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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방-'독도는 우리땅' 이사부(3)]'동해왕' 20대에 실직 군주 부임

2017-06-11 08:00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그럼에도 우린 때때로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앎과 이해일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란 가수 정광태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사부(異斯夫)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사부 장군은 경상북도 동부의 작은 부족국가 신라를 한반도의 주역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또 다양한 종족을 하나로 통합해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인이기도 하다. 독도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 고취를 위해 미디어펜은 이사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김인영(언론인)씨의 '이사부를 찾아서'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異斯夫③] '동해왕'-20대에 실직 군주 부임

동해 제해권 장악 ... 북방영토 확장의 거점

1) 실직군주 이사부

김인영 언론인

이사부(異斯夫)의 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지증왕 6년(서기 505년)이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지증왕 6년(505년) 봄 2월, 임금이 몸소 나라 안의 주(州)·군(郡)·현(縣)을 정했다.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다. 군주(軍主)의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이사부의 생몰연대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가 우리나라 역사의 정서로 받아들여지는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실직 군주였다. 그 때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에 외직 군사 수장을 맡으려면 적어도 성년이 된 20세는 돼야 했다.

20대초는 한창 팔팔할 나이다. 그는 지증 임금이 처음으로 설치한 군주(軍主) 자리에 임명된다. 그것도 수도 서라벌에서 180km(450리) 떨어진 실직주(강원도 삼척)라는 변경의 야전 사령관 자리를 맡는다.


삼국시대 초기 강원도 영동지방에는 예(濊), 실직(悉直), 말갈(靺鞨) 등의 부족국가들이 존재했다. 2세기초 신라 파사 임금이 독립국이던 실직국(悉直國)을 정복한 이후 영동지방은 예와 말갈의 공격을 수차례 받았고, 4세기 이후 고구려가 영동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이들 소부족을 놓고 두 나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신라는 4세기 중엽에 강원도 동해안에 대한 지배체제를 구축한 것은 4세기 중엽이었다.

내물이사금 40년(395년)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했다. 병사를 보내 실직(悉直)의 벌판에서 그들을 크게 쳐부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하지만 신라가 강원도 영동지방까지 영토를 확대한 것은 잠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의 요청으로 군사 5만을 동원해 가야까지 진군하면서 신라는 동해안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된다. 신라는 왕족인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면서 경북 흥해까지 동해안 영토를 고구려에 내주게 된다.

5세기 중엽에서 말까지 강원도 동해안을 놓고 신라와 고구려의 밀고 밀리는 각축전이 전개된다. 전투 구역은 북으로는 비열성(함경남도 안변)에서 남으로는 미질부(경상북도 포항시 흥해)까지였다. 그 중심에 실직과 하슬라가 있었다.

1) 고구려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실직(悉直)의 들에서 사냥하고 있었는데, 하슬라성(何瑟羅城)의 성주 삼직(三直)이 병사를 내어 습격해 그를 죽였다. (눌지 34년, 450년 7월)

2) 임금이 비열성(比列城)에 행차해 병사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내려줬다. (소지 3년, 481년 2월)

3)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狐鳴)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했다. 우리 병사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자 니하(尼河)의 서쪽까지 추격하여 쳐부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소지 3년, 481년 4월) <삼국사기 신라본기>

450년에서 481년까지 30년 이상 동해 1천리 바닷가에 고구려군과 신라 사이에 혈투가 벌어졌다. 고구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눌지마립간은 재위 후반기에 고구려와의 우호관계를 깨고 영동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소지왕 시대에는 고구려는 신라와 적대적인 예와 말갈을 연합세력에 끌어들여 영동지방을 침공했고, 이에 신라는 백제와 가야의 지원을 얻어 고구려에 대항하는 다국적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2) 이사부의 임무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부임하기 앞서 소지 임금이 함경도 안변까지 갔지만, 곧이어 고구려가 반격해 포항시 흥해까지 밀고 오는 대혈투가 동해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영동지역에 오랫동안 터를 닦아온 원주민인 예족과 말갈족은 고구려에 붙어 신라에 적대적이었다. 정복당한 실직국인들은 동족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대응했을 것이다. 고구려와 말갈이 단숨에 서라벌 인근인 미질부성(흥해)까지 밀고 내려올 때 그 중간에 있던 실직 원주민의 협조가 있었을 것이다. 소지 임금때 전투에 승리해 간신히 영동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지만, 언제 고구려에 동조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시기였다.

지증 임금이 국가체제를 정비해 주군현(州郡縣) 제도를 만들고 실직주에 처음으로 군주(君主)를 둔 것은 전략적으로 동해안에 대한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영동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자는 의지였다. 이 곳에 첫 군주로 가장 믿을만한 조카 이사부를 보냈다.

