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그럼에도 우린 때때로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앎과 이해일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란 가수 정광태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사부(異斯夫)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사부 장군은 경상북도 동부의 작은 부족국가 신라를 한반도의 주역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또 다양한 종족을 하나로 통합해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인이기도 하다. 독도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 고취를 위해 미디어펜은 이사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김인영(언론인)씨의 '이사부를 찾아서'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異斯夫⑦] 鐵의 왕국 금관가야 정벌하다
산지 확보해 삼국통일을 위한 힘의 원천을 확보
사서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시켜 동해 제해권을 장악한 이후 등장하는 곳은 금관가야 정벌에서다. 하지만 법흥왕 때 이사부의 흔적은 우리의 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일체 나오지 않는다. 일본의 사서인 <일본서기>에 실려있다.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법흥왕이 지증왕을 계승한 이후 신라와 금관가야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진다. 신라는 동해안과 울릉도를 복속시켜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고구려와 예(말갈), 왜의 공격로를 차단한 다음, 남부지역 초략에 나선 것이다.
1) 법흥왕 9년(522년) 봄 3월,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기에, 임금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여동생을 보냈다.
2) 법흥왕 11년(524년) 가을 9월, 임금이 남쪽 변방을 두루 돌아보며 영토를 개척했다(南境拓地). 가야국 왕이 찾아와 만나보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라 법흥왕 시기에 가야는 힘에 밀려 한발한발 신라에 속국화되어 갔다. 가야 임금이 신라 대신의 딸을 받아들여 혼인동맹을 맺는가 하면, 법흥왕이 직접 가야 땅을 공격해 영토화하자, 금관국 임금이 직접 찾아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말고, 사직만은 보전해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을 김부식은 담담하게 그려냈다.
법흥왕이 가야 지역의 영토를 개척할 때(南境拓地) 이사부가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직 군주에 앞서 10대의 젊은 나이에 가야의 땅을 뺏은 적이 있는데다 동북 지역의 군사 총책임자로 일한 경험 등을 미루어 볼 때 법흥왕이 남경척지(南境拓地)를 하면서 이사부를 대동했을 게 분명하다.
<일본서기 계체천황조>에 이질부례지(伊叱夫禮智)라는 신라 장군의 이름이 나온다. 그는 일본식으로 표기한 이사부다. 법흥왕 16년, 서기 529년의 일이다.
계체(繼体) 천황 23년(529년) 4월에, 임나(任那)에 있는 근강 모야신(近江 毛野臣)에게 명하기를, “임나(任羅)가 상주(上奏)한 바를 잘 물어서, 서로 의심하는 것을 화해시키라”고 했다. 이에 모야신(毛野臣)은 웅천(熊川, 창원시 웅천)에 머물면서[다른 사서에는 임나 久斯牟羅(마산)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을 불렀다. (중략)
신라는 1등 대신인 久遲布禮(거칠부)를, 백제에서는 은솔 彌騰利를 보냈다. 왕이 오지 않자, 모야신은 두 사신을 꾸짖어 보냈다.
신라는 다시 상신(上臣) 이질부례지(伊叱夫禮智干岐)[대신(大臣)을 상신(上臣)이라고 한다]를 보내 무리 3천을 이끌고 왔다. 모야신은 멀리서 兵仗에 둘러싸여 있는 무리 수천 명을 보고 웅천(熊川)에서 임나 己叱己利城에 도망갔다.
이질부례지간기가 多多羅原(다대포)에 머물면서 석 달을 기다렸다. 이질부례지가 거느린 사졸들이 한 부락에서 모야신의 부하와 마주쳤다. 그 부하는 다른 문으로 들어가 숨어 있다가 그 자(신라 병사)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주먹으로 쳤다.
이에 신라병사는 자기가 본 것을 상신(이사부)에게 자세하게 보고했더니, 상신이 4개의 촌[금관(金官), 배벌(背伐), 안다(安多), 위타(委陀)가 4개 촌. 다른 곳에서는 다다라(多多羅), 수나라(須那羅), 화다(和多), 비지(費智)등 4개 촌이라 했다.]을 초략(抄掠)하고 그곳의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다다라 등 4촌이 초략당한 것은 모야신의 잘못이다”라고 했다. <일본서기>
내용을 요약하자면, 금관국(임라) 왕이 "신라가 국경을 자주 넘어 내침하니, 가야를 구해달라"고 왜국에 요청을 하자, 왜왕이 대신 근강 모야신을 보내 신라와 백제의 왕을 부른다. [일본서기의 과장에 대해서 한국 역사학자들의 비판이 많다.]
