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규의 정치인들의 사익(私益)추구 행위 특강(7)
본 코너에서는 ‘정치인들의 사익(私益)추구 행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나쁜 민주주의: 정치인·관료들은 왜 사익만 추구하는가?』 (이몬 버틀러 저, 이성규·김행범 옮김, 북코리아, 2012년)를 연속적으로 게재하기로 한다. [편집자주]
◆ “정당은 득표를 극대화하기 위해 중위투표자들의 선호를 중시한다”.
◆ “투표자들은 합리적 무지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인 편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는 실패할 수 있다”.
▲ 이성규 국립안동대 무역학과 교수 |
■ 투표 동기: 사람들은 왜 투표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사람들은 왜 수고롭게 투표에 참가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사람들은 자신의 투표 효과가 미미할지라도 ‘의무감으로’ 투표에 참가하려고 할 것이다. 마치 우리들이 좋아하는 미식 축구팀을 위해 열렬한 응원을 보내는 것과 같이 우리들은 시민의 의무감으로 투표에 참가해야 한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투표한다!”는 점이다. 왜 사람들은 투표하는가? 공공선택 연구자들은 “사람들은 투표가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투표에 참가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정당을 경영(관리)하는 사람들도 그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블랙(D. Black)과 다운스(A. Downs)와 같은 초기 공공선택 연구자들에 따르면 정당을 경영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표들을 모아서 자신의 정당이 집권하는 데 있다”(이를 ‘득표 극대화 목표’라 부름)라고 주장하였다. 득표 극대화 목표는 그들이 추구하는 권력과 지위의 원천이다. 이러한 “투표 동기”(vote motive; 또는 ‘득표 극대화 동기’)는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설정(political positioning)을 구체화해 주는데 기여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오직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정책들을 고안하고 선택한다. 따라서 정당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득표 극대화를 통해 집권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를 설정하고, 또 그에 맞는 정책들을 선택하게 된다.
이 견해에는 틀림없이 더 많은 내용들이 있다. 우리들은 정당들이 오직 여론조사의 힘에 좌우되어 정책을 개발하고 채택하는 것을 수없이 목격해 왔다. 그러나 최근의 공공선택 연구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정당들이 하나의 정책에서 다른 정책으로 자유로이 전환 또는 이동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정당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념에 따라 정책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대개 정당들은 어떤 뚜렷한 정치적 이념(ideology)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이념과 세계관에 대체로 부합하는 정책들을 채택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정당들은 선거에서의 즉각적인 이익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원칙이나 정책을 갑자기 포기한다면 시민들로부터 신뢰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정당들이 가지는 ‘이념적 위치’ 그 자체가 표를 모으는(vote-gathering) 하나의 득표 수단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만약 투표자들이 실제로 ‘합리적으로 무지하다면’(rationally ignorant) 정당들은 그저 눈에 띠는 중심 구호나 접근만으로도 유권자들을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당이 선전하는 중심 구호가 눈에 확 띤다면 심지어 무지(無知)한 투표자들도 이를 알아보고 지지를 보낼 것이다.
■ 중간으로의 표류(漂流): 중위투표자 이론
블랙(D. Black)이 최초에 주장한 또 하나의 점은 “득표를 추구하는(vote-seeking) 정당들은 중간 지점(middle ground; 즉, 중도(中道))에 위치하려고 애쓸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블랙의 “중위투표자 정리”(median voter theorem)라고 부른다.