실직군주 이사부의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실직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 북으로는 고구려와 예(말갈)의 공격을 방어하고, 섬나라 우산국을 복속시켜 동해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삼척시 오분동 고성산(오화리산성, 요전산성) 정상에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에 관한 행적을 기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면 군주(軍主)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이사부가 실직 군주가 되고 19년후인 법흥왕 11년(524년)세워진 울진 봉평신라비에는 실지군주(悉支軍主)와 실지도사(悉支道使)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실지는 실직을 의미한다.]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파견되기 직전인 501년(지증왕 2년)과 503년(지증왕4년)에 각각 세워진 포항 중성리비와 영일 냉수리비에 지방행정관을 의미하는 도사(道使)라는 표현이 나온다.

도사(道使)는 현지에서 세금을 걷고 백성의 관리하는 행정직이고, 군주(君主)는 외적의 침공을 막고 때론 공세적으로 주변을 공략하는 전투조직의 수장을 의미한다. 신라는 외직을 임명할 때 군사직과 행정직을 나눠 운용했다.

신라가 동해안 일대를 영토화하면서 서라벌 출신(王京人)의 행정관을 보내 직할통치를 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갈 때, 실직에는 이사부와는 별도로 누군가를 도사에 임명해 파견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그 도사는 실직주의 행정을 관할하고, 이사부는 서라벌에서 파견한 군대를 관장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게 정설이다. 이사부는 현지인으로 구성된 군을 관할했다기보다, 중앙에서 파견한 군을 맡았고, 병졸 또는 하위직에 현지인을 썼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시설이 미비한 신라시대에 경주에서 삼척까지 사람을 보내 연통을 넣거나 물자를 실어올 때 적어도 몇주는 걸렸다. 또다른 왕경인이 실직 도사를 맡았더라도 왕족 가운데서 최고의 실력자가 국경에 부임했으므로, 왕국 수도의 지시, 보고 없이도 통치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이사부는 동해안 일대와 동해 바다를 관장하는 육군과 해군의 최고 사령관이었고, 식민지 총독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후세는 그를 '동해왕'이라고 부른다.

3) 동해 제해권의 거점

군주(軍主)의 위치는 전략 변경에 따라 옮기기도 한다. 이사부가 지증왕 13년(512년)에 하슬라(阿瑟羅, 강릉)의 군주가 된다. 지증 임금은 신라가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에 대비해 동해안 군사 거점을 삼척에서 강릉으로 북쪽으로 이동시켰고, 성공적으로 실직군주의 임무를 수행한 이사부를 하슬라 군주로 발령한 것이다. 이사부의 내륙 관할 영역이 울진에서 삼척, 강릉까지 확대된 것이다.

당시 경주에서 삼척까지 육로는 험난했다. 동해안을 따라가면 곳곳에 해안절벽이 가로막고 있고, 경상도 내륙을 거쳐 태백산을 넘어가는 길은 그 당시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길은 하나 밖에 없다. 바닷길이다.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임명되던 해 겨울에 지증왕이 선박이용 제도를 개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라가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의 동해안을 직할 통치하고, 나아가 울릉도를 복속시키고 왜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사전준비였던 것 같다.

삼척은 동해안 교역로의 중심에 있었다. 신라에 의해 멸망한 실직국은 멀리 남해안의 금관가야에서 북으로는 옥저, 예국까지 철광석을 무역하는 해상왕국이었다. 실직인들은 선박 건조능력은 물론 항해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파악된다.

삼국시대 초기에 함경남도에서 강원도, 경상북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는 동이(東夷)족의 한 갈래인 예족(濊族)이 지배하고 있던 영역이었다. 함경남도 안변에서 강원도 속초, 강릉, 삼척, 경상북도 울진, 영해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부임했을 때 신라와 예국의 경계선은 삼척과 강릉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부가 실직에서 하슬라로 임지를 바꾼 505년에서 512년 사이 7년 동안에 그의 공적을 언급한 사료가 없다. 공백이다.

하지만 실직 군주 이사부는 우산국을 공략하기 앞서 삼척에서 강릉 이북까지 내지화(內地化)한 것은 분명하고, 북쪽으로 양양,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을 넘어 평창의 니하(泥河)를 재탈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군을 강릉까지 밀어붙인후 이사부의 다음 목표는 왜(倭)와 연합해 신라에 저항하는 우산국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동해를 내해화(內海化)하기 위한 것이다. 그동안 동해는 신라의 바다라고 할수 없었다. 지증마립간 이전인 소지마립간까지 왜는 수시로 안방처럼 신라를 공격했고, 임금이 거주하는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노략질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거나 끌고갔다.

지증왕의 뜻은 왜구 소탕에 있었다. 드디어 이사부는 임금의 뜻을 받잡아 동해로 눈을 돌렸다. /김인영 언론인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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