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원우 기자]#. “동행이요? 동행 좋죠. 어려운 서민들 돕겠다는 뜻을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기업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도 있어요. 저희가 하는 영업활동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요. 결국 대기업들이 장사 잘 하고 실적 잘 뽑아야 고용도 늘고 국부도 창출되는 건데… 대기업하고도 같이 ‘동행’하면 안 되는 건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거 정말 익명 취재 맞죠?”
김상조 신임 공정거래위원장(사진)은 지난 6일 기자 간담회에서 "시민단체에 있을 때 솔직히 나쁜 짓은 금융위원회가 많이 하는데 욕은 공정위가 더 많이 먹는다고 생각했다"는 폭탄발언을 해 큰 파장을 남겼다. /사진=연합뉴스
대기업 고위간부 A씨는 본지 기획 시리즈 ‘동행’ 취재에 응하면서 ‘익명’ 여부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기업명은 물론 자신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그 어떤 정보도 드러나지 않기를 원한다는 요청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인터뷰에 참여했다.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말했지만 A씨의 요점은 결국 정부에 대한 대기업들의 ‘눈치 보기’가 심각한 상태라는 얘기였다. ‘지지율이 80%에 육박하는 새 정부가 추진하는 그 어떤 정책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기가 힘든 분위기’라는 A씨의 뉘앙스에는 내심 일부 정책에 대한 의구심이 묻어 있었다.
심상치 않은 두 가지 징조
A씨는 새 정부의 ‘캐릭터’를 알 수 있는 사례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 번째는 최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이른바 ‘나쁜 짓’ 발언이었다.
내용은 이렇다. 김상조 신임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6일 기자 간담회에서 “시민단체에 있을 때 솔직히 나쁜 짓은 금융위원회가 많이 하는데 욕은 공정위가 더 많이 먹는다고 생각했다”고 운을 뗀 뒤 “위원장으로 오고 나서 그 생각이 더 굳어졌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이 발언의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대한민국 금융정책의 골간을 담당하고 있는 금융위를 한순간에 ‘나쁜 집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일이 커지자 김 위원장은 곧장 사과를 했지만 A씨의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나라의 금융을 책임지고 있는 고도의 정책집단에 대해 본인의 선악관을 개입시켜서 ‘나쁘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 분 눈에 대기업이 얼마나 악당으로 보일지 생각하면 섬뜩한 면이 있죠. 다른 기업에 있는 분들 중에도 저와 같은 생각 하신 분들 많을 겁니다.”
A씨가 언급한 두 번째 ‘심상치 않은 징조’는 얼핏 대기업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원전 폐쇄’였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국가정책에도 ‘맥락’이라는 게 있습니다. 설령 그게 아무리 옳은 방향이라도 해도 저렇게 한순간에 ‘폐쇄’ 결정을 내려버리는 모습을 보면 걱정되는 부분이 많죠. 현 정부가 얼마나 급진적인지를 알 수 있는 지표니까요. 경제정책도 상당히 래디컬한 방식으로 진행될 거라는 예상입니다. 아무래도 덩치가 큰 대기업들이 더 긴장할 수밖에 없고요.”
쏟아지는 선심성 정책들
실제로 새 정부 출범 이후 대기업들은 철저하게 정부의 기호에 맞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실질적인 총수인 이재용 부회장이 부재 상태인 삼성그룹의 경우 새 정부 핵심정책인 일자리 창출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 하반기 대졸 신입사원 공채를 ‘여건이 허용하는 한 최대’로 전개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구체적인 규모나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통상 하반기에 약 3500명을 채용해 왔던 점을 감안할 때 비슷한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 또한 올해 하반기 최대 3000명, KT는 4000명을 선발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하반기 대졸 신입사원 공채를 ‘여건이 허용하는 한 최대’로 전개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구체적인 규모나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통상 하반기에 약 3500명을 채용해 왔던 점을 감안할 때 비슷한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진=연합뉴스
대기업들이 일자리 창출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며 정부 기조에 맞추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이미 정부는 ‘대기업 압박 카드’를 다각도로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공정거래위원회는 ‘가맹분야 불공정 관행 근절 대책’을 발표해 피자·치킨·분식·제빵 등 외식업종의 50개 프랜차이즈 브랜드에 대해 올 하반기 일제 점검을 실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점검 내용은 프랜차이즈 본부가 가맹점에 식자재를 공급하면서 남기는 이익 규모다.
가맹점주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선한 목적’에서 시작된 정책이지만 공정위의 이번 계획에 대해서는 우려도 많다. 정부가 나서서 기업들의 마진 규모를 살펴 발표한다는 발상 자체가 상당히 반(反) 시장적인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대기업과의 ‘동행’ 가능할까
정부가 추진 중인 ‘대기업 압박용’ 카드는 이것 말고도 많다. 문재인 정부는 기업 유보금에 과세하는 ‘기업소득환류세제’를 한층 강화할 방침을 이미 밝혔다. 이를 위해 필요한 세법개정은 하반기 국회의 핫이슈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정부는 계열사나 오너 일가 소유의 회사에 각종 용역·주문을 몰아줘 매출을 지원하는 것에도 규제를 강화할 방침이다. 이 역시 대기업들을 겨냥한 정책이다. 이 밖에 비정규직 고용이나 자사 소속이 아닌 협력업체 소속 근로자를 간접고용 하는 행태에도 재갈이 물려질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에 대한 견제를 발판으로 정부는 각종 서민금융 정책을 추진해 나간다는 복안이다. 취약계층에 대한 부채탕감 정책이 대표적이다. 이미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생계형 소액 장기연체자를 대상으로 한 부채탕감과 관련해 일반 민간채권까지 확대할 수 있는지 여부를 금융당국에 주문한 상태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에 내걸었던 공약보다도 더 큰 규모로 진행되는 부채탕감 조치에 대해서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논란, 포퓰리즘 논란이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전망이다. 정부가 나서서 대기업을 견제하고 빚까지 탕감해 주는 선심성 정책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점증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