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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미(用美)로 일어선 대한민국, 반미로 주저앉나?

2017-06-26 10:15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조우석 언론인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 나라의 외교적 자살행위를 우린 언제까지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할까? 왜 안하무인 좌익세력은 미국-일본 등 동맹국의 주한대사관 앞에서 외교적 결례를 서슴지 않고 있고, 그런데도 공권력을 포함한 체제수호의 의무가 있는 주류세력은 미동도 못하는가?

몇 해 전 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을 설치해 외교적 결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 나라가 다시 사고를 쳤다. 이번엔 주한 미 대사관이 표적이다. 민노총 등 90여 개 반미단체로 구성된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의 24일 포위 시위가 문제다. 서울 도심의 미 대사관을 포위한 이른바 인간 띠 잇기 시위란 동맹 미국을 겨냥한 사실상의 적대행위다.

사드 반대는 핑계일 뿐이며 한미정상회담이 코앞인 상황에서 저들은 미국을 향해 실력행사를 해보였는데, 차제에 우리 현주소가 다 드러났다. 상황을 수수방관하는 듯한 공권력, 시위를 허용한 무책임한 재판부, 입도 벙긋 못하는 비겁한 지식사회는 가히 총체적 난국이다.

반미운동 성공 30년은 좌익의 작품

미 대사관 포위 시위란 오래 전부터 구조화됐던 한국사회의 반체제-반미 움직임이 또 다른 결정적 국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분수령이라고 나는 분석한다. "반미 목소리가 없는 나라"라는 인식을 깬 것이 1980년대 중반인데, 직후 빠르게 자리 잡아온 반미 움직임은 드디어 동맹국의 중요시설과 인력을 겁박하는 수준으로 성큼 발전한 것이다.

이게 어디로 갈 것인가를 가늠하려면 현대사의 반미운동 30년을 점검해야 옳은데, 건국 이후 본격적 반미운동의 출발은 1985년이다. <한국진보세력연구>를 펴낸 남시욱 박사에 따르면, 당시 학생운동권은 신군부의 광주사태 진압을 왜 미국이 묵인했는가를 해명하라고 시위를 한 것이 계기다.

그 이전 문부식 일당의 충격적인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82년)을 우린 기억한다. 그렇게 씨앗이 심어진 반미를 운동권이 조직화했는데, 1990년대 직후엔 친북-종북 성향을 가진 괴물로 빠르게 진화했다. 당시 그 움직임을 주도한 게 지금 청와대 비서실장 임종석 등의 전대협이라는 걸 세상이 다 안다. 그렇게 운동권이 주도하던 반미를 노무현 정부 이후에 시민단체가 바통 체인지를 하는 중요한 내부 변화를 연출한다.

24일 오후 '6·24 사드 철회 평화 행동' 참가자들이 미국의 사드배치 강요 등의 주권 침해 중단을 촉구하며 서울 종로구 미국대사관 앞에서 포위 행진을 마친 뒤 사드 현수막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민중연대(2003년 결성), 진보연대(2007년 결성)등이 그들인데, 그만큼 반미운동이 구조화되고 사회저변으로 확산됐다는 뜻이다. 그 직전 효순-미선양 사고를 대중적 반미운동으로 확산시켰던 것도 좌익의 기획인데, 당시 반미운동 중 가장 컸던 것은 맥아더 동상 철거(2004~2006년)이다.

6.25 때 우릴 구해준 은공 따위는 몽땅 잊고 "제국주의의 상징이니 끌어 내려야 한다"며 저들은 막무가내였다. 이게 한미간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했다. 당시 헨리 하이드 등 미 하원의원 몇 명이 대통령 노무현에게 "동상을 훼손하느니 차라리 우리에게 양도해달라."라고 요청했는데, 당시 미국인들은 한국에서의 소동을 보며 가슴에 멍들었다.

옛 중앙일보 "반공-친미는 헌법 이상의 합의"

정리하면 이렇다. 한국사회의 반미운동은 지난 30여년 좌익의 기획 중 가장 성공한 정치투쟁이다. 운동권이 불씨를 만든 뒤 시민세력이 이어받아 저변을 넓히고, 끝내 중앙권력까지 차지하는 동안 한국사회는 속절없이 당해왔다. 지금 대한민국이 휘청대는 건 반미라는 체제 위협요소를 제때에 제거하지 못한 탓이다.

누굴 탓하는 게 아니다. "반미 좀 하면 어때?"하던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았고, 이후에도 내내 변함없으니 결국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 결과 이 나라는 거의 통제 불능이다. 경북 성주에서 현지인-외부인이 똘똘 뭉쳐 사드 포대를 운용하는 미군부대의 기름 유입을 제약하는 무법천지를 연출하더니 급기야 대사관 포위 시위까지 벌였다.

10여 년 전 인천의 맥아더 동상에 시비 걸던 그들은 대담하게도 대한민국 안전을 책임진 미군병사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고, 드디어 서울 도심의 주한대사관까지 겁박 중이다. 그 전에 대통령 특보란 자까지 나서서 외교적 자해를 거듭하는 판인데, 이걸 제대로 꾸짖는 이조차 드물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터졌을 때 모든 매체가 '반미 무풍지대'로 통하던 한국에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을 걱정했다. 그런 분위에서 당시 중앙일보는 이렇게 지적했다. "반공과 친미는 헌법 이상의 국민적 합의라고 단언할 수 있다."

35년 뒤인 지금 상황에서 보자면 조금 과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당시 저널리즘은 그래도 건강했고, 자유민주주의 한국사회를 떠받쳐주는 기둥의 하나였다. 사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을 세울 때 효율적인 미국 활용법, 즉 용미(用美)의 노하우를 발휘했다. 그건 친미-반미의 이분법을 떠나서 이 작은 나라의 생존법이었다.

그가 용미로 나라를 세웠다면, 박정희는 용일(用日)로 이 나라를 부자 나라 만들기에 성공했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매듭지으며 국제정치와 경제의 두 영역의 숙원을 함께 풀어낸 것이다. 즉 대한민국의 건국과 부국은 순전히 용미-용일의 연속적 성공 덕분이다. 기이하게도 지금 우린 꼭 그 반대로 움직인다.

미국에 삿대질하고, 일본과는 앙앙불락이다. 이런 과정에서 중앙일보 등 조중동이 체제수호 대열에서 이탈했다는 의구심을 심어준 지는 이미 오래됐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다. 한 나라가 망가지려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실감을 요즘 우리는 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묻자. 용미-용일로 일어섰던 나라가 묻지마 반미-반일과 함께 이대로 주저앉는가?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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