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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란 용어는 나쁘고 노동만 좋다는 왕편견

2017-08-23 10:40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조우석 주필

한 여당 의원이 이례적인 법률개정안을 발의했다. 민주당 의원 박광온이 20일 대표 발의한 법률개정안이 그것인데, 근로기준법 등 모든 국내 법률에 등장하는 용어인 '근로'를 '노동'으로 대체한다는 내용이다. 그동안 써온 근로란 용어는 사용자가 모범근로자를 양성하기 위한 갑질경제 체제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게 개정안 발의 이유다.

이게 간단한 공사만은 아니다. 내년 개헌 때에 헌법(제32조, 33조)에 들어가 있는 근로란 용어도 노동으로 몽땅 바꾸자는 제안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공론에 붙여질 법률개정안이 어떻게 처리될 지는 두고 볼 일인데,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의 경우 인사청문회 때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꿔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또 심상정 의원과 박원순 서울시장 등도 근로자를 노동자로 부를 것을 제안한 바 있지만, 현재 반응은 제각각이다. 인터넷 댓글의 경우 "일제잔재 용어이니 사그리 바꿔라"란 격려에서 "곧 친구란 말 대신 동무라고 고치겠네?"란 비아냥까지 다양했지만, 이렇다 할 합의점은 없다.

1979년 YH 여공들 "우린 산업역군"

개정안의 제안 사유 중 눈여겨볼만한 건 세계노동기구(ILO)도 그렇고, 세계 입법사례에도 근로자란 말은 없으며, 대만 일본 중국 등 한자문화권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란 점이다. 거기까진 좋다. 분명한 건 이 개정안이 박정희 흔적 지우기란 점이다. 본래 노동절이었는데 1963년부터 근로자의 날로 바뀌었으니 차제에 원위치하자는 것이다.

현재 상황은 여기까지인데, 사람들 말 참 쉽게 한다. 그리고 현대사 인식이 그토록 꼬였을까 하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점점 더 왼쪽으로 왼쪽으로만 흘러가는 이 세상 물결을 어떻게 할까 하는 안타까움도 피할 수 없는데, 일테면 1979년 YH무역-원풍모방 노조 사건을 보자.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사에 난입하면서 당시 큰 이슈였던 YH무역-원풍모방 노조는 당시 가장 공격적 노조활동을 보였다. 그런데 그들이 만들었던 호소문에 여공들 자신을 '산업역군'이라고 표현했던 말이 유독 눈에 뜨인다. 노동자-근로자도 아니고 그렇게 했던 것은 이른바 계급적 인식에 앞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보람을 전제로 했다는 뜻이다.

민주당 박광온 의원이 지난 20일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바꾸자는 법률개정안을 발의했다. 발의 사유는 '근로'라는 용어가 모범근로자를 양성하기 위한 갑질경제 체제의 산물라는 것이다. 이는 심각한 오류로 보다 많은 사회적 논의속에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들이 썩 특별해서가 아니라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 그게 사회적 합의였다. 이 분야의 훌륭한 저술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권태준 지음, 2006년)에 따르면 그때엔 산업역군과 함께 '산업전사'란 말도 흔하게 쓰였다. 그건 '함께 잘 살기'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게 무얼 뜻할까? 당시 우리가 근로-근로자 혹은 산업역군-산업전사란 말을 일상적으로 쓴 것은 국회의원 박광온의 일방적 주장처럼 "갑질경제 체제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걸 두고 개발독재의 가부장적 질서라고 욕하거나 일제 잔체라고 비아냥대는 건 현대사를 입체적으로 보는 안목이 없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걸음 더 나가자.

200만 기능인력, 대한민국 만들었다

산업역군-산업전사라고 하면 흔히 속칭 공돌이-공순이를 떠올리지만, 그것도 잘못이다. 이 방면에 밝은 사회학자인 연세대 류석춘 교수에 따르면 이른바 기능인력은 박정희 시절 무려 100만 명 규모로 배출됐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에 따라 집중 양성된 것이다.

이게 1980년대 전두환 정부 시절 또 다른 100만 명의 대규모 산업역군으로 확대됐다. 머리 좋으나 가난했던 시골 출신들을 이른바 특성화 공고에서 배우게 하고, 그렇게 배출된 200만 명의 기능 인력이 오늘날 중화학공업을 일궈냈다. 그들은 1960년대 경공업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던 여공이나, 전태일 같은 사회적 약자가 결코 아니다.

외려 박정희 개발연대의 수혜자들로 1980년대를 거치며 중산층 반열에 올랐다. 5인 가족 기준으로 잡으면 1000만 인구인데, 그 결과 지난 40년 동안 우린 잘 먹고 잘 살아왔다. 분명한 건 착취하는 국가 내지 사용자가 따로 있고,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소외된 채로 있었던 게 아니란 점이다.

거대한 역설은 박정희가 결코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았으며 마이 홈, 마이 카에 해외여행 휴가를 가는 중산층을 만들었지만, 그렇게 형성된 중산층이 배신을 때렸다는 점이다. 그걸 고마워하고, 합당한 노동보국의 자세를 가지기는커녕 모두가 성난 얼굴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다.

일테면 200만 산업인력 중 상당수가 노조 설립을 위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주도했다. 노조가 제도화하자 노조에 가입하지 못한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삼아 자신들의 고용을 보장받은 이기주의 역시 그들이 보였던 행패였다. 파업을 무기로 임금 인상과 복지를 요구하며 정리해고는 수용할 수 없다고 버티는 그들은 어느덧 기득권 세력이 됐다. 그게 강성노조이고, 이른바 귀족노조다.

때론 그들은 체제를 부정하는 반국가-반대한민국 성향으로 치닫기까지 한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 모두는 과거사 인식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고, 그 결과 지금 엉뚱한 분풀이에 코 박고 산다. 내 나라, 내 역사에 합당한 자긍심이 없다면 이건 온전한 나라가 아니다.

민주당 의원 박광온이 20일 대표 발의한 법률개정안은 그 증거물에 다름 아니다. 그동안 써온 근로란 용어는 사용자가 모범근로자를 양성하기 위한 갑질경제 체제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게 개정안 발의 사유는 한 마디로 일차원적 인식이다. 보다 많은 사회적 논의 속에 다듬어지길 기대한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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