰 힘으로 제갈 길을 간다. 세상과 부딪치면 다치는 건 잘못된 이념을 믿는 개인들이며 더 나아가면 경제, 사회도 다칠 수 있다.
그래서 사회통합의 첫 번째 조건은 다수의 구성원들이 사물 즉, 세상의 이치에 대해 같은 생각과 이념을 가져야한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같은 이념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지만 사회의 안정 다수가 같은 이념을 나누어가짐으로써 사회가 안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념을 하나로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옳은 이념으로 모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념을 평등의 이념으로 통합했지만 잘못된 이념으로 통일하는 바람에 우매한 백성들만 50~60년간 고생했다. 북한은 같은 이유로 아직도 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통합의 두 번째 조건은 옳은 이념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그럼 옳은 이념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특정 이념이 옳은지 아닌지는 그 이념과 실제 세상의 변화원리(이치)간의 정합성 여부에 의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판단의 기능은 바로 지식인들의 책임이다. 진리탐구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밝혀내어 세상 사람들이 옳은 이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지식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셈이다.
예컨대 지구는 둥근데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이념은 잘못된 것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데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우기면 이 이념 또한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한때 인류는 지구는 평평하고 태양이 지구주위를 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다.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새로운 이념을 설파한 코페르니쿠스나 세상이 둥글다는 사실을 검증함으로써 세상이 평평하다는 이념을 둥굴다는 이념으로 바꾸어 내는데 기여한 콜럼버스 같은 사람들은 전 세계 인류의 이념통합을 이루는데 큰 기여를 한 지식인들인 셈이다. 국민·사회통합이란 그래서 옳은 이념을 찾아내어 국민들에 알리고 전파시켜 보다 더 많은 국민들이 같은 생각을 갖도록 유도해 내는 과정인 것이다.
▲ 현대차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이 잘되면 중소기업이 동반성장하고, 성장과 일자리 창출 등의 선순환효과를 가져온다. 혁신을 바탕으로 일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는 대기업들을 규제하고 이들의 부를 빼앗아 중소기업에 강제로 배정하려는 반시장적, 반 차별적 평등주의는 이제 지양해야 한다. 세계자동차업계 빅5로 성장한 현대차 정몽구회장이 중국 충칭시 공산당 서기와 만나 자동차 생산공장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
3. 우리 문화가 너무 사회주의적인 것은 아닌가?
왜 한국은 착한 사람들이 없는 사회가 되어 가는가? 세상은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살기 마련이다. 비슷한 사람이란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말한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기 마련이다. 왜? 그것이 서로 편하기 때문이다. 세 동네에 이사 가면 제일 먼저 동네 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 안 그렇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단 ‘도라이’가 되어 동네에 붙어 있지 못한다. 생각이 서로 다르면 다툼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생각 중에 제일 중요한 생각이 무엇일까? 바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다. 인생관이라 하기도 하고 세계관이라 하기도 하고 이념이라 하기도 한다. 인생관이 다르고 세상의 이치에 대한 생각이 다르면 같이 살기가 힘들어 진다. 이러한 개인들의 생각, 인생관, 세계관, 쉽게 말해 개인들의 이념이 모여 사회의 이념,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일컬어 문화라 부른다.
옛날 러시아 조그만 마을에 이반이라는 농부가 염소를 키우고 있었다. 이 염소가 워낙 우유를 많이 생산해서 동네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래서 어느 날 이 마을에 천사가 나타나 마을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 하였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소원이라는 것이 같은 염소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 같이 이반의 염소가 죽어버리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그래서 사회주의 종주국이 되었다는 주장도 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생각이 강한 사회는 사회주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사회주의체제가 세상의 이치와 맞지 않아 망한지도 20년 가까이 되어 가지만 우리 북쪽 형제들은 아직도 사회주의체제 속에서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출세했다는 사람들과 안 그런 사람들과의, 앞 선자와 뒤떨어진 자간의 갈등은 사회주의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해도 사회불안을 초래하고 경제를 어렵게 하여 궁극적으로 모두를 어렵게 만든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바로 이러한 부의 불평등, 지위의 불평등, 발전의 불평등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이를 가라앉혀야할 정치는 오히려 이를 증폭시키고 있다. 현재와 같은 불평등을 어느 정도 용인해야한다는 생각과 지금의 불평등은 도가 지나치니 이를 보다 평등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서로 끝없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는 사회주의 중국보다도 더 사회주의적이라는 자조적인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아마 이 농담이 진담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사회의 문화는 대단히 사회주의적이다.
