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71)-그리스 문명을 이식한 로마의 인문학자들
수에토니우스(69/75?~130) 『로마의 문법학자들』
로마 문명은 그리스 문명이 낳고 길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가 로마의 속국이 된 이래 로마로 이주한 숱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노고가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물론 키케로, 바로,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와 같은 로마 공화정 시기의 탁월한 철학자들이 그리스 학문을 수용하고 로마의 것으로 만들어 경쟁력을 갖게 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로마 제정(帝政)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문학과 철학, 자연학 등 제 학문적·사상적 축적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았다.
로마시대의 문법(Grammatica)는 현대적 의미의 '문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읽기, 쓰기와 관련된 기초 교육 프로그램을 지칭했다. 따라서 문법학자들은 문학과 철학의 텍스트를 갖고 교육하는 교육자이자, 번역가, 저술가들을 총칭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스의 학문을 로마화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이들은 바로 로마의 문법학자들이었다. 한마디로 문법학자들은 그리스의 자유교양 교육을 계승하여 로마의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을 정초한 인문학도라 할 수 있다.
수에토니우스는 로마 공화정과 제정 초기에 활약하던 주요한 문법학자들과 수사학자들을 모두 모아 짤막짤막한 전기를 남겼다. 수에토니우스는 다양한 전승 문헌을 토대로 그들의 학문적 업적과 생애의 의미 있는 스토리들을 기록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로마 문법학자들의 학문 정향과 그들이 그리스 학문들을 모방하면서 어떻게 수용하고 가르쳤는지 확인하게 된다.
문법학자 가운데는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를 저술하는 데 밑받침 역할을 했던, 로마 역사 《연대기》를 쓴 엔니우스, 문법학을 로마에 처음으로 도입한 크라테스 말로테스, 문법을 정립하고 성장시킨 세르비우스 클로디우스도 있다.
로마에 문법학이 도입되게 된 계기는 우연한 사고였다. 크라테스 말로테스는 원래 에게 해 연안의 소아시아 지방,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왕의 사절로 로마의 원로원을 방문했다가 팔라티움 지역의 하수구에 빠져 정강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는 부러진 다리를 치료하는 동안 로마 시민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로마인들이 이를 모방하게 되면서 문법학이 태동되었다는 것이다.
문법학자로 이름을 날린 사람 가운데는 그리스에서 로마로 끌려온 노예출신이 꽤 있었다. 또 주인의 은덕으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난 해방노예도 많았다. 말이 노예이지, 이들은 사실 그리스의 자존심 강한 자유민들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속국이 된 그리스인들이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한 것은 시대가 낳은 비극이었다.
철학, 수사학, 문법 등에 두루 박학다식했던 아우렐리우스 오필루스와 카이사르의 문법교사로, 또 키케로와 저명인사들에게 모의연설을 가르치며 수사학 교사로도 인기를 끌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 역시 해방노예 출신이었다. 작시(作詩)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발레리우스 카토도 역시 해방노예였다고 한다.
또 아테이우스 필로로구스처럼 스스로 문헌학자(philologus)라고 칭한 이도 있다. 그는 그리스 문학에서 일가를 이루고 라틴 문학에 대해서도 일정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부했다. 또 그는 여러 학문에 박학다식했다고 전해지는데, 자신이 800권을 엮고 정리했다고 밝히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키케로와 돈독한 우정을 나눈 쿠르티우스 니키아는 키케로가 그리스 학문을 쉽게 습득하도록 헬라어 번역 작업을 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키케로가 그의 절친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니키아와 관련하여 말한 한 대목이다. "내가 만약 그의 학문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나는 그와 함께 보내고 싶네." 이는 니키아가 학문적으로 키케로에게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동시에, 그리스 문명을 수용해 나가는 데 있어 문법학자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해방노예의 후예로 독특한 강의 방식으로 이름을 날린 베리우스 플라쿠스도 눈길을 끈다. 그는 학생들의 재능을 훈련시키기 위해 경쟁 체제를 도입했다. 학생들에게 미리 주제를 제시하고 가장 탁월한 글을 작성한 학생에게 미장(美裝)의 희귀 고서를 상품으로 주었다고 한다. 이 덕분에 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손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또 엄청난 강의료를 받는 강사로 인기를 누리고 천수를 다했다.
로마의 여러 문법학자들은 크게 두 개의 학파로 나뉘어져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엄격한 규칙과 체계, 원리를 중시한 스토아학파와 자율, 예외, 관찰을 중시한 바로의 학파였다. 스토아학파의 노선을 걸은 대표적인 문법학자는 오르빌리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등이 있고, 바로 노선을 따른 이는 바로와 플라쿠스가 있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면서 학문을 발전시켰다.
대부분의 문법학자들은 박학다식하고 유창한 말솜씨로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수강생들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받았다. 렘미우스 팔라이몬 같은 이처럼 엄청난 수강료를 받는 이도 많았고, 학생들에게 체벌을 마구 휘둘러 호라티우스가 "미친 몽둥이"라고 부른 오르빌리우스 같은 이도 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학문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 많은 돈을 쓰고, 또 노예 출신의 그리스 출신의 문법학자들의 체벌이나 훈육에 자녀들을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학문적·문화적으로는 그리스에게 정복된 셈이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수에토니우스의 이 작품을 통해 그리스 문명의 성취를 열정적으로 섭취하여 자신의 문명을 살찌우려 애쓰던 로마인들의 모습과 다양한 재능을 바탕으로 로마 사회에서 자신의 철학과 학문적 성과를 마음껏 발휘했던 그리스 문법학자들의 활약상을 살펴볼 수 있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로마의 문법학자들》, 안재원 주해, 한길사(2013). 320쪽.
[박경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