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근 20여 년 전 졸저, '명령으로 안 되는 경제'(1999년 7월, 나남)를 출간하였다. 당시 외환위기극복과 선진화를 위한 정책고언을 담았다. 정부의 서슬 푸른 획일적 부채구조조정명령으로 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기업들이 정부의 눈치만 살피고 자발적인 자기변신은 엄두도 못 내던 시절, 경제는 명령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제언을 담았다.
이제 세삼 이를 회상함은 지난 20년 동안 한국경제운영이 이에서 크게 개선되지도 못했지만 이제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오히려 본격적으로 "명령경제" 시대가 도래할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부채구조조정이 아니라 "경제민주주의"라는 명분하에 비정규직의 정규직전환을 요구하는 등 노사관계에 개입하고, 경제왜곡의 소지가 큰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려 청년일자리문제를 해결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소위 기업생태계의 균형을 위해 기업경영문제에 개입하는 등 구체적인 간섭과 명령으로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 30여 년 동안 거의 모든 정부의 단골메뉴로 등장했던 대기업의 기업지배구조개선이라는 기업경영문제에 대한 간섭과 명령이 더 심해질 전망이다. 그리고 부동산시장에 대한 간섭과 명령도 더 심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의 요구는 요란하지만 민간부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명령경제란 시장의 작동원리나 경제주체들이 왜 특정 경제행위를 하는지에 대한 인센티브구조 등 문제의 원인을 살핌이 없이 특정이념이나 이상을 내걸고 강제로 규율하여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려하는 경제운영방식을 말한다.
문제는 명령경제식 운영이 당장은 성과를 보는듯하고 때때로 속 시원하기도 하지만 지속가능하지 않고 결국 경제를 죽이는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게 된다는 점이다. 경제평등사회를 지향했던 명령경제의 전형인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몰락이 그러하고, 전후 사회주의에 대항한다고 수정자본주의니 사회민주주의니 하여 60여년을 경제평등의 이상을 위해 과도한 재분배복지정책에 의존해온 서구 선진자본주의시장경제가 저성장·양극화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민주화이후 지난 30여년 넘게 정의와 균형과 평등의 이상을 내걸고 명령으로 국가균형발전과 격차 없는 평등사회를 지향해왔지만 이제 역설적으로 저성장과 불평등의 심화에 직면하게 된 것이 그러하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해도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면 만사휴이가 된다.
18세기 영국의 사상가 사뮤엘 존슨은 지옥의 문은 선의로 포장되어있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아마도 당장의 효과만을 생각하면 명령으로 해치우는 게 좋겠지만 그 이후 경제가 져야할 부담을 생각하면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 동안 재분배복지정책을 뒷받침해온 세계 경제학계 마저 이제 전 세계가 부딪친저성장·양극화문제에 대해 답은 고사하고 "신 정상상태"이라는 대책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경제를 명령으로 다스릴 수 있다면 못 사는 나라는 왜 생길 것이며, 잘 산다던 나라들은 왜 모두 장기저성장과 불평등의 심화에 직면하겠는가? 국민들과 기업들의 마음을 잘 읽어야지, 평등의 이상에 치우쳐 실제 경제주체들의 본뜻인 '남보다 더 잘살고 싶다'는 숨은 경쟁의도를 읽지 못하고 모두 같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명령하기 시작하면 필시 정책은 실패하고 경제는 저성장과 양극화로 반격한다. 남보다 더 잘 살고 싶어 하는 의도를 잘 선용하여 같아지지는 않지만 모두 번영하는 경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경제정책의 제일의 과제임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의 난마같이 얽인 한국경제 어려움의 원인은 경제문제를 정치적으로 재단해온 그동안의 경제민주화니 경제민주주의니 하는 "경제의 정치화" 패러다임 속에 무절제하게 도입한 정치색 짙은 평등주의적 명령과 간섭 때문임을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진은 문재인대통령이 지난달 24일 청와대 여민관에 설치된 일자리상황판을 직접 설명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오늘날 한국에 있어 초미의 정치적 관심은 경제평등의 달성이다. 예컨대 경제민주화니 경제민주주의도 미사여구로 포장하지만 결국 격차 없는 평등한 경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는 평등의 대상이 아님이 세상의 이치이다. 우리 모두는 겉으로는 평등을 외치지만 돌아서면 혼자 잘 될 길을 찾는 이중적 성격의 화신이다.
물론 이것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힘이 되기도 한다. 중소기업육성을 소리높이 외치는 정치인이나 지식인도 시장에 가면 항상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기업의 제품만을 사지 중소기업제품을 사지 않는다. 삼성청산 외치는 정치인도 자식의 삼성취직을 원한다. 학교격차 없애자고 외치는 학생, 학부모도 집에서는 좋은 학교 갈 궁리에 몰두하는 것이 세상이치이다. 따라서 경제주체간의 경제적 차등과 우수한 기업에의 경제력 집중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우리 모두의 선택결과이다.
불평등이나 격차는 겉으로는 평등을 요구하면서도 돌아서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개인이나 기업과 학교만을 선택하는 우리 모두의 이기적인 경제적 선택본능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평등한 경제란 아예 실현가망성이 전혀 없다. 물론 우리 모두의 선택본능을 무력화시켜 사회주의 경제를 하겠다면 모르지만, 이 경우 경제의 몰락을 피할 수 없음은 이미 역사의 교훈이 되었다.
그렇게 소망하여 명령하고 규제해도, 지역균형이 안되고, 비정규직도 안 없어지고, 대기업·중소기업균형도 안되고, 일자리도 원하는 만큼 안 늘고, 부동산투기는 자꾸 되살아나고, 빈부의 격차도 줄어들지 않고, 학교격차도 안 없어지는 이유가 바로 세상이치에 안 맞는 명령을 내리기 때문인 것이다. 정책 대상자들인 우리 모두의 입장에서는 그런 명령을 따르면 결국은 손해가 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모두 반대로 행동하거나 혹은 전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존의 노사관계법이나 관행 등 현재의 경기규칙(인센티브)하에서는 기업들이 정규직을 최소화해야 생존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정부가 경기규칙은 바꿔주지 않고 모두 정규직으로 하라 명령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그 결과는 너무나 명약관화하다.
명령을 회피하기 위한 편법을 쓰거나 아니면 명령을 따르고 손실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손실을 감수하면서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지는 아무도 쉽게 알 수 없다. 개인과 기업들이 왜 정치권이 원하는 일에 반하는 길로만 가는지 그 원인이 되는 인센티브구조를 살피지 않고 더 강제하여 일거에 정치적 목표들을 달성하는 날 이미 기진맥진한 한국경제에는 조종이 울릴 것이다.
사실, 지금의 난마같이 얽인 경제어려움의 원인은 경제문제를 정치적으로 재단해온 그동안의 경제민주화니 경제민주주의니 하는 "경제의 정치화" 패러다임 속에 무절제하게 도입한 정치색 짙은 평등주의적 명령과 간섭 때문임을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해답은 물론 이들 정치적 명령과 규제간섭들을 걷어내어 왜곡된 경기규칙을 바로 잡음으로써 모두가 자기책임 하에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하는 데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만이 한국경제가 같아지지는 않지만 모두 같이 동반성장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좌승희 미디어펜 회장·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좌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