남한과 북한이 다른 제일 중요한 점은 뭔가? 이념이 다른 것이다. 북한 사람들이 믿는 세계관, 인생관과 남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세계관, 인생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의 이념은 모두가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반면 남한의 이념은 요즘 큰 혼란 속에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수가 어느 정도의 차등, 불평등은 용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러나 왜 북한이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이 다 망했는데도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아마도 우리의 의식 속에 흐르는 문화유전자가 남이든 북이든 너무 사회주의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우리사회는 너무 평등을 지향해서 차이나 차등을 용인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회가 다양성이 적고 획일화되고 유행도 한 방향으로 너무 쏠리는 경향이 있다. 획일화되는 경제는 역동성을 갖지 못한다. 오늘날 한국경제의 어려움도 다 우리사회를 덮고 있는 ‘모두 평등해야 된다“는 이념과 이를 실천한다는 각종의 평등주의적 규제들 때문인 것이다.
대기업에 대한 규제, 수도권에 대한 규제, 부자들에 대한 폄훼, 중소기업에 대한 우대, 지방에 대한 우대, 취약계층에 대한 우대, 평준화교육, 노조에 대한 우대 등등 한국 사회의 핵심 정책이슈들이 다 평등의 이상 실현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다 경제와 일자리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4. 평등의 이념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모순론에서 왔다.
세상이 평등해야 된다는 생각의 뿌리는 어디인가? 원래 인간은 시기심이나 경쟁심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다 더해 인류의 사상사도 세상이 평등해야한다는 이념을 가르쳐 왔다. 각자의 역할에 따라 그리고 노력에 따라 그 얻는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가장 평범한 세상의 이치일터인데도 다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념이 왜 그렇게 넓게 전 세계에 퍼져 있는가?
1848년 칼 마르크스라는 학자는 국제공산주의자들의 모임에서 발표된 공산당선언을 작성하였다. 이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세상은 불평등이라는 모순을 안고 있다 하였다. 이 세상은 가진 자(자본가)가 못 가진 자(노동자)를 착취하는 계급투쟁의 장이며, 그래서 부의 불평등이 초래된다고 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궐기하여 자본주의사회를 무너뜨리고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사회를 세워야 한다 하였다. 그는 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모순 때문에 결국 멸망할 운명이지만 무력투쟁을 더 선동하였다. 무력으로 공산혁명을 통해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 삼성전자가 11일 스마트폰 신제품 갤럭시 S5의 글로벌 출시를 기념하는 행사를 갖고 있다. 우리 국민들도 발전친화적 유전자로 전환해야 한다. 대기업이 잘되면 어떻게든 끌어내리고 규제를 가하는 평등주의와 사회주의 유전자를 버려야 한다. 평등주의를 버려야 한국경제가 산다. |
이 주장을 따른 러시아를 위시한 많은 나라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여 지난 수십년간 실험을 하였으나 그 결과는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참담한 실패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모순관은 우리 모두의 생각 속에 살아 있다. 사회주의를 거부한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도 사회주의 자체를 거부했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을 수긍하고 이를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정자본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라는 사회주의 이념을 가미한 혼합경제체제를 추구해 왔다.
사회주의권과의 대결 속에서 그들의 ‘평등한 사회 실현’이라는 그럴듯한 이념에 대항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평등의 이념을 경제사회정책 속에 담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21세기 인류의 보편적인 자본주의관은 이 체제가 불평등하다는 칼 마르크스의 이념을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고쳐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의 뿌리는 그래서 칼 마르크스에서 온 것이다.
오늘날 길거리에 나가 ‘이 세상이 모순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소리쳐 보라. 아마 십중팔구는 모순이라 할 것이다. 이 생각의 뿌리는 바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모순론에 닿아 있는 것이다. 인류의 사상사에서 마르크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한 그 수많은 사상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의 유령은 오늘날 한국을 포함한 세계 모든 나라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국민들 간의 이념 대립과 분열이 다 여기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안에서의 끝없는 투쟁과 이를 통해 자기 몫을 챙기고 상대방을 넘어뜨려야 내가 산다는 생각, 더 나아가 이러한 투쟁은 이 세상의 모순을 만들어내는 기존의 법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생각들의 뿌리가 바로 마르크스 자본주의 모순론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 모순관이 21세기 인류의 가장 보편적 생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5. 자본주의 신(新) 발전관: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나도 흥한다.”