신라와 백제가 1등급 중신을 보냈지만, 모야신은 왕이 직접 오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는다. 이에 신라는 대장군 이사부에게 3천의 병사를 줘 금관가야 토벌에 나선다.
이사부는 3개월간 부산 다대포벌에 진을 치고 공격을 준비한다. 모야신은 이사부의 군세에 놀라 마산으로 도망을 간다. 이사부는 4곳의 부락을 초략하고, 가야인 포로를 끌고 경주로 돌아간다.
금관국왕은 모야신이 잘못해 다시 영토를 뺐겼다고 왜왕에게 보고했다. [모야신은 왜왕의 미움을 사 백제와 신라의 협공을 받은후 왜로 소환되어 대마도에 이르러 병사했다.]
<일본서기>의 기사 가운데, 이사부의 직위를 상신(上臣)이라고 지칭한 대목이 있는데, 이는 지증왕 때의 이찬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법흥왕은 18년(531년)에 상대등이란 최고관직을 신설하고, 철부(哲夫)를 초대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철부가 2년 후에 세상을 뜨니, 사실상 이사부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재상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2) 구형왕
이사부가 금관국에서 빼앗은 촌(村) 가운데, 금관(金官)은 김해, 배벌(背伐)과 비지(費智)는 창원시 웅천부근, 안다(安多)와 다다라(多多羅)는 부산 다대포, 수나라(須那羅)는 금관가야, 和多와 委陀의 지명은 고증이 되지 않는다. 즉 금관가야의 주변은 물론 본거지를 거의 빼앗고, 금관국 임금만 남겨둔 것이다.
이사부가 금관국을 초략하고 3년 뒤, 금관국 구해왕은 신라에 나라를 들어 바친다.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기에 평화적 항복을 선택한 것이다.
법흥왕 19년(532년),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등 세 아들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했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금관국은 수로왕이 건국한후 10대 구해왕(<삼국유사>엔 구형왕)대에서 그 명을 다한다.
<삼국유사>는 가락국기에서 금관국의 멸망 연도가 진흥왕23년(562년)로 기록돼 있다. 일연이 대가야와 금관가야를 혼동한 것 같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사서를 이용해 532년에 신라에 항복했다는 두가지 기록을 동시에 남겼다.
구형왕(仇衡王): 김씨다. 정광 2년(521년)에 왕위에 올라, 4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보정(保定) 2년 임오(562년)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의 수는 많고 아군의 수는 적었기 때문에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형제인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 등과 함께 항복해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이다. 개황록(開皇錄)에서는, “양(梁)나라 대통(大通) 4년 임자(532년)에 신라에 항복했다.”라고 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법흥왕은 금관국을 들어바친 구해왕에 대해 유화조치를 내린다. 구해왕을 최고관직인 상대등 자리를 주고, 통치하던 금관국을 식읍으로 삼아 세금을 걷어 쓰게 하고, 세 아들에게 신라 최고의 관직까지 오르게 배려했다. 신라(경주) 김씨와 가야(김해) 김씨의 세력이 연대를 형성한 것이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소재 구형왕 무덤.
금관국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돌무덤이 남아있다.
신라는 금관국을 병탄한 이후 가야의 다른 소국인 녹국(㖨國, 합천군 쌍책면 성상리), 탁순국(卓淳國, 창원 인근), 안라국(安羅國, 함안)으로 진출했다. 금관국에 이어 신라가 병탄해 가는 과정에도 이사부가 군대를 직접 끌고 갔을 것이다. 이제 신라는 남부지역에서 백제와 국경을 접하게 됐다.
가야 연맹은 이제 고령의 대가야만 홀로 남게 됐다. 후기 가야의 맹주 대가야도 이사부와 그의 부하 사다함에 의해 성문이 열리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3) 신라, 철산지 확보로 산업적, 군사적 원동력을 얻다
금관국은 철의 나라였다. 중국 사서 <삼국지>에서 변한의 철을 언급했고, 그 철생산지가 바로 금관국이었다. 금관가야는 일찍이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철제품을 낙랑과 왜, 신라등에 거래했다. 초기 가야연맹의 맹주 역할을 한 금관가야는 이사부에 의해 종언을 고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이렇게 서술한다.
