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보수, 무엇이 문제인가. 자유한국당은 반성과 책임이 없다. 원래 보수는 사려 깊게 일을 처리하고, 열정보다는 책임을 중시하는 태도를 미덕으로 삼는다. 헌데 공천 파동과 총선 패배, 국정 농단과 탄핵 사태, 대선 참패를 겪으면서도 누구 하나 정치적 책임을 지는 사람도 물으려는 사람도 없다. 과거에는 보수 정당이 위기 때마다 혁신의 몸부림을 하곤 했다. 사람도 바꾸고 정강도 바꾸었다. 지금은 시늉만 있을 뿐이다.
자유한국당의 기득권 지키기 체질은 뿌리 깊다. 혁신이 없으니 당연히 기득권 챙기는 밥그릇 싸움에만 열심이다. 당 대표는 측근들로만 당직을 채우고, 당권 강화에만 집중한다. 과거에는 초재선 의원들이 정풍운동도 하고, 당내 민주화를 주도하기도 했건만, 어찌 된 셈인지 지금은 변화를 위해 결기를 보이는 인물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국회의원직을 즐기는 사람들로만 꽉 차 있는 것으로 비친다. 국회의원인지 회사원인지 모르겠다는 푸념이 그래서 나온다.
자유한국당은 극우 성향의 영남 60-70 정당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좌파에 대한 분노를 동원 자원으로 삼아 영남 헤게모니와 고령 세대 헤게모니에 안주하는 경향이 짙다. 젊은 세대들이 외면하고, 수도권에서 외면당하는 정당이 미래가 있는가? 좌파 진보 정권의 실정으로 인한 '반사이익'에만 의존하는 정당이 미래가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바꿔야 하나. 노선과 체질의 혁신, 인물의 쇄신과 발굴밖에 없다. 노선에서는 보수 교조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프레임, 반공/국가주의/성장제일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강령의 문제라기보다는 노선의 해석과 체현의 문제다.
이미 한나라당 2004년 뉴비전위원회 강령과 2005년 혁신위원회 정강 혁신을 통한 공동체 자유주의 채택 이후 강령 수준에서는 많은 혁신이 있었으나, 문제는 문서 위의 노선과 현실 노선 사이의 괴리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중)가 지난 4일 여의도 당사에서 지도부 출범 후 첫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사진=자유한국당
보수의 가치를 어떻게 미래의 가치와 결합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과거 지향적인 보수가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보수임이 노선 상 명확해져야 한다. '과거를 위해 미래를 희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불식해야 한다. 새로운 노선은 새로운 인물에 의해서만 체현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연륜이 깊은 나라의 보수 정당 역사를 보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은 대동소이하다. 선거에 연거푸 패하거나 보수 정당의 존립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은 두 가지를 반드시 했다. '노선의 현대화'와 '새로운 지도자의 발굴'이었다.
1950년대 사회민주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 때 영국 보수당은 중도주의자 헤럴드 맥밀런을 앞세워 '온정적 중도보수주의'를 내걸고 성장의 필요와 분배의 요구를 조화시키는 노선으로 집권했다. 반면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말까지 대부분 시기를 노동당이 집권하던 시절, 절치부심하던 보수당은 소신과 결단력을 지닌 대처를 내세워 '영국병 해소와 시장 활력의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집권해 영국의 힘을 되찾는다. 노동당이 제3의 길로 토니 블레어를 앞세워 장기 집권한 90년대 이후 또 위기에 빠진 보수당은 캐머런이라는 스마트한 청년 지도자를 앞세우고, 보수당 판 '제3의 길'로 재집권에 성공해 오늘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점은 보수 정당의 원로 지도자들이 '당의 혁신'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장 서 당의 현대화와 새로운 지도자의 발굴에 팔을 걷어붙이곤 했다는 점이다. 당에 새로운 물길을 터주면서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것이 원숙한 보수주의자들의 특별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인 것이다.
어떻게 우리 보수정당에는 이런 정치지도자 한 사람 볼 수 없을까? 오히려 최후의 일각까지도 알량한 힘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노추의 정치인'들만이 눈에 띨 뿐이다. 혁신은 외면하고 반사이익만 기다리는 보수, 시대의 변화를 성찰하지도 이끌지도 못하는 보수는 수구 보수일 뿐이다. 그들은 과거를 지키기 위해 미래를 희생한다. 그들은 역사의 개척자가 아니라 걸림돌이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와 여의도연구원은 18일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새로운 보수의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해 한국의 보수가 그간 지켜온 가치는 무엇이며 무엇을 지키고 변화시킬 것인지 논의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이 글은 보수가치 재정립 연속토론회 '무엇을 지키고 개혁할 것인가' 에서 발제자인 박형준 동아대 교수(前 국회 사무총장)가 발표한 발제문 전문 중 일부다.
[박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