그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관은 옳은 것인가? 그래서 마르크스적 자본주의는 이미 본인이 분석한데로 종국적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우선은 인류가 250만년도 더 되는 세월 동안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분업과 전문화원리에 기초한 교환경제시대, 즉 수렵과 채집의 시대를 멸망하지 않고 생존해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번영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마르크스적 자본주의관이 잘못되었음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흥미롭게도 최근의 새로운 과학관에 의하면 만일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호혜적 만남이 없는 계급투쟁과 착취가 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습이라면 이 체제는 결코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마르크스의 세계관은 모순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라는 허상을 그려놓고 이를 타파하기위한 공산주의라는 또 다른 체제를 그리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이 우리가 그 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고 보는 새로운 과학관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부분이 합쳐 부분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복잡한 세상은 부분만을 보면 전체를 알 수 있다는 기존의 과학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과학관을 복잡성과학(complexity science)이라 하며, 기존의 과학관을 환원주의(reductionism)라 한다. 환원주의란 아주 작은 부분을 잘 분석하면 그 전체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복잡성과학은 단순히 부분을 알고 이를 합친다고 전체를 알 수는 없다고 본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 전체는 부분과 달리 더 복잡한 고차원의 속성을 가진다고 보며, 이런 현상을 창발현상이라 부른다. 창발현상을 가져오는 원천은 바로 부분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창출되는 소위 시너지효과에서 나온다고 한다. 따라서 부분만을 분석해서는 전체를 알 수 없다. 세상을 이해하려면 사물을 유기적 전체로 보는 전일주의적(全一主義的, wholistic) 관점이 필요하다.
이 세상 만물은 서로 다른 개체끼리 만나 힘을 보태어 훨씬 더 큰 힘, 즉 시너지를 창출함으로써 부분과는 다른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 나간다. 바꾸어 말하면 더 좋은 짝을 만나기 위한 경쟁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더 좋은 이웃을 만나 힘을 합치지 않고 더 높은 질서를 창출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생명현상은 어디서 왔을까? 인간의 육체는 세포로 구성되지만 단순한 세포의 합이 인간의 생명현상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인간의 생명현상을 이해하려면 인간을 그 전체로 이해해야한다. 세포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기는 신비한 시너지 효과가 바로 생명을 창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효과를 제거하면 세포덩어리는 남지만 생명현상은 사라진다. 생각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고뇌하는, 에너지를 섭취하고 배설함으로써 삶을 유지하는 생명현상은 창발현상이다.
자본주의 사회나 시장경제의 작동원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경제사회발전이란 더 좋은 짝을 만나 더 큰 힘을 창출함으로써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질서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마차를 타던 경제가 자전거를, 자동차를, 기차를, 비행기를, 우주선을 타는 사회로 발돋움해 나가는 과정이야 말로 개인들이 힘을 합쳐 강한 조직을 만들어내고 보다 훌륭한 개인들과 조직들이 힘을 합쳐 시너지를 창출함으로써만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는 계급투쟁이나 착취가 아니라 협력을 통한 시너지창출과정을 통해 변화,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다.
▲ 삼성은 열심히 일해서 투자와 일자리창출 법인세납부로 국가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스마트폰 갤럭시로 세계시장의 미국의 자존심 애플과 치열하게 시장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는 개인과 기업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우대하는 시장친화적 차별화경제만이 세계적인 기업을 탄생시키고, 양극화도 해소할 수 있다. 이건희 삼성회장이 외국출장을 마치고 공항에 들어서고 있다. |
여기서 나의 발전을 가속화시키는 길은 나보다 훌륭한 이웃을 두어야 한다는, 즉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나도 흥한다”는 신(新) 자본주의경제 발전관이 도출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변화는 선발자가 후발자를 착취해서가 아니라 후발자가 선발자를 무임승차하여 베낌으로써 동반 성장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남의 노하우를 모방하고 베낌으로써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앞선 선각자, 그것이 자본가이든, 혁신가이든, 부모든, 선생님이든, 선배든, 더 나은 동료든, 더 나은 후배이든, 이들을 청산함으로써가 아니라 이들을 역할 모델로서 이웃으로 두고 “베낌”으로써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관은 복잡한 세상의 이치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더 좋은 이웃이 없이 모두가 같고 평등한 사회는 시너지를 창출할 수가 없어 영원한 휴식을 벗어날 수가 없다. 같은 세포끼리의 만남은 세포덩어리를 만들어낼 뿐이지 생명을 창출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복잡성과학의 기본원리이다. 앞선 자를 청산하여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말로는 이미 정해진 길이었다.