나라(國)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얻어갔다. 장사를 지낼때는 철을 사용하는데, 마치 주욲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 곳에서 생산된 철이 두 군(낙랑과 대방)에 공급된다.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여기서 나라는 금관가야를 의미한다. 가야의 철 생산 기술이 철의 종주국으로 알려진 중국의 식민지 낙랑과 대방으로 수출될 정도로 발전했다는 이야기다.
유물 발굴팀에 따르면 경남 다호리 유적에서는 주조한 철기 뿐아니라, 더욱 발전된 단조 기술로 만든 다양한 철기가 발굴됐다. 칼, 창, 화살촉등 무기류와 도끼, 괭이, 낫 등 농기구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어 이 지역이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철기 생활을 했음을 보여준다.
고대 사회에서 철은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철로 만든 무기는 구리보다 띄어났고, 금새 무뎌지는 청동기보다 강하여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녹이 잘 슬어 장신구로서의 매력은 적었지만, 지배자 집단에겐 철이 매력적잉덨다. 철을 확보한 부족은 주변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잉여 생산물을 확보할수 있었다.
삼국시대가 형성되기 이전에 가야가 한반도 남부에 강한 세력을 형성할수 있었던 것은 철의 대량생산 때문이었다.
가야의 건국자 수로왕 전설에서도 '철의 왕국'에 관한 의미기 숨어 있다. 수로왕의 성은 김(金)으로, '쇠'를 의미한다. 김수로왕의 부족은 철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가야를 지배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른바 신라의 왕족 김씨와 함께 가야 왕족도 쇠를 다루는 '단야족'이었다는 해석이다.
금관가야는 지금의 경남 김해(쇠바다)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금관가야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에는 철기 제품이 많다. 따라서 금관가야는 철로 인해 한반도 남부 지역을 통치했고, 여기서 생산되는 철이 일본과 중국 식민지였던 낙랑과 대방은 물론 한반도 전역에 수출됐던 것이다.
철은 금관가야를 융성하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금관가야를 외부의 침략 대상으로 만들기도 했다. 결국 금관국은 철로 인해 승하고, 철로 인해 망한 것이다.
금관가야의 철을 확보하거나 생산과 교역 조직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때로는 '반란과 전쟁'으로 확대됐다. 부족 또는 국가의 이해관계가 철의 확보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수로왕이 철의 생산과 교역을 장악하자 주변의 반발이 생길 것은 당연지사였으리라.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내해왕 시절에 가야국(금관가야)이 포상팔국의 침입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포상팔국은 낙동강 하류와 남해안 일대에 위치한 여덟 부족국가를 말한다. 이들 부족은 김해에 본거지를 둔 철의 왕국이 철 교역을 장악하자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삼국사기>는 가야국이 이웃 신라의 도움으로 포상팔국의 난을 진압했다고 적고 있다. 그만큼 철의 생산과 교역을 두고 가야와 주변국과의 전쟁이 치열했고, 가야는 혼자의 힘으로 반란을 진압하지 못해 이웃 강국의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결국 가야는 이 반란을 계기로 신라에 의지하게 된다.
5세기초 굼건가야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다. 광깨토대왕이 가야를 침공했다는 기록은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데, 그러면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의 영토를 거쳐 조그마한 가야를 공격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철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광대한 대륙을 경영하던 고구려가 영토 유지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철이 필요했고, 그러자니 우수한 철을 풍부하게 생산하고 있던 가야를 손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마치 독일 제국이 프랑스의 철광석 및 석탄 산지인 알사스, 로렌을 점령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해석도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철의 왕국 가야는 이웃 부족과 고구려, 왜의 잦은 공격 대상이 됐고, 마침내 신라와 백제의 협공으로 멸망한다. 그리고 금관가야의 철 산지는 신라로 넘어가고, 마침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산업적, 군사적 원동력을 얻게 된다. 그러니 신라의 상국을 통일하게 된 힘의 원천이 바로 철(鐵) 산지 확보가 아니었을까. /김인영 언론인
[김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