아주 단순한 이슈를 예로 들어 보자. 즉, 우리는 ‘국방에 얼마를 지출해야 하는가?’라는 이슈를 고려해 보자. 공공선택 연구자들은 이러한 하나의 이슈를 “1차원적 이슈”(one-dimensional issue)라고 부른다. 이 경우 사람들의 선택을 하나의 단일 눈금 위의 어떤 한 곳에 위치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의 선택을 0과 1사이에 있는 어떤 눈금(지점)에 가져다 놓을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은 우리는 국방에 한 푼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다른 몇몇 사람들은 국방에 현재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정규분포를 나타내는 종 모양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견은 중간에 위치한 어떤 점 주위에 모여 있을 것이다. 전문 용어를 사용한다면 “사람들의 선호가 ‘단일 정점’(single peaked; 정점(頂點)이 한 개만 존재하는 경우를 말함. 이를 봉우리가 하나뿐인 ‘단봉형(單峰形) 선호’라고도 함)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
▲ 정당들은 중위투표자들의 선택을 중요시한다. 정당들이 득표를 위해 중간지대의 투표자들을 겨냥한 공약경쟁을 벌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투표자들은 합리적 무지 뿐만 비합리적인 편향성도 갖고 있어 민주주의가 실패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새누리당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정몽준 이혜훈 김황식 예비후보들(왼쪽부터)이 최근 강서구청의 한 행사에 참석해 손을 들고 있다. |
이와 같이 정규분포 상 한 가운데(중간)에는 더 많은 유권자들이 분포되어 있다. 게다가 만약 어느 정당이 유권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 중간 가까이로 자신의 정책을 가져다 놓는다면 양끝의 어느 한쪽에 있는 유권자들을 자기 쪽으로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분포 상 양 극단에 위치해 있는 어떤 정당의 ‘합리적 투표 모으기 전략’(rational vote-gathering strategy)은 중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당보다 더 극단에 있는 지지자들은 그 정당을 지지할 것이며, 동시에 한 가운데에 위치한 다수의 중도적인 투표자들의 일부를 자기 쪽으로 유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어떤 정당이 한 가운데로(중앙으로) 더 가까이 이동해 갈수록 중간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정당에 비해 더 큰 이익(즉, 유권자로부터 더 많은 지지)을 얻을 수 있다.
블랙(D. Black)에 따르면 이러한 결과 “모든 정당들은 여론(유권자들의 의견)의 한 가운데로 수렴하며, 자신들의 위치(정강정책)를 분포 상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중위투표자’(median voter) 가까이에 위치시키려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블랙의 견해에는 그 속에 상당한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 미국과 영국의 투표자들은 종종 정당이 제시하는 정책과 관련하여 “정당들 간에 차이가 없다”라고 불평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순한 아이디어는 다음의 여러 가지 이유로 최근 일반 경제학계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아왔으며, 또 크게 버림받아 왔다.
첫째, 중위투표자 정리는 ‘이산적이고, 1차원적이고, 단일 정점을 가진 이슈’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복잡하고, 상호 연관되어 있는 이슈들’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에 투표자의 의견이 하나에 집중되지 않고 많은 ‘정점들’ 간에 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위투표자 정리에서는 정당들과 투표자들에 대해 다음을 가정하고 있다. 우선, 정당들은 (i) 투표자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ii) 득표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위치(정책)를 기꺼이 그리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다.
다음으로, 투표자들은 (i) 정당들의 위치 이동(즉, 새로운 정책)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그에 따라 투표하며, (ii) 정당들은 자신들이 새로이 약속한 정책들을 집권 후 반드시 이행할 것이다(이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당들은 집권 후 그들이 선거 전에 약속한 정책들을 정말로 이행한다)라고 믿는다. 즉, 중위투표자 정리가 성립되려면 이와 같은 가정들이 필요하다.
둘째, 현실은 이론보다 더 복잡하다. 현실적으로는 선거에서 두 개의 주요 이슈들이 있고, 세 개의 정당들이 경쟁한다. 그러면 정당들의 ‘위치설정 기하학’(positioning geometry)은 훨씬 더 복잡해진다. 이 경우에 어느 한 정당이 분포 상 중앙으로부터 멀어지더라도(비록 너무 멀리 떨어지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나머지 두 정당의 일부 지지자들로부터 ‘귀중한’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세 개의 정당이 존재하는 경우 ‘정당 간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있다. 실제적으로 정당 그 자체는 서로 이질적이고 경쟁적인 이익들을 가진 활동가들의 연합체이다. 그 결과 정당들이 대중들에게 제시하는 정책 꾸러미(policy package)에는 인기 있는(popular) 정책들뿐만 아니라 인기 없는(unpopular) 정책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투표자들은 이들 사이에 끼어 지지정당을 선택하는 데 망설이게 된다. 중위투표자 정리 속에는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상당한 진리가 들어 있지만 ‘현실 정치’(real politics)는 그야말로 이 보다 더 복잡하다.