이 세상은 어두운 면도 있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배우고 도움으로써 살길을 찾는 그래서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변화무쌍한 복잡한 세상이다. 차이와 차등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훌륭한 이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는 흥하고 역으로 평등을 내세워 흥하는 이웃을 청산하려는 사회는 필히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새로운 과학관의 시사점이다. 이제 인류는 마르크스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는 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칼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6. 경제발전이란 발전친화적 문화유전자의 복재·전파를 통한 동반성장과정이다.
왜 우리는 항상 좋은 사람, 좋은 이웃만을 찾아 나서는가?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도, 이웃을 사귐에 있어서도, 이사를 감에 있어서도, 시장에서 거래처단골을 정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항상 아무렇게나 선택하지 않고 마음에 맞는 훌륭한 사람과 지역과 회사만을 선택한다. 아무나 평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자기 마음에 드는 이웃들을 찾아 세상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일류학교를 선호하고 일류 기업을 선호하고 일류지역을 선호할까? 모두다 결국 훌륭한 이웃과 반려자들을 찾기 위함인 것이다.
왜 그럴까? 이를 통해 인생의 성공 노하우를 서로 나누고 성공의 문화유전자를 공유하기 위함인 것이다. 나보다 훌륭한 배우자를 두면 나도 가문도 발전하고 나보다 훌륭한 이웃과 벗과 동창을 두면 내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흥하는 사람의 주위에는 항상 흥하는 이웃이 많고 역으로 흥함이 없는 이웃의 주위에는 역시 흥함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인생은 남을 따라 배움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은 무임승차이기도 하다. 태어나 부모한테 공짜로 키움을 받고, 형제자매로부터 공짜로 배우고, 사회로부터, 스승으로부터, 친구로부터, 역사의 선각자로부터 인생의 성공노하우를 공짜로 배운다. 이 과정이 바로 문화유전자의 복제, 전파과정이다. 훌륭한 이웃이 없이 너도 나도 사회도 발전할 수 있는 길은 세상에 없다. 나보다 더 훌륭한 이웃을 두고 그로부터 더 배우지 않고 내가 한 발짝이라도 더 발전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다.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나도 흥한다”는 발전친화적인 문화유전자를 채화한 사람은 그 만큼 더 남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고, 이러한 문화유전자를 사회 안에 더 많이 퍼뜨리는 사회는 그 만큼 더 발전할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흥하는 이웃의 노하우가 모두에게 복제, 전파되고 그래서 모두가 동반 발전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은 칼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가진 자의 못가진자에 대한 착취가 아니라 후발자가 선발자를 무임승차하여 같이 발전하는 “모두 다 같아지지는 않지만 다 같이 발전하는” 동반성장의 과정이다.
7. 흥하는 이웃을 키워내는 사회만이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그래서 인생의 무임승차자, 혹은 무단복제자이다. 그럼 우리가 무임승차 혹은 무단 복제할 흥하는 이웃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선진국이라는 사회에는 흥하는 이웃들이 넘치는데 후진국이라는 사회에는 흥하는 이웃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무임승차를 하고 싶으나 무임승차할 대상이 없으니 너도 나도 사회도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기 어려운 것이 후진국의 현실이다. 흥하는 이웃은 그렇게 쉽게 어디에서나 넘쳐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흥하는 나라와 어려운 나라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한 국가운영전략이란 결국 어떻게 해서 흥하는 이웃들이 넘쳐나게 할 것인가의 전략인 셈이다. 바로 이것이 선진국을 지향하는 모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풀어야할 제일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간단하나 실천은 어렵다. 발전을 이루어 선진국이 되기 위한 첫째 과제는 흥하는 이웃을 키워내는 것이며 이를 위해 사회가 해야 할 일은 흥하는 이웃들에게 불리하지 않게 경제, 사회제도와 분위기를 만들어 내어, 모든 사람들이 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훌륭한 사회지도자가 되고, 부지런히 일해 부를 쌓고, 인생에 있어 남의 모범이 되는 일을 더 열심히 하도록 유인해 내는 일이다. 사회를 모순이라 생각하고, 매사에 반대나 하고, 내 실패가 남 탓이라 생각하고, 흥하는 사람들을 흉이나 보고 손가락질이나 하며 배울 생각은 안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흥하는 이웃들은 안 생기며 경제사회는 정체되고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회구성원들의 잘못된 이념을 바로 잡지 않고 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 사회의 문화유전자를 발전 친화적으로 바꾸어 내야 한다. 즉 사회 다수의 사람들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거나 이반의 염소가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웃이 흥해야 나도 흥한다”는 믿음을 가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여기서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을 바꿔내는 것은 교육과 설교만으로 되지 않는다. 지도자부터가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너와 내가 다 같이 흥한다는 발전친화적인 이념을 믿고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 역사에는 많지 않지만 이런 지도자를 가진 사회가 발전을 이룬 예가 있다. 싱가포르의 이광요 전 수상이 그렇고 우리나라의 개발연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랬다.
8. 국민·사회 통합의 길: 문화유전자를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나도 흥한다”는 발전 친화적 유전자로 바꿔내야 한다.
요즘 한국의 문화유전자는 너무 평등주의적이다. 흥하는 이웃이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다 같이 가난한 것은 참지만 어느 누가 뛰어나게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은 참지 못하는 형국이 되었다. 국민들이 서로 반목하고 화합이 안 되고 매사에 힘을 모으지 못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생각, 이념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흥하는 이웃에 대한 생각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흥하는 이웃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나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모두 흥하는 자가 되고자 열망하지만 흥하는 이웃을 대접하기는 고사하고 청산하려고만 하니 흥하는 이웃은 안생기고, 그래서 너도 나도 흥하는 자가 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감히 대한민국이 하루빨리 발전 친화적 이념인 새로운 자본주의 발전관으로 그 문화유전자가 바뀌어야 선진도약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최근 이러한 주장을 담은 “경제발전의 철학적 기초”(2012, 서울대 출판문화원)를 출판하였다.
다시 말해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나도 흥한다”는 새로운 자본주의 세계관이 한국사회에 퍼져나갈 때라야 대한민국의 세계일류 국가 도약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유전자가 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대한민국에는 한국 일류를 넘어 세계 일류들이 넘쳐나고, 흥하는 이웃들 간에 서로 시너지를 창출함으로써 인구는 세계 1%이하이지만 그 경제적, 사회적 힘은 10%, 20%로 창발되어 동북아, 나아가 세계의 리더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마음을 열고 나보다 더 나은 이웃으로부터 더 배우지 않고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인지 자문해 보면 한국사회가 나아가야할 길은 쉽게 보일 것이다. 우리가 갖는 규모의 한계를 벗어나는 길은 흥하는 이웃을 옆에 두고 배움으로써 너도 나도 같이 창발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실현하는 책임은 국가 리더들의 몫이다.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은 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여 세상의 참 진리가 무엇인지 찾아내어 무엇이 옳은 이념인지를 밝혀내는 일을 해야 한다. 국민들에게 무엇이 옳은 생각인지를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면, 천동설이 주류였던 시절 지동설을 주장하여 곤욕을 치룬 코페르니쿠수의 역할을 자임하는 지식인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한국지식인 사회는 제 할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할 것이다. 한편 허구헌날 불평등한 이 세상은 모순이라고 국민들에게 잘못된 자본주의관을 심어주고, 그래서 정치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준다는 감언이설로 국민들의 표를 구걸하는 정치인들만이 있다면 이 또한 정치의 정도는 아니라 할 것이다. 언론 또한 국민들의 이념의 옳고 그름을 밝혀내고 옳은 방향으로 모으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정론을 편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정부 또한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나도 흥한다”는 신 자본주의발전 이념을 수용하고 국민들에 전파하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정책적으로는 경제사회제도와 사회 분위기를 흥하는 이웃에 불리하지 않게 만들어내어야 사회를 흥하는 국민들로 넘치게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국민 너도 나도 서로 힘을 모아 더 큰 힘을 만들어내어 창발할 수 있도록 해야 선진일류국가 도약이 가능해 진다. /좌승희 미디어펜 회장,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