■ 합리적 투표자에 대한 미신
비록 정당들이 블랙(D. Black)과 초기 공공선택 연구자들이 묘사한 바와 같이 선거에서 당선만 노리는 기회주의적인 투표 채집자들(vote chasers)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치적 과정에 대해 너무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은 여전히 현명치 못한 처사인 것 같다. 그러나 2007년 미국의 신예 경제학자인 캐플란(Bryan Caplan) 교수는 기존의 일반적인 견해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었다. 전통적인 공공선택론에 따르면 “투표자들은 ‘사리 분별력이 있는(즉, 합리적인) 사람들’로서 선거에서 책임감 있게 그들의 표를 던진다”고 여겨지고 있다.
과연 투표자들은 합리적으로 행동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캐플란 교수는 투표자들은 그들이 가지는 몇 가지 편향성 때문에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캐플란 교수는 투표자들은 많은 “비합리적인 편향성들”(irrational biases)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비합리적인 편향성’이란 투표자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것으로 “어떤 손실이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을 말한다. 캐플란은 투표자들이 가지는 이러한 비합리적인 편향성들로 다음 4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로 투표자들은 무엇보다도 ‘일자리 상실’, 즉 실업을 매우 싫어하는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농업부문과 다른 산업들에 대한 보조금 지급에 대해 찬성한다. 그러나 투표자들은 기술진보와 생산성 향상으로 특정 부문의 일자리는 감소되지만 그로 인해 절약된 노동력이 다른 곳에서 더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모든 투표자들이 훌륭한 경제학자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투표자들은 ‘좋은’ 경제정책과 ‘나쁜’ 경제정책이 가지는 2차적인 효과를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캐플란이 언급했듯이 두 번째로 투표자들은 외국인들을 혐오하는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 즉, 투표자들은 자유무역의 혜택을 환영하는 대신에 외국인들(외국노동자들 및 이민자들)을 국내 일자리 감소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세 번째로 투표자들은 경제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과장(과대평가)하는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투표자들은 장기적으로 경제 사정이 대체로 더 좋아질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네 번째로 투표자들은 시장기구가 가져다주는 혜택을 과소평가하고, 정치적 발의(political initiatives)의 효과를 과대평가하는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동안 공공선택 연구자들이 염려한 ‘정부실패’와 함께 “민주주의의 실패”(democratic failure)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곧 알게 되겠지만 다음의 여러 요인들 때문에 정부의 각종 결정들은 분명히 왜곡될 수 있다. 즉, (i) 투표제도 때문에 정부의 결정들이 왜곡될 수 있고, (ii)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사익(私益)추구 때문에 정부의 결정이 왜곡될 수 있고, (iii) 잘 조직화된 이익집단들이 공개적 토론을 지배하기 때문에 정부의 결정이 왜곡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i) 투표제도가 여론을 효과적으로 반영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ii)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대중들의 소망과 요청을 충실하게 이행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공공 행동의 결과는 여전히 ‘비합리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투표자들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러 다른 이론들이 있지만 모든 이론들은 다음과 같이 똑같은 방향으로 결론이 난다. 즉, “정부는 소위 ‘시장실패’라는 것을 해결(교정)하는 데 결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무엇이 잘 되어 가는지, 또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지(예를 들면, ‘손실을 발생시키는 기업은 문을 닫아야 한다’와 같이)에 대해 아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여전히 투표자들의 비합리적인 편향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비효과적이거나 비생산적인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후자에 대한 한 예를 들면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손실이나 적자를 발생시키는 산업들에 대해 여전히 보조금을 지급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장의 서두에서 “만약 당신이 법률이나 소시지를 좋아한다면 당신은 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결코 보지 않는 게 좋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제까지 설명했듯이 소시지를 만드는 것처럼 법률을 만드는 일들도 ‘추악한’ 일인 것 같다.
(출처: 『나쁜 민주주의: 정치인·관료들은 왜 사익만 추구하는가?』 (이몬 버틀러 저, 이성규·김행범 옮김, 북코리아, 2012년) /이성규 안동대 무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